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위험합니다."
"아! 아깝습니다. 저 찬스를 살렸어야 했는데..." 전자는 그리스의 공격, 후자는 한국의 공격 장면이다. 어느샌가 nhk 실황해설자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잊고 한국을 응원했다.
신주쿠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에 몰려든 수많은 일본인들도 마찬가지다. 붉은 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그들은 "일본이 워낙 못하니까 한국이라도 응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엔 어색한 목소리로 "대한밍구"를 외치던 그들이 어느샌가 만세 포즈까지 취하며 '오! 필승 코리아'를 따라 부른다.
미국인 화이트 아마리스 씨는 전반전이 끝나고 "한국이 10-0으로 이겨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며 왼쪽 볼에 태극기를 페인팅했다. 그 태극기 밑에는 "again 2002"를 그려 넣는다.
4년마다 찾아오는 해방구가 올해도 어김없이 시작된다. 경우에 따라선 2주만에 끝나는 해방구지만 02년엔 한달간 이어졌다. 이 해방구를 찾은 이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대한민국을 응원하게 돼 있다.
그렇다. 그만큼 한국축구는 매력적이다. 또 강팀이다.
강팀이 이기는 게 아니다. 이긴 팀이 강팀이다. 이정수의 첫 골은 지극히 계산된 셋트피스에서의 골이었다. 그리스의 오토 레하겔 감독은 가테나치오의 나라 이탈리아조차 옷깃을 여미는 수비축구의 명장이다. 그의 수비축구는 브레멘을 분데스리가의 강호로 만들었고, 04년 그리스를 유럽축구 챔피언으로 탄생시켰다. 하지만 지난 6년간 그는 퇴보했다.
센터백 이정수의 첫 골이 그 퇴보를 상징한다.
센터백의 골은 상대를 혼란에 빠뜨린다. 셋트피스에서의 수비 매치업은 정해져 있다. 센터백은 포워드를, 보란치는 공격형 미드필더, 윙백은 사이드어태커를 맡는다. 그리고 포워드는 세컨드 볼을 이쪽이 획득했을 때를 대비해, 즉 역습기회를 살리기 위해 골에어리어 바깥에 위치한다.
물론 현대축구에서는 센터백이 공격에 가담할 경우가 많다. 센터백은 보통 체격이 좋은 선수들이 차지하기 때문에 공중볼 다툼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험부담도 뒤따른다. 세컨드 볼을 상대방에 넘겨줬을 때 일어나는 질풍노도와 같은 역습때문이다.
그래서 '약팀'은 센터백이 올라가지 않는다. 느슨히 자리잡은 우리 쪽 보란치나 윙백이 상대의 역습을 차단할 만한 기술과 체력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조직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팀만이 센터백 폭격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나라가 잉글랜드다. 퍼디낸드나 존 테리가 셋트피스 때마다 올라가는 이유는 애쉴리 콜과 제라드, 혹은 램파드가 상대의 역습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02년의 한국도 그랬다. 최진철과 김태영은 한국팀의 코너킥 장면에서 반드시 올라왔다. 그리고 그 뒤는 김남일과 송종국과 이영표, 그리고 영원한 캡틴 홍명보가 막았다.
한국은 어느샌가 이런 축구를 구사하는 조직적인 팀이 돼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는 그렇지 못했다. 이번 시합에서 그리스는 코너킥을 13번이나 얻었다. 하지만 그리스 센터백은 올라오지 않았다. 매치업도 그리스 의표를 찌르기에 충분했다.
셋트피스 장면에서 게카스를 마크한 이는 조용형이나 이정수가 아니라 박주영 혹은 염기훈이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포워드를 포워드가 맡는다는 수비전술은 훈련되지 않은 팀이라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걸 한국팀은 해 냈다.
그리스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사실 한국은 개개인의 능력만으로도 그리스 선수들보다 뛰어나다. 언론이 말하는 '사상최강'은 입에 발린 수사가 아니다. 02년 4강 멤버에 u-20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숱한 강호들과 싸운 젊은 세대가 동시에 포진했다. 탤런트만 놓고 보자면 94년 미국월드컵 멤버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을 정도다.
게다가 이런 좋은 선수들이 '조직'으로 뭉쳤으니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해 봐도 그리스 정도에 질 리가 없다.
필자는 이미 이전에 쓴 관전기 등을 통해 한국의 16강 진출을 점쳤다. 허정무 감독이 '오토 대제' 보다 훨씬 나은 명장이라고까지 말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허정무 감독은 조직의 힘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시험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전이 대표적인 예다. 철저한 수비축구를 하겠다고 공언했고, 그는 이 약속을 95% 이상 지켰다. 우승후보를 상대로 86분을 버텼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의 센터백은 월드클래스들에 당당히 맞설 정도로 성장했다.
지난 친선시합때마다 바뀌는 전술에 한국의 서포터들은 비관에 빠졌다.
하지만 본선이 시작되면 달라진다. 오늘 멤버가 그렇다. 가장 정제된 '공격적'인 베스트 멤버가 나왔다. 어제만 하더라도 허 감독은 우영표-좌동진을 기용할 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했었지만 이것 역시 연막전술에 불과했다.
허정무 감독은 히딩크의 유산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런 그가 히딩크가 남긴 명언 "왼쪽의 이영표는 월드클래스지만, 오른쪽에 서는 순간 70%짜리 이영표가 된다"를 어길리 없다. 또한 김동진은 매우 공격적이지만 허정무 호에서는 수비적인 역할을 강요받는 사이드 백이다. 아르헨티나전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리스를 상대하는데 김동진이 나올리 없다.
이영표는 90분내내 오버래핑이 가능한 한국식 토털풋볼의 핵심멤버다. 현대축구에서 사이드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 윙포워드의 움직임을 봉쇄시키고 우리쪽 윙포워드를 살린다. 측면공격이 활발하면 중원도 살아나고 상대 수비수들의 체력도 쉬이 소모된다.
반대편에는 차두리라는 걸출한 폭탄이 있다. 대부분이 불발탄으로 끝나지만 한번은 결정적인 장면을 만드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이번 경기에서도 그는 박주영의 아까운 헤딩슛을 연출하는, 베컴이 울고 갈 크로스를 선보였다. 피지컬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 승리의 기쁨이 함께한 응원석 ©jpnews/山本宏樹 | |
모든 선수가 다 잘했다. 개인적으로는 김정우를 꼽고 싶지만 박주영의 위치선정 능력과 염기훈의 헌신적 수비공헌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청용, 기성용이 보여준 발군의 안정감도 강팀의 면모를 뚜렷히 보여줬다. 특히 이청용이 후반 역습 때 보여준 골에어리어 오른쪽에서의 인사이드 슛은 그가 왜 볼튼 서포터들을 흥분시키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교체멤버로 들어가 예의 진공청소기 모드를 가동시킨 김남일도 후반 약 10분간 지속된 그리스의 공격의지를 꺽는데 도움이 됐다. 경기 후반의 역습은 그에게서 시작됐고 그 역습에 대비하기 위해 그리스 보란치와 센터백들은 자기 진영에 머물렀다.
반면 그리스의 사이드백은 윙포워드들과 거의 포지션이 겹칠 정도로 올라가 내려오질 않았다. 2-0 경기가 아니라 골운이 조금 더 따랐다면 3-0, 4-0 경기였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리스는 후반 30분부터 경기 종료시까지 거의 4-0-6의 포메이션을 썼다. 6명중 2명은 좌우에서 크로스만 올려댔다. 옛날 같았으면 체격, 체력적 문제로 인해 이런 류의 크로스 공격에 호되게 당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그 정도 단조로운 공격에 당할 수준이 아니다.
아무튼 중원이 비어 버리는 바람에 마지막 10분간은 다시 '코리안타임'이었다. 한 골 더 들어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상황이 몇 번이고 연출됐다. '부부젤라' 마저 대-한민국 리듬에 맞춰졌다. 경기가 열린 포트엘리자베스는 어느새 한국이 됐다.
이번 월드컵의 한국은 이렇게 매력적이다. 중립보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nhk의 실황해설자 하야노 씨는 염기훈을 몇 번이고 거론했다.
"염기훈 선수는 저기까지 (수비하러) 내려가는군요.""오, 염기훈 선수입니다. 정말 체력이 대단하군요." 그러면서 어느샌가 한국팀을 응원하는 편파적인 해설이 나온다.
"박지성 선수 대단합니다. 저기서 안 넘어지는 군요. 역시 톱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다운 면모를 보여주네요. 결정적일 때 넣는 한국의 에이스입니다. (중략) 역시 한국의 프레스(압박)는 대단합니다. 중원에서 다 끊어버리네요. 세컨드 볼 다툼에서도 밀리지가 않아요. 아! 지금 찬스 너무 아쉽네요. " 반면 그리스가 공격을 할 때는 이렇게 해설한다.
"아아! 위험합니다. 한국팀 위험합니다! (사이) 지금이 가장 힘들 땐데, 이걸 어떻게 하든 견뎌내야 합니다. 승점 3점이 눈 앞에 보이고 있어요." tbs도 마찬가지다. tbs는 심야 스포츠뉴스 코너에서 "축하합니다! 한국"이라고 당당하게 외쳤다가 일본 네티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후지tv의 존 카비라 역시 "한국팀은 정말 훌륭한 경기를 보여줬다"면서 "마라도나가 86년 허정무에게 완전히 봉쇄당했었는데, 저는 다음 아르헨티나-한국전에서 보여줄 두 감독간의 결전이 너무나 기다려진다"고 한국팀을 극찬했다.
한국은 이번 경기에서 보여준 경기력만 유지한다면 나이지리아는 물론 아르헨티나와도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 선수 개인기에 의존하는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는 한국과 같은 조직적 팀과 만나면 의외로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은 강팀이다. 한국은 경기의 주도권을 잡는다. 주도권을 못 잡는다 하더라도 상대방 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를 거부하는 실력을 지녔다.
전반전에서 압박하지 않은 이유도 후반 압박을 위해서였다. 후반45분께에는 시간 때우기용 선수교체도 했다. 천천히 걸어나가고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모든 것이 경기의 흐름을 만드는 작업이다. 사실 이 정도까지 전부 계산해서 공차는 나라들 그렇게 많지 않다.
축구는 90분짜리 스포츠지만 10분만 잘 살리면 된다. 물론 이 10분은 상대에게도 부여된다. 나머지 70분은 뺏고 뺏기는 공방전이다. 한국은 이 공방전의 흐름을 만들었고, 상대방에게 부여된 10분의 찬스를 '조직적'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10분의 찬스를 살렸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선사해 준 짜릿한 감동을, 17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기를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