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축구다. 피파랭킹 105위가 1위에 맞서 이런 경기를 선보일 수 있다니.
북한의 경기력은 g조를 '죽음'이 아니라 '지옥'으로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수많은 외신이 베일을 벗은 북한축구의 경기력에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북한은 이미 월드컵 예선에서 이런 류의 경기운영을 몇 번이고 선보였다.
북한이 들고 나온 4-3-1-2 포메이션은 작년 최종예선전에서 선보인 3-5-2를 보다 입체적으로 발전시킨 형태다.
본지는 작년 6월 '아시아적 빗장수비를 보여준 북한축구'라는 제목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북한과의 아시아 예선 마지막 경기를 분석했다. (
http://www.jpnews.kr/sub_read.html?uid=650)
북한은 월드컵 최종예선전에서 현대축구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3-5-2 포메이션을 줄곧 선보였다. 상황에 따라 수비형 미드필더 안영학이 밑으로 내려가는 4-4-2를 채택하거나, 홍영조-정대세 투톱에 공격수 한명을 넣는 3-4-3을 보여줬다.
최종 예선전의 쓰리백이 본선에서는 포백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그만큼 북한 축구는 발전했다. 흔히 쓰리백은 수비적이고 포백은 공격적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포백이 공격적이라는 말은 양 사이드백의 오버래핑을 전제로 했을 때다.
북한 포백은 오버래핑 안 하는 포백이다. 4명의 센터백이 일자로 늘어섰다고 보면 된다. 좌우 측면 수비는 센터백 앞에 늘어선 세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담당한다. 안영학이 주축이 된 이들 트리플 보란치는 '경기'를 조율하는 게 아니라 '수비'를 조율한다.
▲ 북한 대표팀의 주축멤버로 활약하고 있는 재일동포 j 리거들. 왼쪽부터 정대세, 안영학, 량용기 ©jpnews | |
이런 수비형태는 사실 카테나치오 본가 이탈리아에서도 간혹 등장한다. 그리스도 2004년 유럽챔피언이 됐을 때 이런 류의 경기운영을 선보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90분 내내 이런 경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 전술에 사우디아라비아가 당했고, 이란이 당했다. 그리고 오늘 이것은 우승후보 브라질에도 90% 가까이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국가별 대회에서 약팀이 강팀을 맞이했을 때, 즉 승점이 반드시 필요한 경기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북한이 그 교본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격은 세트피스에 맡긴다. 정대세라는 걸출한 피지컬과 투쟁심을 가진 공격수가 있다는 것도 도움이다. 브라질도 이 원샷 원킬에 당했다. 후반 43분께 터져나온 지윤남의 골은 자블라니(남아공 월드컵 공인구)의 특징을 면밀히 연구했을 정대세의 어시스트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년 여름에 만난 정대세 선수는 기자에게 지나가는 말로 "공이 중요한 것 같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수많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면서 가장 먼저 그 대회 공인구와 친해지는 연습을 한다. 패스는 물론 슛, 크로스까지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탐구심은 자블라니에도 적용됐다. 자블라니는 수많은 프리킥커를 제물로 만들었다. 필드플레이에서의 정확한 크로스도 찾아보기 힘들고 크로스바를 넘기는 '홈런슛'도 숱하게 등장했다. 물론 이 마구 덕택에 강팀과 약팀간의 간극도 좁혀지기도 했지만.
물론 북한은 자블라니가 아니었더라도 g조를 충분히 죽음으로 만들 수 있다. 북한의 수비축구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7백 수비수들의 위치선정이다.
브라질 선수들은 수많은 중거리 슛을 쏘아댔다. 0-0으로 시작된 후반전에선 유독 그 횟수가 많았다. 둥가 감독은 몇 번이고 양 팔을 올리고 머리를 감싸는 제스처를 취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이 수많은 중거리 슛은 대부분 북한 수비수들의 몸에 맞고 튕겨 나갔다. 북한 수비수들의 '공격수와의 거리감각'은 탁월했다. 최종예선전에서 갈고 닦은 대인방어와 세븐백 시스템을 채용하면서 도입한 지역방어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셈이다.
물론 이것이 되려면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 특히 브라질처럼 좌우를 휘젓고 드리블로 돌파하는 팀을 상대하면 수비만 보더라도 엄청난 체력소모가 온다. 한국전의 그리스, 일본전의 카메룬 공격진이 보여줬던 '아크 에어리어 크로스 대작전'에서의 체력소모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북한은 마지막 5분동안 펼쳐진 '코리아타임'에서 놀라운 체력을 선보였다. 마치 지금 막 경기가 시작된 듯한 움직임이다. 상대는 우승후보 브라질, 점수는 2점차, 결정적으로 남은 시간은 불과 10분이다. 웬만하면 포기할 법도 한데 말이다.
지윤남의 첫 골이 터지자 마지막 5분간은 북한 선수들만 눈에 들어왔다. 정대세의 슛도 등장하고 왼쪽 라인에서의 2대1 패스도 괜찮다. 브라질 상대로 막판에 이 정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포르투갈, 코트디부아르 전은 어찌될 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북한은 지금까지 치러진 월드컵 전 경기에서 가장 페어플레이를 했다.
심판판정에 인상을 쓰는 장면은 나왔지만 다른 나라 선수들이 별의별 제스춰로 항의하는 장면은 한번도 없었다. 브라질의 두번째 골이 나왔을 때 오프사이드를 어필하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옐로우 카드는 오히려 브라질 선수에게 나왔다.
북한이 범한 반칙은 9개, 브라질도 9개였다. 앞서 열린 코트디부아르-포르투갈 전에서 각각 13, 14개의 반칙이 나왔고 그 앞 경기엔 뉴질랜드-슬로바키아 전에서 16, 14개의 반칙이 나온 것에 비해 상당히 적다.
브라질 같은 강팀과의 싸우면서도 지저분한 반칙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북한의 체력과 수비, 전술이해도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올라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북한의 다음 경기는 운명의 포르투갈 전이다. '운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수 없는 상대다. 이 경기를 만약 북한이 비기거나, 이긴다면 많은 이들이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북한은 수비면에서 거의 완성돼 있는 팀이다. 북한이 포르투갈에 이긴다면 기적 맞다. 하지만 0-0으로 비긴다면 그건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다.
포르투갈이 '지옥'을 경험할지도 모르는, 이 경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