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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친 "보고 싶어요. 갑자기 생각났어요" (4부)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4부)
 
박철현 기자
(이 글은 연재물이므로 처음부터 읽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오타쿠 (1부)
헌책방 (2부)
걱정 (3부)

전화번호를 교환한 우리들의 첫 전화는 아내가 나에게 건, 바로 그 술취한 전화였다. 그리고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술취한 목소리는, 유독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느껴졌던 건, 물론 이유가 있다. 그때까지 우리들은 매주 수요일에만 만났고 주로 내가 떠들었다. 원래부터 말하기를 좋아했던 것도 있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있다.

앞서 몇번이나 말했듯이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아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래서요?", "오! 신기하다", "그렇군요"를 반복했다. 만약 지금이라면 가뿐하게 "그렇죠. 그런데 당신은 어때요?"라는 식으로 가볍게 물리치고 재역습을 가하겠지만, 그땐 세상물정을 전혀 모른데,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오니 이건 필사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아직 일본어가 짧았던 때다. 아는 단어가 총동원되면서, 당연히 그것들을 내뱉는 시간 역시 길어진다. 그때까지 아내와 나의 데이트(?)는 일주일에 한번, 볼란티어 일본어 교실에서 돌아오는 전철안 10분과 역에서 내려 기숙사까지 걸어가는 10분이 전부였다. 나에 대한 인상을 '오타쿠'에서 '공유자'로 바꾸어 놓은 '헌책방'만 제외하면 전부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내가 7번째 금요일, 그러니까 수요일이 아니다, 술에 취해서 밤 12시가 지나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까지, 내가 아내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건 아내의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 어드레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좋아한다, 그리고 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수치적으로 보자면 20분의 대화중 17분은 내가 말했고, 나머지 3분은 아내의 간단한 추임새였던 것 같다.
 
그런데 7번째 금요일 자정12시를 지나면서 나는 아내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아내가 나를 심하게 좋아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다.
 
연애는 결국 어떠한 인상을 주고 받는 것이다. 그 인상은 첫인상이 될 수도 있고, 나중인상이라도 상관은 없다. 연애론을 갈파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던 남녀가 어느날 갑자기 연인이 되는 경우, 나는 많이 봐 왔다. 어떤 타이밍과 시공간적 분위기에서 이쪽을 향해 보내오는 상대의 인상에 따라 "우린 그냥 친구지?"였던 게 "나 너 정말 사랑하는데..."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내려갔다. 아내는 기숙사 정문옆 가로등 불빛 아래 음료수 자판기 옆에서 이쪽 기숙사 출입구 도어를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자동 유리문 너머로 보인, 아내는 검정색 코트에 모자를, 그리고 왼쪽 어깨엔 포터(porter) 가방, 오른쪽 손엔 커다란 사각 쇼핑백을 들고 있다. 자동문이 열리고 내 모습이 보이자 아내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외쳤다.
 
아내) 보고 싶었어요!
 
7번째 금요일에, 내가 아내로부터 받은 '인상'이었다. 안 본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밤 12시에 친구들과 술먹고 돌아가는 길에 이제 막 전화번호를 받은 사람에게 연락을 해, 얼굴을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띠며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인상'을 거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물론 거부할 힘도 생기지 않았다. 자판기에서 120엔짜리 캔커피를 두개 뽑아 자판기 옆의 벤치에 걸터 앉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아내가 보내오는 '인상'을 한껏 느끼고 싶었다.
 
아내는 5년전 규슈 요론토(与論島)에서 알게 된 인디밴드의  도쿄 시모키타자와(下北沢) 공연을 다녀왔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후 뒷풀이에 참가해서 꽤 마셨던 것 같다. 항상 가벼운 미소만 띠던, 정숙했던 아내는 그날만큼은 시종일관 "하하하" 모드였다.
 
아내) 세상에! 뒷풀이 하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하하하. 앞으로 도쿄에서도 자주 공연하면 좋겠는데 또 돌아간다는 것 있죠? 계속 도쿄에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지만 할 수 없죠. 하하하.
 
무슨 말만 끝나면 호쾌(?)하게 웃었다. 일본사람들 12시 지나면 이웃집 잠자리 훼방놓지 않으려 조용해진다고 하던데 그도 아닌가 보다. 아니 금요일만의 특권일 수도 있다. 아내가 '하하하' 모드에 돌입해 있을때 벤치앞을 지나간 전화통화했던 중년의 샐러리맨도 '허허허' 모드에 빠져 있었고, 팔짱을 낀 연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의 가슴을 가격하며 '하하호호' 웃어댔다.
 
아내는 그간 말못했던 서러움을 한번에 만회하려는 기세로 폭포수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쏟아냈다. 바쿠쇼몬다이(爆笑問題)의 오오타 히카루가 어쩌고, 스차다라파(schadaraparr)의 보즈군이 저쩌고. 물론 지금은 각각 만담콤비, 힙합그룹인 걸 알지만, 그땐 이들이 뭐하는 양반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또 하나 느낀 것은 절망감이었다. 진짜배기 일본어는 이런 거구나라는 좌절감과 함께 매주 수요일 아내가 과연 얼마나 답답했을까라는 미안함이 절로 일었다. 한동안 "오!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뭐죠?"라는 추임새를 넣어가며 듣기만 했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그리고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쯤 아내는 말했다.
 
아내)  그래서 다 끝나고 전철타고 오는데, 같은 방향 친구들 다 내리고 나혼자 되니까... 하하하. 글쎄 웃긴다니까, 참.
나) 뭐가요?
아내) 갑자기 당신이 생각나는 거예요.

아내는 내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지금 아내는 이 부분에 대해 "몰라. 기억이 안나. 술 취했었나 보다"라고 발뺌(?)하지만 맨정신인 나는 그날의 광경을 뚜렷히 기억한다. 
 
나란히 앉아 정면을 쳐다보며 120엔짜리 캔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키려고 했을때, 아내는 나의 옆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신이 생각났어요"라고 분명히 말했다. 
 
커피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었지만,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아내의 눈을, 웬일인지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나는 황급히 캔커피를 다시 홀짝거렸다. 남아 있을리가 없는데 말이다. 쩝쩝하는 소리가 들리자 아내가 자기가 들고 있던 캔커피를 내민다.
 
아내) 하하하. 이거라도 마셔요.
나) 아, 아! 네...
 
건네 받았지만 완전하게 비었다. 황당해하는 내 표정이 재미났던 것일까? 아내의 '하하하' 모드는 '깔깔깔' 모드로 바뀐다.
 
아내) 아! 정말 너무 재미나. 깔깔깔.
나) ..................-_-;;
 
연애는 공유과 인상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공유와 인상을 집대성시키는 것은 "결단"이다. 공유된 것은 인상을 통해 성숙하고, 종국에 그 인상은 "결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결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서로에게 애인이 없을 경우, 속칭 솔로일 경우엔 "우리 사귀자"는 연애선언이 될 것이며, 어느 한쪽, 아니 양쪽 다 애인이 있을 경우엔 이별이라는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공유와 인상은 추억속에서만 자리잡게 된다. 먼훗날 과거를 돌이켜 봤을 때 추억의 한페이지에 문득 떠오르는 그녀, 혹은 그. 물론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아무튼 내 식으로 말하자면 연애의 3요소는 공유, 인상, 결단이다.
 
아내는 이때 운좋게 솔로였다. 하지만 나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즉 이번에 결단을 내려야 할 사람은 나였다. 무엇보다 나는 아내를 추억속의 여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시간 동안 벤치에서 대화를 나누고 처음으로 아내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러면서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했다. 아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술은 깬 것 같았는데 별다른 리액션도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날 아내와 함께 걸었던 10분동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이미 '결단'하기로 마음 먹었던 탓일까? 내용이 아니라 분위기만 기억난다. 나는 아주 덤덤히 말했고, 아내는 아주 담담히 들었다는 느낌 말이다.
 
아내와 헤어진 후 기숙사로 돌아와, 나로서는 처음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화의 내용도 깊어졌고, 시간도 길어졌다.
 
나) 잘 들어갔어요?
아내) 하하하. 집 앞까지 바래다 줬잖아요.
나) 아참, 그랬군요.
아내) 잠 안와요?
나) 네.
 
아내) 뭐할 거예요?
나) 음. 글쎄요. 일본어 공부?
아내) 나랑 대화하면 되겠네. 다 공부잖아.
나) 회화말고 문법하려고 했는데. 하하
아내) 쳇.
나) 갑자기 회화하고 싶어졌어요......-_-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아내는 다시 말했다.

아내) ... 만나서 할래요?
나) 뭘요?
아내) 회화공부.
나) 지금?
아내) 응. 지금.
 
사랑에 빠지면 이렇게 된다. 모든 시공간을 공유하고 싶어지는 것. 사랑이 가지는 위대함일수도, 혹은 피곤함일수도 있다. 이때 나는 물론 위대함을 느끼고 있었고, 또 그러고 싶었지만 그 전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나) 회화하기 전에 할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아내) ...
 
나) 조금 있다가 전화할께요.
아내) 그래요. 기다릴께요. 대신 꼭 전화해요.
 
전화를 끊고 베란다로 나가 조그마한 의자에 걸터앉아 마일드세븐 슈퍼라이트를 2개피 연달아 피었다.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1년간 사귀었던 그녀에게, 물론 8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릿속 한켠의 공유와 인상의 페이지에만 남아있는 그녀에게 나는 헤어지자는 '결단'을 알려야만 했다. 
 
핸드폰을 열고 국제전화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건너 간다. 신호음을 들으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문득 쳐다보았다. 11월 10일 새벽 1시 40분이다. 그리고 나는 줄곧 시계를 쳐다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영화 <아비정전>의 도입부는 시간의 공유에 대한 철학적 수사를 n85 블루 젤라틴 필터의 영상으로 보여준다. 필터 대신 전자식 핸드폰이고, 영상 대신 음성이었지만 11월 10일 새벽 1시 40분부터 48분까지 8분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듯 하다.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있을 그녀가 원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 '8분'을 오직 둘이서만 보냈다는 건 절대적 진실이니까.
 
1시 48분, 전화를 끊고 다시 마일드세븐 슈퍼라이트를 꺼내 물었다. 담배연기는 밤하늘로 올라가는데, 눈물은 뺨을 타고 내려 온다. 2개피 째에 불을 붙이자 핸드폰 벨이 울린다. 아내다. 그런데 전화가 아니라 문자메시지다.
 
"잘께요. 그냥 오늘은 문법공부하세요. 내일 아침에 전화할께요. 그리고... 많이 고마워요."
 
왜 많이 고마워했는지는 다음에 말할 수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아내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내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전화를 해왔고, 우리는 그날 오전부터 만났고, 그날 밤 나는 사귀자는 고백과 동시에 첫 키스를 나누었다. 신사(神社)에서, 말이다.

 
(5부로 이어짐)

■ 5부 : 일본 여친 "한국남자들은 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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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7/05 [07:23]  최종편집: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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