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을 응원하기 위한 퍼블릭 뷰잉이 도쿄 중고급학교 체육관에서 열려 약 400여명의 재일동포들이 참가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경기전 "조국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지만... ©jpnews/박철현 | |
21일 오후 7시 도쿄 쥬조 조선중고급학교에 '1966 again'이 적힌 빨간 티셔츠를 입은 재일동포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었다. "이겨라 조선!"이라고 적힌 부채를 든 아이들의 표정이 해맑다.
"오늘은 반드시 이깁니다."
"정대세가 골을 넣을 겁니다! 기대하십시오."
▲ 안영학 선수의 어머니 "오늘만큼은 반드시 이겨달라" 고 당부한다. ©jpnews/박철현 | |
안영학 선수의 어머니 정말례 씨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한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렇다. 이 날 북한을 응원하기 위해 도쿄조고 퍼블릭 뷰잉에 모인 재일동포 400여명은 누구나가 북한이 1966년의 복수를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체육관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필승조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한민국'의 리듬에 맞춘 '필-승조선'이다. 이날 퍼블릭 뷰잉은 도쿄청상회와 도쿄조청이 주최했다.
주최측 관계자는 "량용기, 안영학, 정대세 등 세 명의 재일동포 축구선수들이 조국 대표팀 일원으로 뛰고 있고, 또 조국이 세계적인 축제인 월드컵에서 선전하고 있어 우리 재일동포들도 한 마음 한 뜻으로 응원하자는 마음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한다.
재일동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번 포르투갈 전에 기대를 내 비쳤다. 북한이 우승후보 0순위 브라질에 맞서 탁월한 경기력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도쿄 신주쿠에서 온 김순영 씨는 "브라질과 당당하게 싸웠으니 포르투갈에는 적어도 점수를 내고 비기거나 이길 것"이라며 "안영학의 패스를 정대세가 넣을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도쿄 닛포리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다는 김종훈 씨도 "1966년의 복수를 우리 재일동포 축구선수들이 해 줄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전 상대인 포르투갈을 만나 전반 세 골을 뽑았지만 후반 다섯 골을 연달아 내 줘 5-3으로 진 아픈 기억이 있다. 김 씨가 말하는 1966년의 복수는 이 때의 앙갚음을 의미한다.
실제 전반전에는 이들의 바램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한 선수들은 장대비 속에서도 브라질 전에서 보여준 '당당함'을 그대로 재현했다. 대표적인 장면이 전반 23분께 나왔다.
북한이 오른쪽으로 밀고 올라가다 중앙쪽으로 패스한 볼이 포르투갈에 커트되면서 역습찬스를 줬다. 이 볼은 순식간에 크리스티앙 로나우도에게 연결됐다. 하지만 그 순간 북한 수비진은 금세 '플랫3(세 명의 일자수비진)' 진영을 갖추는, 완벽한 수비호흡을 과시했다. 한편 로나우도의 뒤에서는 공격나갔던 선수들이 쏜살같이 돌아와 포르투갈의 쓰리 톱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렇게 중원의 압박과 후방의 규율잡힌 일자수비는 적어도 전반전에서는 그 기능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 수비는, 모양만 보면 아름다웠지만 실은 상당한 허점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의 결정적 패인은 브라질전에서 효과를 발휘했던 포백이 아니라 쓰리백을 중심으로 한 3-4-1-2를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쓰리백은 원래 수비적인 포진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공격적으로 돌변한다. 이 수비와 공격을 조율하는 이는 오른쪽 미드필더 차정혁과 왼쪽 미드필더 지윤남이다.
사실 북한 입장에서도 결승 토너먼트 진출을 위해선 포르투갈을 상대로 승점을 따야 한다. 어느 정도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브라질 전에서 선보인 포백은 오버래핑 하지 않는 포백이기 때문에 그냥 센터백이 네 명 늘어선 것이라 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축구는 포백보다 쓰리백이 상대적으로 공격적인 진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왼쪽 즉 지윤남 쪽은 별로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차정혁-박철진이 맡은 오른쪽 아린이었다.
후반들어 포르투갈의 거의 모든 득점은 이 오른쪽 라인에서 나왔다(포르투갈에서 본다면 왼쪽 공격라인). 오른쪽의 차정혁-박철진은 전반 로나우도를 완벽하게 봉쇄했다. 로나우도도 몇번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장면이 잡혔다.
그 때 로나우도는 왼쪽은 안 뚫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른쪽에는 불굴의 체력을 자랑하는 지윤남이 존재한다. 이쪽도 쉽사리 안 뚫린다.
전반전은, 그만큼 북한의 좌우 수비형 미드필더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쓰리백 포메이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차정혁, 지윤남이 전반전과 같은 능력만 발휘해 준다면 후반전도 괜찮은 내용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후반 북한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 장대비의 영향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포르투갈 선수들도 마찬가지 조건이다. 체력뿐만 아니라 집중력도 저하됐다. 전반전과는 완전히 다른 팀이다.
포르투갈의 포지션 체인지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후반시작하기 전 선수입장 복도에서 로나우도가 라울 메이렐레스와 아주 길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잡혔다.
▲ 후반 포르투갈의 득점이 터지기 시작하자 장내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jpnews/박철현 | |
▲ 숨을 죽이며 경기를 지켜보는 재일동포 응원단 ©jpnews/박철현 | |
▲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보는 소년. 부채에'이겨라'라고 적혀 있다. ©jpnews/박철현 | |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후반들어 로나우도가 전반 거의 뚫지 못했던 왼쪽(차정혁, 박철진)을 라울 메이렐레스와 함께 집중공략한다. 그들은 일자수비의 뒷공간을 노리는 스루패스와 드리블로 차정혁과 박철진을 어느정도 농락했다 싶으면 중원에 위치한 시몬과 디아고에게 크로스를 올렸다.
후반 8분 두번째 득점은 이 전략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한 장면이었다.
이후 포르투갈은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왼쪽만 공략했다. 박철진과 차정혁은 후반 15분께부터 로나우도를 거의 따라잡지 못했다.
완벽하게 무너졌다. 한국-아르헨티나 전과 비슷한 양상이다. 한쪽이 무너지면 센터백도 정신이 없어진다. 왼쪽에 신경이 쏠리면 가운데가 빈다. 도무지 막을 수가 없다. 너무나 참담했다. 도무지 스크린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아! 또 들어갔어!" 다섯번째 골이 들어갔을 때 뒤에서 울음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체관람 온 재일동포 가족이다. 이제 한 다섯 살 쯤 되었을 아이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다. 젊은 엄마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차마 말을 못 걸 정도로 안쓰러웠다. 하긴 누군가가 나게게 말을 걸었더라도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을 테다.
그래도 체육관 저쪽 편에서는 "필-승조선"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의,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 얼굴을 남은 10분간 계속 지켜본다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자리를 옮기자 마자 로나우도의 여섯번째 골이 터졌다. 다시 체육관은 아쉬운 탄성으로 뒤덮혔다. 하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우 인상적인 풍경이다. '필-승조선'을 외치는 청년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는 자기 옆에 앉아 있던 또래 친구를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외쳤다.
"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응원해라!"
▲ 북한을 응원하는 재일동포 아이들이 부부젤라를 불고 있다 ©jpnews/박철현 | |
▲ '파이트'라고 적힌 풍선막대를 신나게 쳐 대다 잠깐 고개를 돌리는 어린이 ©jpnews/박철현 | |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말이 맞다. 아직 경기는 5분이나 남아 있었다. 물론 물리적으로 이기긴 힘들다. 하지만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포터의 임무는 마지막까지 자신들과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이다. 서포터들의 하나된 함성은 그들이 피곤하고 지쳐갈 때 힘을 북돋아 준다.
옆 친구가 일어나고 앞 친구가 일어났다. 혼자서 외치던 '필-승조선'은 어느새 셋이 외치는 응원구호로 변했다. 그리고 이 함성은 마지막 종료휘슬이 울릴 때까지 계속됐다. 세 친구는 경기가 끝나자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조심스럽게 "경기 어땠냐?"고 물었다.
"잘 싸웠습니다. 다음 경기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에는 꼭 이겨줄 것입니다.""너무 크게 져서 마음은 안 좋습니다만, 우리 선수들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체육관 밖을 나서는 재일동포들은 졌다는 걸 억울해 했지만 선수들 비난은 하지 않는다. 다음 경기가 남아 있으니까 열심히 싸워주길 바란다는 말을, 진심으로 했다.
재일동포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우리 선수들 너무나 잘 싸웠고 다음 경기는 꼭 이기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느새 '16강'이 대의명분이 돼 버린 대한민국의 응원분위기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마지막까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 이들의 시원시원함이 무더운 여름 밤을 식힌다. 이 멋진 서포터들이 코트디부아르와의 마지막 경기에선 멋진 선물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 체육관 밖에서는 북한 전용 응원타올도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jpnews/박철현 | |
▲ '한반도기'가 새겨진 가방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jpnews/박철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