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직 지낼만하다고 느꼈던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차가운 방바닥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끔찍하게 싫은 날들이 되었다. 보일러로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우는 집이 아주 드문 일본에서, 내가 겨울을 나는 법으로는 두터운 수면양말과 내복, 온풍기와 난로, 따뜻한 녹차와 귤 정도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보는 골목길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풍경이다. 집집마다 내걸린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두운 거리에 반짝이는 불빛이 하나 둘 많아지면서 연말이 가까워짐도 새삼 느낀다.
한국도 일본도 이 계절이 되면 여기저기서 망년회로 달아올라 매서운 추위도 무색해진다. 교토 최고의 번화가 산죠(三条)거리 주변도 역시 왁자지껄한 대학생들의 무리가 여기저기 큰 무리를 이루고 서있다. 아직 몇 잔의 술이 더 필요하다는 듯한, 벌써 집으로 돌아가기엔 밤이 너무 긴듯한 분위기의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들엔, 벌써 취기가 올라있다.
며칠 전엔 나도 그 무리속의 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과제에 치이며 지내는 생활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친해지는 건축과는 세계 어느 학교를 가더라도 잘 노는 과가 될 것 같다. 제도실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마음껏 발산하며 한껏 흥이 오른 망년회의 화제는 역시 20세 전후 청춘들의 영원한 관심사인 연애였다.
스멀스멀 연애전선이 형성되고 있다고 느꼈던 모두의 예상은 역시 빗나가지 않았다. 6개월 만에 두 커플이 제도실에서 사랑의 싹을 틔웠다는 것이 밝혀졌고,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너 얘 좋아하지? 등의 수많은 루머가 난무하는 가운데 마침내 우리들의 망년회는 끝났다.
그리고 한국 대학생들의 망년회 풍경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의 망년회 며칠 뒤에 또 하나의 특별한 망년회, 바로 자코 망년회가 있었다. 자코 아저씨, 아주머니와 단골 손님들 그리고 교토대 경음악 동아리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정예 멤버의 ‘자코 사람들’ 이 25일, 크리스마스 저녁에 모였다.
▲ 왼쪽부터 자코 아주머니, 후루타 씨 부부 ©김태범 | |
망년회엔 자코답게 각자 조금씩 음식을 준비해 와서 함께 나누어 먹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고민 끝에 수육과 상추, 부추 겉절이를 만들어 가기로 했다. 모처럼의 기회라서 한국 음식을 만들고 싶었고 무엇보다 손이 많이 가지 않아 두 메뉴를 골랐다. 점심부터 삶기 시작해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불에 올려둔 뜨끈뜨끈한 수육과 겉절이 야채를 밀폐용기에 담아 잽싸게 자전거를 타고 자코로 향했다.
약속시간이 되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 조용하던 가게 안이 금새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학생시절 자코를 드나들었던 손님들이 이제 아기엄마가 되어 애들을 데리고 오시는가 하면, 현역 대학생들도 한 켠에 앉아 테이블을 채우고 있어 그간의 지나온 30년 세월을 자코 사람들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자코 아저씨께서 망년회의 시작을 알리셨다.
“건배는 태범이가 한국식으로 한 번 해봐~” 하시고 날 쳐다보시는 바람에 우물쭈물 대다가 얼떨결에
“여러분 모두 한 해 동안 수고하셨어요, 건배!” 라는 말로 첫 잔을 부딪혔다.
자코 아주머니께서 준비하신 음식이 먼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다. 역시 모두의 예상대로 한국 음식이 가득했다. 데친 새우와 야채를 양념에 매콤하게 무친 비빔우동이 먹음직스러웠고, 부침개와 불고기도 모인 사람들만큼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비빔우동을 집으며
“이건 어떻게 먹는 거에요?” 하고 신기한 듯 묻는 분도 계셨고 “역시 한국 음식이 많네요~” 하시는 분에게는 자코 아주머니께서는
“김치 볶음밥 만들어 놓은 것도 있어, 아직 안 내왔지만.” 하고 은근히 자랑도 하셨다.
게다가 다른 아주머니들도 다들 요리솜씨가 보통이 아니셨던 까닭에 준비해오신 음식을 하나하나 꺼낼 때 마다 ‘다음은 뭘까?’ 하고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쑥갓 샐러드, 당근과 건포도 샐러드, 로스트 비프, 월남쌈, 고구마 맛탕, 유부초밥 등등…… 기억을 더듬으면서 금새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었다.
내가 만들어 간 상추, 부추 겉절이도 나름 인기를 끌었다. 수육과 겉절이의 조화를 발견해 낸 우리 선조가 대단할 따름이지만, 아주머니들이 겉절이 양념 만드는 법을 몇 번이고 물어보시면서 다음에 꼭 만들어 보겠다고 하셔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한국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흥이 올랐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짤랑”하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메리 크리스마스!” 하는 목소리가 퍼졌다.
“산타다!” 이곳 저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해주신 산타. ©김태범 | |
▲ 산타를 발견하고 너무 놀라버린 아이. ©김태범 | |
산타 클로스의 주인공은 얼마 전 득녀하셔서 언제나 싱글벙글하고 계시는 단골손님 이토씨였다. 자코 안은 순식간에 축제분위기가 되었다. 빨간 자루 안에 선물을 가득 담고 찾아온 산타에 놀라며 더러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특히 가장 나이가 많은 두 자매는
“이제 산타 없는거 다 아는데 이 아저씨는 뭐 하는거야……” 하는 듯한 무표정으로 멀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달랐다. 구경하던 어른들은 산타의 출현을 재미있어 하며 다음 행동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며 더 열심히 지켜보았다. 어쩌면 어른들이 산타에 더 열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산타가 돌아가며 아이들을 안아 주는 특별서비스도 자청했지만, 안기는 아이들마다 울음을 터뜨리며 도망가려고 바둥거려, 어른들의 웃음보를 터뜨리게 했다. 그러자 산타는 선물보따리를 풀어서 동심을 돌려보려고 했다.
“착한 아이 손들어요!” 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오히려 어른들이 더 신나서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교토대 경음악 동아리 출신의 후루타 씨가 가장 먼저 손을 드셔서, 그의 아내가 한 마디 하자
“나 착한애야!” 하고 천연덕스럽게 맞받아치는 재밌는 풍경도 있었다.
마침내 한바탕 산타의 소란이 휩쓸고 간 뒤,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도 선물 봉투를 풀어보며 동심의 세계로 잠시나마 돌아갔다. 선물 봉투 안에는 작은 과자와 사탕들이 종류별로 가득 들어 있었다.
▲ 서프라이즈! 산타의 등장으로 웃음바다가 되었다. ©김태범 | |
어느덧 밤도 깊어가고 산타 클로스도 오늘은 바쁜 날이라면서 일찍 귀가 하셨고, 시간이 늦어지면서 하나 둘 사람들도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끝까지 자리에 남아 있던 후루타 씨 내외분과 자코 아저씨. 아주머니는 아직도 망년회 여운이 남아 있는지 못다한 수다 보따리를 계속해서 풀어놓았다. 아, 물론 경음악 동아리는 끝까지 왁자지껄한 채로 자리를 지켰다.
후루타 씨 아내가 갑자기 자코 아저씨에게 묻는다.
“두 분께서는 이렇게 계속 가게 하시면서 안 피곤하세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 일하시고, 언제 손님이 올 지도 모르고, 계속 가게 열어놓는 것만 해도 아주 피곤할 것 같아요.” 하자 자코 아저씨께서
“어른이 다 됐어~” 하시면서 치켜세우신다.
“근데 두 분 이렇게 가게에서도 하루 종일 붙어 계시고, 집에 돌아가서도 계속 함께 계시니까, 답답하다든가, 지긋지긋하다든가 하는 건 없으세요?” 하고 천진난만하게 다시 물으신다. 후루타 씨가 옆에서 거들며
“그런걸 너무 깊게 물어보면 안돼, 근데 사실은 나도 궁금해!” 하시며 자코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나도 당연히 이것저것 아내한테 불만도 있고 또 그럴 때는 그대로 다 말했지. 그러면 아주 괴로워. (웃음) 역시 그런 괴로운 시기가 있는데, 그걸 지나면 '뭐 다 그런 거지' 하면서 불만이 있음에 묻어놓고 참으면서 살게 되지. 괴로운 시기를 잘 극복하고 나서는 참으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이럴 때는 이런 선은 넘지 않고 얘기해야 한다든가.” 후루타 씨 부부는 결혼 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젊은 부부다. 후루타 씨 부부가 결혼생활이라는 발걸음을 막 내디딘 것이라면, 자코 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는 지금까지 먼 길을 걸어오신 셈이다. 두 부부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 갈까 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코 아저씨께서 내 옆구리를 찌르시며
“너도 잘 들어둬~” 하시고 웃으셨다.
지난 10주간 교토에서의 일상을 소개하는 연재를 하며 교토는 이렇더라, 일본 사람은 이렇더라 하는 미숙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려는 것이 목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제이피뉴스가 지향하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일본, 그 일상을 전달하는 것’ 만이라도 제대로 보여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풀어냈던 교토의 이야기들이, 어쩌면 일상을 전달하는 작은 목표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10주간의 연재를 끝내는 나에게는 그 어떤 결론보다 물음표가 더 많이 남아 있다.
내가 전한 이 일상은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될까, 또 내게 교토는 앞으로 어떤 곳이 될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잘 듣고 잘 기억해야 했다. 평소에는 흘려 듣기 쉬웠던 일상의 소리를 귀 기울여야만 글로 옮길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작은 지혜를, 작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상을 전하는 글은 끝났지만 언제나 들려오는 일상의 소리를 더 잘 들어두고 잘 기억해둬야겠다. 교토는 내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