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 패배하던, 그 날의 재구성 '상'에서 이어짐)
이오지마의 함락과 도쿄대공습을 경험한 일본은 1945년 3월 16일부터 본격적인 종전 시나리오 작성에 돌입한다.
그런데 이 종전 시나리오는 어떻게 하면 덴노(天皇, 천황)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즉 덴노의 전쟁책임을 없앨 수 있을까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쇼와 천황의 전쟁지도'(쇼와출판)에는 당시 나온 시나리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시기작전은 일단 육군에 맡깁시다. 전쟁일변도로 나가다가 한도에 도달했을 때 천황 폐하가 표면에 나타나 '국면전환'을 명령해 육군이 전쟁을 그만두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이 방식은 어떻습니까?" 이는 히로히토 덴노의 측근이 실제로 했던 말로, 당시 수뇌부가 어떤 입장을 표하고 있었는지 그 일단을 엿보게 한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국면전환'은 전쟁중지 선언, 곧 항복을 의미한다. 즉 육군에게 시기작전(時期作戦, 전투)을 시켜놓고 한도에 왔다고 판단되면 덴노가 전면에 등장해 육군에게 전쟁을 그만두라는 명령을 내린다는 뜻이다.
이 퍼포먼스가 성공하면 전쟁의 모든 책임은 육군이 지게 되고, 덴노가 전쟁을 멈추게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덴노의 측근 입장에서는 비록 패전은 하더라도 '국체'(천황가)를 보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이 '국체보전'은 전쟁말기의 항복선언을 둘러싼 각종 사건들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이번 역사강의를 주재하는 마스다 미야코 씨는 "연합국이 천황가을 보전시켜주겠다는 확실하고 직접적인 언질을 하지 않아, 일본 수뇌부들이 항복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끌었다"라고 말한다.
포츠담 선언이 좋은 예다. 카이로 선언의 연장선상에 있는 포츠담 선언이 45년 7월 하순께 나왔으면서도 일본의 항복은 그로부터 3주 후에나 이뤄졌다. 포츠담 선언 내용을 둘러싼 해석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이 문제는 '하'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종전 시나리오가 작성되고 있던 3월 28일, 덴노가 오키나와 수비군에게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덴이치고 작전(天一号作戦, 태평양전쟁시 일본이 작성한 전투계획으로 희생을 감수한 미군출혈소모작전-기자주)은 제국의 안위에 결부되기 때문에 모든 군은 전력을 다하길 바란다."
▲ 한일병탄 100주년을 기념한 역사강의를 주재하고 있는 마스다 미야코 선생 ©jpnews | |
덴노의 이 말에 대해 마스다 씨는 "덴노는 종전 시나리오가 작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작전, 즉 얼마나 죽던지 간에 오키나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서 "과연 그의 종전후 이미지인 평화주의자에 걸맞는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4월 1일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한다. 여기서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지는데, 당시 오키나와 현지군은 지구전을 펼치려고 했지만 히로히토 덴노의 "왜 현지군은 공격하지 않느냐"(전사총서 中)고 말했다는 점이다.
마스다 씨는 "오키나와 전투를 보면 현지군이 뚜렷한 목적없이 때때로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는데 이 공격은 덴노의 하문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한편 오키나와 전투가 펼쳐지고 있던 와중에 일본과 3국 동맹을 맺고 있던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4월 28일 총살당하고, 이틀 뒤인 30일에는 독일의 히틀러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계정세의 흐름은 누가 보더라도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다카기 해군소장 각서'(마이니치신문사)를 보면 덴노 역시 5월에 접어들면서 항복을 생각했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폐하는 현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 보았다.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전면적인 무장해제와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은 절대 할 수 없다고 주장하셨다.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최후까지 싸우자는 말씀이셨다.
(중략) 그런데 최근 5월 5일부터 이, 삼일간 생각이 바뀌신 것 같다. 두 문제(전면적 무장해제와 책임자 처벌-기자주)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신 듯 하다. (중략) 조만간 결단을 내리실 것으로 보인다."
5월 7일, 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일본 역시 오키나와 전황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본격적인 종전 준비에 들어갔다.
종전 준비의 메인 키워드는 앞서 언급한 '국체보전'이었다. 또 6월 4일 대장성 장관이 궁내청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패전시 천황가의 재산을 어떻게 지키느냐' 였다.
하지만 덴노는 이런 상황에 봉착했으면서도 '본토결전안'(1945년 6월 8일)을 재가한다. 이 본토결전안을 보면 과연 덴노가 태평양전쟁과 일절 무관한 상징적 존재였는지 아닌지 확연히 알 수 있다. 다음은 본토결전안의 주요 내용이다.
"이대로 간다면 1946년 초입 미군은 관동지역에 상륙할 것이다. 우리는 이 상륙미군과 일대결전을 벌여 미군에 타격을 입히고 전쟁종결 협상에 들어간다. 이것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철저히 항전해 1억 모두 옥쇄하겠다(당시 일본인구는 7천만명이었고 여기에 식민지였던 조선인구를 더한 수치로 보여짐-기자주). 한편 덴노 폐하는 나가노 현의 마쓰시로 성 지하 대본영으로 이동해 대원수(大元首)로서 지휘한다."
▲ 본토결전 당시 덴노(천황)의 마지막 지휘처로 상정된 나가노 마쓰시로 대본영 터 ©jpnews | |
이 '본토결전안'에는 덴노 자신이 대원수가 돼 전쟁을 직접 지휘한다는 내용이 분명하게 담겨져 있다. 그런데도 덴노는 이 안을 재가했다.
전쟁을 결심했을 당시 메이지 덴노의 시가(詩歌)를 빌려 표면적으로나마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보이려 했던 히로히토 덴노가 자신을 대원수로 하여 최후까지 항전하겠다는 이 본토결전안에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그 다음날의 상황을 보면 덴노가 이 본토결전안을 재가했음에도 상당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6월 9일 우메쓰 참모총장이 "관동군에는 이제 더이상 싸울 힘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자, 덴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덴노는 '그렇다면 더 이상 전쟁은 불가능하지 않은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목숨을 걸 각오로 종전을 건의했다. 그러자 덴노도 이에 찬성했다." - 기도증언(木戸証言), 1974년 8월 12일자 마이니치신문)
하지만 덴노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본토결전안은 통과돼 버린 상태로 본토결전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6월 23일 '국민의용병역법' 공표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국민의용병역법의 목적과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세부터 60세까지의 남성, 그리고 17세부터 40세까지의 여성을 징집대상으로 한다. 독일의 국민돌격대에 해당한다. 무기는 각자 준비할 것. 본토결전에는 2천 800만명을 동원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날 약 3개월간 끌어왔던 오키나와 전투가 일본군 수비대의 전멸로 막을 내린다. 오키나와 전투는 2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태평양전쟁 최대의 단일 전투였다.
또 오키나와 전투는 민간인 죽음이 15만에서 17만명에 이르렀다. 일본육군이 집단자결을 강요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희생자도 700명이나 됐다.
중학교 여학생들로 구성된 철혈근황대 '히메메리' 부대원 2000명 중 1105명이 죽었고, 방위대로 소집된 2만 5천명의 일반남성 중 1만 3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오죽하면 오타 미노루 육군소장이 해군차관에게 이런 전보를 쳤을까.
"오키나와 현민들은 정말 훌륭하게 싸웠다. 후세 사람들은 이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 주시길 바란다."
하지만 오키나와가 함락되고 본토결전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도, 또 덴노조차 전쟁종결(항복)에 찬성의사를 밝혔지만 일본 중앙부는 항복선언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마스다 씨는 "그들이 최후의 보루로 생각한 곳은 소련이었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짐작케하는 것이 바로 다음 상소문이다.
"중경 혹은 소련, 연안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 현 상황를 유리하게 전개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대로 가다간 귀중한 시간과 인명을 낭비할 뿐이다. (중략) 한시라도 빨리 황국의 안녕을 위해 소련과 교섭하길 간절히 바랍니다."(1945년 7월 9일 아리타 전 외무성 장관의 상소문)
▲ 마스다 미야코 역사강의 프린트물. 일본제국이 어떻게 패배해갔는지 매우 입체적으로 알 수 있다. ©jpnews | |
이 상소문을 보는 한 덴노를 포함한 일본 중앙부 핵심인사들은, 얄타회담에서 소련이 독일 항복 이후 3개월이 지나면 일본에 진격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일소중립조약을 맺었으니 소련이 일본을 도와줄 수도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이 막연한 희망은 '천황독백록'(문예춘추사)에 잘 표현돼 있다.
"강화(講和)의 중개역은 소비에트 밖에 없다. 우리가 소비에트를 고른 이유는 소련 이외의 나라들은 모두 미력하기 때문에 중개역으로 나서도 미국, 영국이 힘으로 밀어붙여 결국 무조건항복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소련이라면 힘도 있을 뿐 아니라 우리와 중립조약도 맺고 있다.
다만 소련이 성의있는 국가라고는 보기 힘드니까 먼저 어떻게 나올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소련이 혹시라도 우리에게 석유를 공급해 준다면 미나미가라후토(南樺太, 사할린)는 물론 만주를 주겠다는 내용의 우치다・마리크 회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7월 상순이 돼도 소비에트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중략) 그래서 우치다・마리크 회담을 중지시키고 소비에트와 직접 교섭을 하기로 했다." 히로히토 덴노는 7월 13일 화평 의뢰를 위해 고노에 수상을 소련으로 파견시켰다. 이 때 고노에 수상이 들고 간 화평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체(천황제)보전은 절대적이지만, 국토는 우리 고유의 영토로 만족하겠으며 오키나와, 오가사와라, 사할린은 포기하겠다."
즉 사할린을 소련에게 주겠으니,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도 포기하겠다는 의향을 미국, 영국 측에 전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7월 18일 고노에가 들고 온 화평안을 거부했다.
소련은 어차피 얼마 후 일본에 진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화평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이 화평안은, 결국 얄타회담에서 어떤 내용이 오고갔는지 전혀 몰랐던 일본의 일방적 짝사랑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미국은 7월 16일 세계최초로 원폭 실험에 성공했고, 17일에는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군 수뇌부들이 독일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작성하기에 이른다.
26일 발표된 이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일본으로선 소련이 고노에 화평안을 거부했을 때 더이상 기대볼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이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 '리틀보이'가 떨어져 엄청난 사상자를 낸다.
왜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천황' 때문이었다.
(일본제국 패배했던 그 날의 재구성 '하'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