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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구로사와 아키라의 궤적 (하)
'7인의 사무라이'와 '절대 3부작'으로 전세계 영화인의 경배를 받다
 
박철현 기자
■ '천재 구로사와 아키라의 궤적(상)'에서 이어짐.
 
'세계적 거장 구로사와(世界のクロサワ)'.
 
구로사와 아키라를 상징하는 말이다. 구로사와는 일본보다 해외에서 인정을 받았고 전세계 영화인들은 그에게 '세계'라는 상징을 부여했다. 영화평론가 고바야시 노부히코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서양의 고전들, 이를테면 맥베스나 리어왕이 구로사와의 손을 거치면 동양적 신비로움으로 재무장한 새로운 영상언어로 재탄생한다. 구로사와는 누구보다도 열려있는 감독이었다. 그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모티브를 따 왔고 그것을 다시 구로사와 언어로 재해석해 세계속에 내 보냈다."
 
▲ 생전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도호주식회사
 
'라쇼몽'으로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금사자상(대상)을 수상한 이후 다시 도호(東宝)와 작업을 재개한 구로사와는 '이키루'(生きる, 52년, 도호)로 휴머니즘의 진수를 보여줬다. 도호노동조합이 제3차 노동쟁의에서 미군 및 경찰의 개입으로 힘이 약해진 상황에서 나온 이 작품은 노조와 경영자들 양쪽 모두의 호평를 받았고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덕분에 구로사와는 차기작으로 아무 소재를 선택해도 되는 기회가 주어졌고 1년동안 천천히 시대극을 구상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바로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54년, 도호)다.
 
7인의 사무라이는 1부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매우 치열한 시나리오 회의를 거쳤다. 이 작품의 각본을 맡았던 하시모토가 가져온 시나리오를 이해하지 못한 구로사와는 면밀한 검토를 거친 후 그 어떤 작품보다도 리얼하고, 인간적이며, 민중적인 사무라이상을 그려냈다. 
 
하지만 7인의 사무라이의 매력은 그 결말에 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일반적 영화문법과는 달리 상당히 허무하고 냉소적으로 마무리된다. 해피엔딩, 혹은 비극이라는 완성된 결말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가 일단락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일종의 열린(opened) 결말이다.
 
전후반을 아예 나눈(전후반 사이에 5분간 휴식시간마저 있었음) 207분짜리 영화는, 후반 빗속에서 몇 십분 동안 장쾌한 액션신을 선보였지만 종국엔 살아남은 3명의 사무라이가 "이긴 것은 백성일 뿐"라는 허무한 대사를 날리면서 끝난다.
 
그런데 보통 이런 결말이라면 관객들이 짜증내고 평론가들이 높은 평가를 내릴 법한데도 당시 상황은 정반대였다. 키네마준보는 이 작품을 54년 한 해동안 발표된 가장 볼만한 작품 3위에 올렸다. 1위는 '24개의 눈동자', 2위는 '여자의 쉼터'로 둘 다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작품이다.
 
기노시타는 당시 도호와 쌍벽을 이루던 쇼치쿠(松竹) 제작소의 중견감독으로 이 작품들도 매우 뛰어난 메시지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 이들 작품과 7인의 사무라이를 비교해본다면 역시 후자쪽이 엄청난 박력과 영화적 표현력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평론가 고바야시 노부히코는 7인의 사무라이가 고작(?) 3위에 머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 평단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3위로 매겼는지 알고 싶어서 키네마준보를 찾아봤다. 그런데 그 평들을 보니 구로사와 작품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평론가들의 분위기가 너무 강하게 표출되고 있어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천재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그들의 엘리트적 발상이 역설적으로 구로사와를 천재로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7인의 사무라이는 구로사와의 모든 것을 담은 작품이다. 구로사와는 이 작품을 통해 '구로사와=시대극의 거장'이라는 등식을 확립시켰으며 기술적으로는 멀티카메라 기법을 처음으로 동원해 세간의 상식을 깼다.
 
사람들은 구로사와를 완벽주의, 기다림의 대가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구로사와는 완벽을 추구했지만 보수적이진 않았다. 그는 신기술에 끊임없이 도전했고 그 누구보다도 민첩한 반사신경과 현장 적응력, 그리고 즉흥성(애드립)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멀티카메라 기법은 한 장면을 여러 대의 카메라로 나눠 찍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은 촬영시간의 단축과 용이한 편집을 위해 사용하는 기법이지만 구로사와는 이런 기술적인 편의를 위해 이 기법을 도입한 것이 아니다.
 
구로사와는 키네마준보와의 대담에서 "(멀티캠 기법으로 촬영하면) 원신 원컷으로 다 찍어버리게 되니까 다들 긴장해서 그런지 몰라도 리얼한 그림이 나오더군"이라고 말했다. 배우, 스탭의 긴장감을 고조시켜 그 장면에 걸맞는 리얼함을 창출하기 위해 멀티카메라 기법을 동원했다는 말이다.
 
구로사와에게 어울리지 않을 법한 민첩한 반사신경은 대작 '가게무샤'(影武者, 80년, 도호=구로사와 프로, 칸느국제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의 에피소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로사와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조역 가운데 하나였던 말(馬)을 빌리지 않았다. 그는 아예 망아지를 구입해 키웠다. 직접 조련시킨 후 적재적소에 투입시키겠다는 의도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예의 완벽주의가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구로사와는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치 신(神)이 내린 듯한 민첩함을 보여준다. 가게무샤에 출연했던 배우 야마자키 쓰토무는 그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게무샤의 라스트 신은 다케다 신겐의 군대가 나가시노(長篠)에서 패하는 장면으로, 원래는 다케다 군의 병마가 쓰러진 상태로 끝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마취에서 깨어난 말들이 펄쩍펄쩍 뛰고 달리기 시작한 겁니다.
 
평소의 감독님이셨다면 다시 마취시키고 찍었을 것인데, 갑자기 '고!' 사인을 내시더군요. 나중에 완성된 필름을 보니 말들의 난동이 마치 생사가 교차되는 전국시대의 혼란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멋진 장면으로 느껴져 깜짝 놀랐습니다."

▲ 서부극에 수많은 영감을 줬던 '요짐보'. 세르지오 레오네는 이 작품을 무단으로 인용해 '황야의 무법자'를 만들었다.   ©도호주식회사
 
구로사와의 현장 적응력은 '절대 3부작' 중 하나이자 요짐보의 속편격인 '쓰바키산쥬로'(椿三十郎, 62년, 도호=구로사와 프로)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시나리오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구로사와 감독이었지만, 이 작품만큼은 그렇게 못했다.
 
구로사와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미후네 도시로가 나카다이 다쓰야를 죽이는 장면을 글로 묘사해 낼 자신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실제 쓰바키산쥬로의 오리지널 촬영용 대본에는, 이 장면이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아아! 나는 도저히 이 장면을 쓸 수 없다!"
 
시나리오를 받은 미후네와 나카다이가 사전미팅에서 "감독님, 어쩌시려고..."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로사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때 가서 생각하지. 현장에서 판단해야겠어. 어느 정도는 (머리속에) 그려져 있지만 말야."
 
어떻게 보면 구로사와답지 못한 에피소드지만 이 에피소드야 말로 구로사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만큼 이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구로사와 전설은 '거미집의 성'(蜘蛛巣城, 57년, 도호)에서 발현됐다.
 
거미집의 성은 구로사와의 후기 예술실험주의 스타일에 영향을 준 작품으로도 유명한데, 세익스피어의 연극 '맥베스'에서 모티브를 따 왔다. 이 영화는 이전까지의 구로사와 영화의 특징인 리얼리즘과 캐릭터성을 순식간에 허물어뜨린, 어떻게 보면 구로사와식 실험영화라 할 수 있다.
 
구로사와는 이 작품을 통해 냉정한 형식미와 연극적인 캐릭터를 극한까지 추구했고, 그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기묘한 공포영화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부하들의 무수한 화살을 맞아 죽어가는 와시즈(미후네 도시로)의 죽음을 묘사한 마지막 장면으로, 여기에서 따온 스틸컷은 이후 구로사와 회고전 홍보 포스터 등에 7인의 사무라이와 더불어 가장 많이 쓰였다. 지금 한국에서 열리고 있는 구로사와 탄생 100주년 기념 회고전도 거미집의 성 마지막 장면을 차용한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 장면이 트릭없이 촬영됐다는 점이다. 구로사와는 미후네에게 이 장면을 어떻게 찍을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가 촬영 당일 날 미후네에게 동선을 설명했다.
 
"이렇게 돌았다가 몇 초 후 반드시 이쪽으로 돌아야 해. 한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된다."
 

그런데 구로사와가 이때 몇 번이고 똑같은 설명을 되풀이하자 미후네는 "알겠어요. 근데 왜 그렇게 몇 번이고 강조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제서야 구로사와는 미후네의 눈을 올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진짜 화살을 쏠 생각이거든."
 

그렇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거미집의 성 마지막 장면, 도저히 연기라고 보기 힘든 그 생사를 넘나드는 리얼한 움직임과 표정이 어떻게 창조됐는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미후네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화살을 피해 다녔고, 이 장면은 무려 5분여간 지속된다. 그는 이후 "내 연기인생에서 그토록 무서웠던 경험은 없었다"라고 실토했다.
 
물론 구로사와는, 이런 일화들에도 불구하고 완벽주의로 유명하다. 위의 일화들보다 완벽주의에 관한 일화들이 훨씬 많다.  

가령 '절대 3부작' 마지막 편인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 63년, 도호=구로사와 프로)에서는 주인공이 전철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별 것 아닌 이 촬영을, 구로사와는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주위 스탭들이 왜 그러는 것인지 의문을 품자, 구로사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저 집 2층 부분이 방해가 되는군. 조감독, 저거 좀 치워 버리지."
 
결국 조감독은 그 집주인에게 부탁해 2층 부분을 부쉈고, 비로소 촬영은 진행될 수 있었다. 이런 완벽주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 도호는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 때문에 사실상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결별하게 된다.  ©도호주식회사
81살에 만들어 낸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 91년, 구로사와 프로=피쳐필름엔터프라이즈)에서 구로사와는 줄을 늘어선 개미를 만들어 내라는 기상천외한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무려 3만 마리였다.
 
스탭들은 촬영이 없는 날 개미를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 작품의 주연 배우였던 리처드 기어는 "개미와 같이 출연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말을 남긴 채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구로사와의 완벽주의는 그토록 많은 걸작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도호에게 버림받는 이유가 된다.
 
구로사와는 '숨은 요새의 세 악인(隠し砦の三悪人, 58년, 도호)을 끝으로 도호와 사실상 결별한다. 결정적 원인이 바로 구로사와의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도호는 예산을 훨씬 초월했지만 도무지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이 영화가 완성되자마자 앞으로는 공동제작하자고 통고했다. 그것도 도호가 훨씬 유리한 조건의 공동제작이었다. 나중에는 배급만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어느샌가 흐지부지됐다.
 
이른바 '절대 3부작(絶対三部作)'으로 불리는 '요짐보', '쓰바키산쥬로', '천국과 지옥'의 성공 때문이다.
 
구로사와 매니아들이라면 누구나 열광하는 '요짐보'(用心棒, 61년, 도호=구로사와 프로)는 상대적으로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지만 경쾌한 유머와 빠른 전개, 독특한 캐릭터로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성공을 거뒀다.
 
또한 이 작품을 통해 등장한 나카다이 다쓰야는 미후네에 버금가는 안티 히어로로 이름을 떨쳤고, 구로사와가 미후네와 결별한 이후 만들어진 대작 '가게무샤'에서는 주인공인 다케다 신겐 대역(가게무샤) 역할을 맡아 구로사와에게 칸느 그랑프리를 선물한다.
 
한편 나카다이 다쓰야의 기용은 헐리웃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에게도 영향을 줬다. 
 
스콜세지는 '비열한 거리'(73)에서 주인공 하비 키이텔과 함께 '자니 보이' 역으로 등장하는 로버트 드니로를 또다른 주인공으로 설정했는데, 로버트 드니로의 배역설정에 나카다이 다쓰야가 많은 참고가 됐다고 전해진다.
 
'절대 3부작'의 성공은 도호로 하여금 구로사와의 마지막 흑백영화 '붉은 수염'(赤ひげ, 65년, 도호=구로사와 프로)에 다시 거액의 자금을 쏟아붓게 한다. 하지만 구로사와는 모처럼의 거액자금이 투입된 이 영화에서 그의 영화역사상 가장 철저한 완벽주의를 선보이고 만다. 촬영기간 1년만에 예산을 초과했음에도 구로사와는 초연했다. 그는 하루에 한 컷만 찍거나 날씨가 마음에 안 들때는 아예 촬영자체를 안 했다.
 
도호는 결국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구로사와 감독과의 전속계약을 해제했고, 이 영향으로 인해 구로사와는 5년간 일본영화업계와 거리를 둬야만 했다. 
 
이 기간 중 구로사와는 헐리웃의 의뢰를 받아 '폭주기관차', '도라도라도라'의 제작에 참여했지만 자신의 요구, 스타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도중에 관두고 만다.
 
특히 '도라도라도라'에서의 도중하차는 구로사와의 프라이드에 큰 상처를 입혔다. 그는 자신이 제작참여에 빠진 후 완성된 '도라도라도라'에 대해 "전혀 안 봤고, 보고 싶지도 않다. 내 개선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니까. 빨리 잊어버리고 싶다"(주간아사히 인터뷰)라고 말했다.
 
이 두 경험을 통해 구로사와는 내리막길을 타는 듯 했다. 그는 5년간의 공백끝에 컬러영화 '도데스카덴'(どですかでん, 70년, 시키노카이=도호)을 들고 화려하게 복귀했지만, 난해한 의미부여와 실험주의적 색채로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구로사와는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이른바 후기 구로사와 시기다. 대표적인 것이 '데루스 우잘라'(75년, 모스필름)인데 이 작품은 소련 자본으로 제작돼 시베리아에서 거의 촬영됐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매우 정적이다. 마치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보는 듯한 실험주의적이며 정적인 형식미는 후기 구로사와를 특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
 
혹자는 구로사와의 스타일이 변화한 이유로 71년 일어난 면도칼 자살미수 사건을 꼽기도 한다. 구로사와 감독이 자살미수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도라도라도라'에서 경험한 모멸감과 자기자금을 투자해 만든 '도데스카덴'의 실패, 쇠퇴해 가는 일본영화산업에 대한 비관 등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아무튼 이런 일련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구로사와의 영화세계는 변하게 된다.
 
'가게무샤'만 하더라도 초기 및 중기 작품과는 매우 다르다. 지금까지 그의 전투신은 개개인의 무사 혹은 사무라이, 즉 캐릭터가 중요했다. 7인의 사무라이가 그랬고, 거미집의 성도 마찬가지다. 요짐보, 쓰바키산쥬로 모두 캐릭터를 살린 전투신, 결투신을 중시했다.
 
하지만 그러한 리얼한 감정묘사가 가게무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가게무샤의 압권은 수천마리의 말이 동시에 격돌하는 대규모 전투신이다. 물론 이 전투신은 그 자체로도 매우 아름답고 웅대하고 장중하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구로사와 스타일이 과거와 비교했을 때 달라졌다는 말이다.
 
이런 부분은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모티브로 한 '란'(乱, 85년, 그리닛치필름=헤럴드에이스)에서도 드러나는데 이 작품의 의상을 담당했던 와다 에미는 주간문춘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교토의 고급 공방에 연락해서 하급부하들 1천 200명에게 입힐 옷을 주문하라고 하더군요. 이 작품은 자금난 때문에 도중에 중단되기도 했는데 나중에 결국 재개되기는 했지만, 구로사와 감독이 어느 날 '역시 의상은 중요해. 그렇지 않아?'라고 묻더군요. 아주 기뻤습니다."
 
1천 200명이라는 대규모 엑스트라도 그렇지만 그들의 의상까지 일일히 챙긴다는 것은 초, 중기 구로사와라면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완벽주의였지만 작품 자체는 저예산적 분위기를 풍겼고, 리얼리즘과 스토리로 승부했었던 구로사와 감독이, 80년 이후부터 형식미, 예술주의 등에 경도됐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데루스 우잘라'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가게무샤'가 칸느 그랑프리를, '란'이 전미비평가협회 작품상을 수상해 그 예술성은 인정받았지만, 이 작품들은 뚜렷한 흥행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아무리 세계적인 감독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하의 영화산업은 철저히 상업주의적이기 때문에 구로사와 역시 그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구로사와는 사실상 그의 유작이라 할 수 있는 '꿈(夢, 90년, 구로사와 프로)에서 그의 팔십인생을 반추했다. 공교롭게도 '꿈'은 구로사와 프로가 단독으로 제작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배급권은 워너 브라더스에 있음)
 
'꿈'은 구로사와가 직접 꾸었다는 8가지 꿈을 재현한 것인데 일본국내상영 절차가 까다로워 일본 국내에서도 그렇게 알려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구로사와의 인생을 다룬 영화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첫 에피소드인 '소나기' 첫 장면에 나오는 집 앞에 마련된 세트는 구로사와가 유년시절을 보낸 집과 거의 판박이니까. 기자가, 구로사와의 작품세계가 형성된 배경을 엿보고 싶다는 이들에게 언제나 '꿈'을 추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튼 '세계의 구로사와'는 이후 두 작품을 더 만들고 1998년 9월 6일 88세의 천수를 누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전무후무한 영화천재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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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8/11 [20:00]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를 읽으며 잘봤습니다 10/08/12 [21:25]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을 좀 더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정 삭제
구로자와의 위대함 구로자와최고 10/12/18 [21:48]
구로자와 아키라의 위대함은 시나리오의 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다보니까. 60년대까지 그의 영화는 시나리오가 살아 있었습니다. 71년 그 자살미수 사건이후 그의 영화에서 이야기의 힘은 빠져버렸죠.그를 돕던 시나리오 작가군단과도 멀어진 것 같고. 남이 듣고 싶어하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 구현에서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 구현의 세계로 넘어가버려서 결국 70년대 이후 흥행에선 크게 실패한 것 같습니다. 붉은 수염 이전까지의 영화들이 참 좋았습니다. 수정 삭제
구로사와아키라는 위인 위인 11/07/14 [19:15]
아 대단하다. 영화이론 이런거 모르지만 구로사와의 영화는 재밌다.
이제는 사무라이 하면 미후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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