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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읽히는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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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부 돌파한 신작 '1Q84'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는 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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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문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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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9일, 일본에서 발간되어 12일 만에 200만부를 찍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1q84>의 국내 판권이 15억원에 이른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거의 문학사상사에서 나왔는데, <1q84>의 경우는 국내 대형 출판사들이 경합을 벌이다가 최종적으로 문학동네로 갔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 출판계에서는 <마지막 강의>나 댄 브라운의 신작 등 10억원이 넘는 판권료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판권경쟁이 지나치게 과열화된 경향도 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국내에서 지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 15억원을 판권료로 낸 이유로 볼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라 할 <노르웨이의 숲>은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지금까지 100쇄를 찍었다. 국내에서 100쇄를 찍은 책은 <태백산맥>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광장> 등에 불과한데, 수 십 년의 세월동안 꾸준하게 인기를 끈 작품들이었다. 그런 위치에 <상실의 시대>가 놓인 것을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가 한 때의 붐인 것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다만 <상실의 시대>가 100쇄를 찍었다는 ‘이변’을 해설한 기사들 대부분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가볍고 감각적인 일본 현대소설’ 정도로 치부했다. 대중의 입맛을 적당히 맞춘 ‘무국적성의 풍속소설’이라는 비판도 있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에서 인기를 얻은 것에는, 시대적인 이유도 있었다. 거대 담론의 시대였던 80년대가 저문 후, 젊은이들은 자신의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경숙과 윤대녕 같은 독자들이 인기를 얻은 한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파고들게 되었다.
후기자본주의의 삭막한 세계에서 쓸쓸하면서도 우아한 개인의 고독을 노래하는 것 같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국내에서 많은 아류작이 탄생하기도 했다. 다만 아류작들은 이념의 진공상태에서 도피의 수단으로 하루키를 모사했을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는 몇 년 전부터 국내 출판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일본 대중소설로 이어지게 되었다.
사실 일본 내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치는 애매하다고 볼 수 있다. 신인 순문학 작가에게 주는 아쿠다가와상은 물론이고 최고의 대중문학에게 주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것도 아니다. 몇 개의 상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노벨문학상을 받지도 않았다. 독일의 한 tv 프로그램에서는 하루키의 소설이 문학도 아니라는 문학평론가와 번역자가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뉴욕타임즈>가 유난히 아끼는 작가이며, 일본에서 잘 팔리는 작가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루키가 최고의 작가로 칭송받지는 않는다. ‘평이하면서도 참신한 문체, 다층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관’ 때문에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 내에서도 찬반은 분명하다. 문학평론가 후쿠다 카즈야는 ‘나츠메 소세키 이후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말한다. 반면 비판론자들도 막강하다. 문학평론가 와타나베 나오미는 ‘최상의 읽을거리지만, 최악의 문학’이라면서 ‘사회 문제를 건드리지만 사실은 그 내부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비판한다. 비교문학가 코야노 돈은 ‘일본인은 미국을 좋아하니까’ 하루키가 잘 팔리는 것뿐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런 비판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이 아쿠다가와상 후보에 올랐을 때도 ‘미국화된 풍속을 천박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식의 혹독한 평가를 받은 것과 연결된다. 그밖에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세계인식’이라거나 ‘롤플레잉 게임을 보는 것 같다’는 평가도 있다.
최근 몇 년간 일본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서 발행부수 누계 970만부의 <노르웨이의 숲>은 올해 초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2006년에 카프카상을 수상한데 이어 올해 2월에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문학상을 받았다. 현지의 연설에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티나 가자지구 공격을 비판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1q84>가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한국에서도 무려 15억원을 지불하며 판권을 구입했다. 하루키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일까? 하긴 판권료는, 작가와 작품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팔릴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5억원이란 돈은 기꺼이 베팅할만한 액수이다.
한 가지 고백한다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다. 그의 모든 소설과 에세이를 다 읽었고,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문학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루키의 작품이 지극히 진지하고 무게 있는 ‘고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그저 가볍게 스쳐지나가자고 권유하는 작가는 아니다. 하루키의 수필집 제목은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이다. 하루키는 결코 뛰어넘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세상에 격렬하게 부딪친 후, 그 거역할 수 없는 비극성을 인지한 후,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고 낮게 읊조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루키는 자신과의, 자신의 정체성과의 대결을 끊임없이 작품 속에 투영한다. 그렇게 스치듯이 살아가려는 인간이, 어떻게 세상의 ‘현실적인 모순’과 부대끼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문체로 보나 주제의식에서 보나 치열한 자기 단련의 정도에서 보나 무라카미 하루키를 최고의 거장이라고 부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만큼 치밀하고도, 끈질기게 자신과의 대결을 파고드는 작가도 결코 많지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중에게 선택받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거장의 걸작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 역시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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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7/20 [18:14] 최종편집: ⓒ jpnews_co_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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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
sawa |
09/07/20 [2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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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1학년 때 처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접했고 일문학을 전공한지라 졸업논문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주제로 썼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고 관심이 많은 작품으로 마지막 논문을 쓰고 싶어서 선택했습니다. 다들 나츠메 소세키나 다자이 오사무에 관해 쓰던데 사실 전 잘 모르고 관심이 없었거든요. 지도교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해주시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하나도 읽어 보시지 않았더라고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문학계에 길이 남는 작품인가를 논하고자 하기보다 작가와 독자의 교감이 100%에 가깝게 이루어질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요. 단지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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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젊은이들의 대변자? |
살모사 |
09/07/21 [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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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통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무라카미의 문체를 너무 가볍고 감각적이라고 하지요. 그런 면에서 이미 고인이 된 나카가미 겐지 같은 작가는 일본현대문학의 대표라고 하기도 하고. 그래서 일본의 어떤 평론가는 무라카미를 마요네즈, 나카가미를 된장(일본)맛에 비유한 적도 있습니다. 암튼 무라카미는 문학적으로 우러나는 깊은 맛은 없지만, 일본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의 내면을 그런대로 잘 천착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의 라이프 스타일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요소가 됐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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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안내양 |
어째서닉네임 |
09/07/21 [0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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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대표작은 아무래도 전반기가 아닐까 싶다. 후반기가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가 없고, 말하는 사람으로서도 성의가 없지만, 놀웨이의 숲 그리고 댄스쓰리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세 편인가 싶다. 카프카의 해변이라던지 렉시턴의 유령 도쿄 기담집으로 비춰지는 흐름의 감지로서는 영 아닌 것이다. 때문에 희한한 유령 이야기가 가능한데, 그의 소설은 돌격대가 전부 말아먹은 것이 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실소유주가 돌격대이고, 미도리와 병원 식판을 함께 먹던 때의 주인공이 아닌가 싶다. 후자는 이름도 길고, 미도리와 병원 식판을 함께 먹던 때의 주인공, 나중에는 정치인 이름 와타나베로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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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닉네임 님 말씀에 공감 |
사족 |
09/07/23 [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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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하루키가 젊을 때 쓴 작품들을 좋아했습니다만 그가 중년으로 접어들어가면 쓴 작품들은 초기작들처럼 와닿지가 않더군요. 왠지 "중년의 냄새"가 풀풀 나면서 권태가 느껴졌고 읽다보면 힘이 빠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루키를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제 중년이 되었으니 그의 후반 작품들을 읽다보면 전과는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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