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vs 네덜란드전 © 2010 getty images | |
일본이 우승후보 네덜란드를 상대로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비록 0-1로 졌지만 이 날 보여준 일본의 수비축구는 약팀이 강팀과 싸울 때 어떻게 싸우면 되는지 하나의 교본을 제시했다.
경기전만 하더라도 네덜란드가 압승을 거둘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일본은 처음부터 철저한 수비적 포진을 짰다. 상대가 자기네들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인정한 4-5-1을 들고 나왔다.
사실 일본은 골을 못 넣어서 그렇지, 수비의 조직력은 아주 좋다. 나카자와-투리오 두 센터백은 일본국가대표팀에서 근 5년간 호흡을 맞춰왔다. 오카다 감독은 0-2로 완패한 한국과의 5월 경기에서 "투리오 한 명 빠졌다고 이렇게까지 수비밸런스가 무너질 줄 몰랐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 이후 벌어진 평가전에서 일본이 허용한 실질적인 실점은 코트디부아르의 1점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수비진의 자책골에 의한 실점이었다. 즉 수비의 조직력에 관한한 일본은 상당히 높은 수준을 유지해 왔다.
지금까지 일본을 거론할 때 항상 나온 것은 득점력 빈곤과 투지부족이었다. 득점력이 없으니 기본적으로 경기를 이길 확률이 줄어든다. 투지부족은 경기 종반의 실점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온 말이 '마모리키레나이'(守り切れない) 였다. 이 말은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한다는 뜻이다. 일본의 축구전문가들은 이 말을 아주 즐겨 쓴다. 0-0이나 1-0 경기에서 마지막 일격을 받아 역전당하거나 지는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카메룬 전도, 그래서 불안했다. 1-0 경기지만 혹시 마지막에 일격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그 불안한 공기가 언제나 떠다닌다. 하지만 카메룬 전에서 일본은 마지막까지 1-0 스코어를 지켜냈다. 처음으로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승리라는 결과를 이끌어 내면 자연히 사기는 높아진다. 어떤 팀이던 한번 싸워보자는 자신감이 생겨날 수도 있다.
하지만 오카다 감독은 네덜란드라는 팀이 자기네들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인정했다. 카메룬 전과 똑같은 멤버였지만 4-2-3-1이 아니라 4-5-1로 나왔다. 수비는 하지 않겠다던 혼다 게이스케조차 수비를 했으니 철저한 수비축구다. 하지만 오쿠보, 마쓰이, 혼다로 이어지는 일격은 남겨뒀다.
카메룬 전에선 공격적으로 나섰던 하세베, 엔도도 이번 네덜란드 전에서는 수비에 치중했다.
분데스리가 폴스부르크에서 뛰고 있는 하세베는 소속팀에선 오른쪽 사이드백을 맡고 있다. 전술이해도가 높아 수비적으로 나설 때와 공격적으로 나설 때를 잘 파악하는 선수다. 이 날 경기에서도 그는 오른쪽 사이드백 고마노의 오버래핑을 적절히 조절해 마쓰이를 살렸다.
오쿠보는 카메룬 전에 앞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지금 내 몸상태가 보통이 아니다. 아무래도 한 건 터뜨릴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절정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네덜란드 전에서도 평소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누그러뜨리고 수비와 공격 최일선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오쿠보는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짜증섞인 표정을 많이 내 비친다. 상대팀 선수, 심판은 물론 자기 팀 선수들에게도 화를 낸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으면 씨익 웃고 넘어간다. 네덜란드 전에서 오쿠보는 후자 쪽이었다. 왼쪽 윙포워드지만 사실 원톱 역할까지 맡고 있는 오쿠보의 몸상태가 덴마크 전까지 유지될 수 있다면 일본으로선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프랑스 그로노블에서 활약하고 있는 마쓰이는 일본대표팀에서 유일한 드리블러다. 드리블로 한 두 명 제낄 수 있다면 '패스의 일본'이라 생각했던 상대도 당황한다. 원래 나카무라 순스케의 지정석이었던 이 오른쪽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은 마지막까지 논란을 거듭해 온 자리다.
오카다 감독은 평가전에서 나카무라 순스케, 나카무라 겐고, 하세베, 혼다 등 수많은 선수를 기용해 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고민이었던 이 자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왜 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짐바브웨와의 평가전에서 결정났다.
짐바브웨와의 30분짜리 3회 평가전의 최대 수확은 마쓰이의 발견이었다. 마쓰이는 비록 한 수 아래인 상대였지만 두 서너명 드리블로 돌파하는 모습을 보였다. 슛도 가능하고 크로스도 전성기 시절의 나카무라엔 못 미치지만 꽤나 정확하다.
오카다 감독은 마지막 평가전에서 보여준 마쓰이의 움직임을 높이 평가해 카메룬 전 선발명단으로 넣었다. 마쓰이가 오카다 재팬에서 선발로 출전한 것은 이 경기가 처음이다. 또한 월드컵 본선무대에서 1승을 반드시 따야만 하는 중요한 경기에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도 오카다 감독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 일본 vs 네덜란드 © 2010 getty images | |
지난번 카메룬 전 관전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일본에는 스트라이커 포지션이 없다. 포메이션만 보자면 혼다의 원톱이지만 혼다는 원톱 움직임을 그 때도 지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카다 감독은 이걸로 됐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어차피 90분짜리 스포츠니까 전반전은 4-6-0 포메이션으로 소화시켜도 괜찮다. 후반에 오카자키나 모리모토 등을 투입해 득점을 노려도 되고 골이 안 터지더라도 무승부 승부로 끌고가면 된다는 것이 오카다 감독의 생각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전략이 조별리그에서는 의외의 결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 오카다 감독은 트루시에 등의 조언을 뿌리치고 네덜란드 전에서도 정예멤버를 내 보냈다.
하지만 전반전은 철저한 수비축구였다. '더블 플랫4'(일자포백이 두 줄)의 수비형태가 펼쳐졌다. 네덜란드 공격시 일본은 고마노-나카자와-투리오-나가토모의 최종수비라인과 하세베-엔도-아베-오쿠보의 중원라인이 유기적으로 전진, 후진을 거듭했다.
스네이더르이 드리블을 두 명이 막는다 하더라도 수비라인의 간격이 좁기 때문에 나머지 선수들이 쉽게 빈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 나카자와-투리오의 높은 긴장감도 영향을 미쳤다. 투리오는 직전 평가전에서 자책골을 두번이나 기록했다. 보통의 일본인 수비수라면 상당히 위축될텐데 브라질 출신이라 그런지 '허허' 웃으면서 넘어갔다.
아무튼 이번 네덜란드 전은 일본수비의 완성도가 네덜란드를 상대로 해도 통한다는 것이 증명됐다. 오카다 감독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 세르지오 에치고 조차 tv아사히 실황해설 중 몇번이고 오카다 재팬의 수비진을 칭찬했다.
"저렇게 (네덜란드 선수에) 달라붙어도 체력적으로는 괜찮을 것 같다. 매우 효율적인 수비방식이다." 오카다 감독은 숱한 욕을 먹었던 평가전을 통해 대표팀의 에이스 나카무라를 과감히 선발명단에서 제외했고 형식상 원톱에 혼다를 넣어 사람들을 놀래켰다. 헌신적이고 용맹한 하세베에 주장완장을 채웠다.
원래라면 나카자와가 맡을 주장직이지만 오카다 재팬의 핵심은 역시 중원이다. 이 중원의 활용도에 따라 수비적이거나 공격적인 경기운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세베, 엔도, 아베 중 한 명이다. 엔도는 개성적이고, 아베는 숫기가 없다.
반면 하세베는 헌신적이기도 하지만 분데스리가도 경험했다. 강호들과의 싸움에 단련돼 있다. 어차피 부부젤라 때문에 감독의 고함소리가 안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하세베가 경기의 감독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오카다 감독에겐 행운이다.
네덜란드에 졌지만 일본은 다음 덴마크 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올라간다. 지금 일본은 수비적으로 매우 완성된 팀이다.
일본의 방패가 덴마크의 창을 막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 도쿄돔 퍼블릭 뷰잉에서 일본팀의 선전을 기원하기 위해 보인 서포터들 ©jpnew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