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재형식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읽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못할 확률이 꽤 높으니, 이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 일본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1부)헌 책방까지 따라 가겠다는 나의 넉살에 아내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1부에서도 말했지만, 만약 그때 내가 "일본 헌책방 한번도 가 본적 없는데 같이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아내는 나를 '스트리트 파이터가 아닌 사쿠라 대전을 좋아하는 이상한 외국인 오타쿠'라고, 주욱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당연히 프로포즈를 받기는 커녕 사귀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면, 동어반복이지만, 아내는 나를 이상한 외국인 '오타쿠'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타쿠를 좋은 의미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도 물론 있고 또 학문적으로는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각총리대신마저 오타쿠로 불리고 있을 상황인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오타쿠와 사귀고 싶어하는 일본 여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미팅 자리에서 애니메이션이나 피규어 이야기 꺼내는 순간 장내는 얼어 붙는다. 일본어로 '히쿠(引く)'라고 표현하는데 몸과 마음이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뒤로 빠진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할 말이 없거나 딸리면 차라리 "당신 귀엽다"를 반복하는 게 낫다. 잘나가는 호스트들이 일본여자들 유혹하는 대화의 반 이상이 "귀엽다"는 단어다. 발음도 딱 네자다. 카/와/이/이.
이런 가볍고 적확한 처방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 되지도 않는 일본어로 아야나미 레이(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여성 캐릭터)의 붕대 패션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순간, 두번다시 당신에게 미팅 권유 전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교실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돌아가는 전철안에서도 줄곧 게임이야기만 했던 것일까?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의 반응에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전형적인 일본인인 아내는 외국인인 내가 짧은 일본어를 총동원해서 일본의 게임을 언급하는데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오! 그래요?", "아! 그건 왜 그런거죠?", "우와! 그것도 알고 있어요?"라는 반응이 나오게 된다. 아내가 이렇게 반응하니 나는 또 "그럼요!", "그건 디버깅할 때 쉽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요. 그런 우라와자(裏ワザ, 감추어진 테크닉) 모르면 이거 절대 끝까지 못가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빈곤의, 아니 오타쿠의 악순환이다.
그때 내가 아내의 굳은 표정을 무릅쓰고 헌책방을 따라가지 않았었다면 그 다음주에 우연히 만나더라도 '아름다운 평화의 아이'라는 장난이나 '어제 다른 게임 해봤는데 말이죠' 등만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나와 같은 전철을 타지 않으려는 작전을 세웠을 것이고, 결국 우리 둘은 그냥 매주 수요일에만 만나는 옆자리의 일본인 선생님과 이상한 외국인 오타쿠라는 관계로 설정되었을 테다.
헌책방이 결과적으로 아내와 내가 사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말을 앞에서 했다. 이 말은 그날 헌책방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로 인해 우리 둘의 '선생님'과 '오타쿠'라는 관계설정이 180도 바뀌어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역사는 헌책방에서 이루어진다. (사진은 쥬오센 니시오기쿠보역 근처에 있는 <하트랜드> 아내와 나의 추억이 담긴 곳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종종 들르는 헌책방 겸 다방이다) | |
지금은 햄버거 가게로 변신한 그 헌책방. 일본의 헌책방이라면 보통 북오프(book off)가 유명하지만, 아내가 즐겨찾던 헌책방은 k역 근처의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 지명을 말해 버리면 신비로움이 사라질 것 같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도쿄 쥬오센(中央線)의 k역이라는 것만 알아달라. 도쿄에 거주해 본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쥬오센 특유의 문화적 향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카노의 브로드웨이, 코엔지의 중고옷 가게들, 아사가야의 쥬오도오리 상점가, 젊음이 넘치는 키치죠지, 문화의 거리 미타카, 프로덕션 ig와 다츠노코가 있는 고쿠분지 등.
아내가 주로 가던 헌책방도 그런 류의 곳이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영화서적과 음반들. 덴키 그루브와 블루 하츠가 번갈아 가며 울려 퍼지던 곳.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말자 눈에 들어와 박히는 영화잡지 컷(cut)과 키네마 쥰보의 백넘버.
나) 우와, 이런 데 나 정말 좋아하는데!
아내) 아..그래요...? (피식)피식,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아내는 분명히 '피식' 웃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땐 헌책방의 분위기에 눈이 팔려 그런 아내의 소소한 얼굴표정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명색이 영화연출 전공자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기분에 빠져 들어 아내를 놔두고 나 혼자 서점을 빙 돌았다.
황홀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세계, 오오시마 나기사의 "제국" 시리즈, 오즈 야스지로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 컬렉션. 어두컴컴한 학교 자료실에서나 봤던 '요짐보'와 '거미집의 성' vhs 테이프가 200엔에 떨이 처분되고 있었던 건 지금도 선연하게 기억날 정도다.
그러나 나는 당시만 하더라도 이것들을 읽거나 또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영화평을 읽을 정도의 일본어 수준이 되려면 적어도 2년은 수행해야 하며, <키네마 쥰보>를 제대로 읽으려면 3년 이상은 일본어를 공부해야 한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보물들이 널려져 있어도 말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갑자기 일본어 공부가 하고 싶다는 욕망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서점을 둘러본 나는 서점 문 바로 안쪽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는 아내쪽으로 걸어갔다. 혹시 아내가 계속 있을 것이라면 먼저 기숙사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한발 두발 아내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내는 완벽하게 독서에 빠져 있었다.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꽤 가까이 접근했을 때 아내가 읽고 있던 책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의 사진이 커다랗게 표지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무심결에 말을 꺼냈다.
나) 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네...아내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영화적으로 표현한다면 슬로우 모션이 어울릴 법한 장면이다. 그녀의 얼굴이 앞서의 '피식'과는 전혀 다른 진지한 표정이다.
아내) 왜 알아요?
나) 예? 왜 알긴요. 그냥 알죠. 영화도 좋아하는데...
아내) 왜요?
나) 예? 그게 그러니까...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감이 안 왔다. 아니 그것보다 아내의 반응이 이해가 안되었다. 영화감독을 아는데 '왜'라고, 그것도 두번이나 물어보는 시츄에이션, 좀 웃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아내의 눈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나) 이란이나 이쪽 제3세계 영화 많이 보거든요. 일본말로 뭐라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 베스트 10에도 들어가요. 숙제때문에 막 친구 찾아 삼만리 떠나는 영화, 그외에도...한참 설명을 하고 있으려니까 아내가 책을 나에게 건넨다. 엉겁결에 받았다. 순간 아내는 몸을 돌려 서점 밖으로 뛰쳐 나갔다. 어떤 상황인지 감이 안 잡혀서 한 5초정도 멍하게 서 있던 나는 일단 아내를 쫒아가야 겠다는 생각에 뒤따라 나갔다.
오른쪽, 없다. 왼쪽 없...아! 있다. 그런데 뛰고 있다. 마치 도망가는 듯이 말이다. 어느샌가 아내를 뒤쫓고 있는 나. 지나가던 사람들의 부러운, 혹은 부끄러운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아내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나) 참나, 갑자기 뛰어가면 어떻게 해요? 뭔 일 있었어요?
아내) ......
나) 그럼 갑자기 왜 뛰어요. 힘들어 죽겠네.
아내) ......처음 봤어요.
나) 예?
아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아는 사람.당시 아내는 키아로스타미를 가장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물론 자기 주위의 그 어떤 사람들도 키아로스타미를 몰랐었다고 한다. 영화를 좀 안다는 친구들도 제3세계 영화는 관심밖이었다.
시부야의 '유로스페이스', 히가시나카노의 '복스히가시나카노(현재는 포레포레)' 등 독립영화 전용상영관에서 우연히 본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아내의 감성을 지배해 버리고 말았다.
아내가 서점을 뛰쳐 나간 이유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자신의 그러한 감성을 공유한 유일한 사람이 10분전만 하더라도 디버깅이 어쩌구 저쩌구를 읊어대는 오타쿠였다는 것에서 오는 충격 말이다. 실제 아내는 나중에 "그땐 정말 너무 충격이었고, 어떻게 리액션을 취해야 할지 감이 안왔었어. 일단 도망가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웃으면서 말한 적이 있다.
나) (책을 흔들며) 그런다고 갑자기 나한테 던지면 어떡해요. 쩝.
아내) ...... 근데, 돈은 냈어요?
나) 무슨 돈?
아내) (책을 가리키며) 그거 책값.
나) .........-_-뛰어온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서점에 돌아가 책을 반납하고 우리는 귀가길을 재촉했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길을 걸으면서 아내는 한국에 대해서 물어왔다. 아내는 나와 만나기 전까지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아마 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흥미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종종 말한다.
소설가 장정일은 <독서일기> 서문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왜냐면 내가 안 읽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경험적 인식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완벽한 '무(無)'였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안으로 들어올 때가 있는데, 아내에게 있어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랬다.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던 것이 지금은 어디보다도 가까운 외국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국에 관해 이런 저런 말을 주고 받으며 아내의 반응이 조금은 본심(本音)을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귀/엽/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전혀 아내와 사귈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그때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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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친 "걱정했어요. 많이"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