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화는 건국신화를 토대로 하여 국가형성의 기틀을 잡고 있는 데에 비해서, 일본의 경우는 한국과 달리 신화 속에 일본이라는 ‘국토 탄생’을 우선 배치시키고 해와 달의 탄생을 연이어 놓은 후에, 건국 천황인 진무 천황(神武天皇)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형태로 신화구조를 장치화한다.
즉 한국은 ‘건국신화’에 의하여 국가가 형성되었던 것을 강조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창세신화’에 의하여 영토 탄생에 무게를 둔 다음에 일본 민족의 출현을 이어놓는다. 이것이 바로 혈연중심의 한국과 지연중심의 일본을 대별시키게 하는 근거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관련시켜서 일본의 신화에 대한 본질 추구와 현대 일본의 의식구조를 연결지어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한 분석적 장치로서 ‘구니비키즘의 나라 일본(クニビキズムの国、日本)’이라는 개념화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어떠한 사전에도 ‘구니비키즘(クニビキズム, kunibikism)’이라는 어휘는 없다. 이와 연관된 단어로서 사전에 등재된 것으로는 후술하는 ‘구니비키(国引き)’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어휘는 설화에 근거한다.
‘구니비키 설화(国引き説話)’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시마네(島根) 현에 해당하는 이즈모(出雲)의 神인 ‘미쓰카미즈오즈누노미코토(八束水臣津野命)’가 이즈모 지역을 보고 ‘이곳은 왜 이렇게 좁은 나라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멀리 있는 나라인 신라 쪽에 그물을 던져 땅의 일부를 잘라서 끈으로 묶어 ‘구니코이! 구니코이!(国来い! 国来い!)’하고 외치며 일본 쪽으로 가져와서 이즈모의 영토를 넓혔다고 하는 ‘이즈모 풍토기(出雲風土記)’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말하자면 신라의 일부를 잘라다가 영토를 넓혔던 곳이 지금의 시마네 반도의 일부가 되었으며, 잘라온 영토는 ‘야호니키즈키노미사키(八穂爾支豆支の御埼)’가 되었다. 영토를 끌어올 때 사용했던 끈은 지금의 ‘유미가하마 반도(弓浜半島)’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설화적 발상에서 구성할 수 있는 개념이 ‘구니비키 설화’이며 이러한 발상에 의한 일본의 의식구조를 ‘구니비키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섬나라인 일본 특유의 대륙지향적 본능이 반영된 의식구조를 설명하는 데에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구니비키즘’적 발상에 의한 일본 특유의 대외전략에 있어서 유사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neological mind(조어학적 발상)을 통하여 일본의 존재방식을 분석하면 일본의 행동양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분석 장치로서 의미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본은 섬나라였기 때문에 고립되었을 것이라는 지정학적인 정의를 뛰어넘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이 무엇이 있는가를 착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구니비키즘’에 대한 개념정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연구방법의 일환으로서 일본의 대외정책 및 세계화 전략 등에 주시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지금까지 국제관계에 있어서 끊임없이 불화의 불씨를 지피우고 있는 독도 문제도 결국은 ‘구니비키즘’에 맥락을 두고 있는 일본인의 본능적 정서에서 기인한다고 했을 때, 일본연구의 다각적인 심층분석을 요하게 한다. 일본인들이 독도를 끌어들이려는 본능의 표출로서의 ‘구니비키즘’은 결국 오래전 신화의 시대에서 유래하는 집단적 심리작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따라서 일본이 다케시마(竹島)라고 운운하며 독도를 일본 영토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한국의 입장에서는 크게 우려하거나 당황하거나 분노할 바는 아니다.
물론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인식시킬 필요가 있으며, 한국이 명실상부하게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만큼 영구히 굳건하게 지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한국국민으로서는 불변의 요소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동시에 일본은 국가유지를 위하여 신화적 본능으로 끊임없이 발현시켜 ‘국풍(國風)’을 일으키고 일본의 전통적 기질을 되살리게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본에 있어서 국풍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시대풍조라든가 일시적인 국가의 분위기가 아니라 헤이안(平安) 시대에 대륙에서 끊임없이 유입된 선진문물과 제도인 ‘당풍(唐風)’에 맞서기 위한 일본 전통의 자국력(自國力)으로서의 국풍이다. 헤이안 시대에 이러한 자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그 후로 줄곧 국가의 일체감을도모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적극적으로 국풍을 불러일으켜 국가유지에 활용했으며, 중세시대에 원나라가 침공하고자 했을 때에는 가미카제(神風)라는 대응구조로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는 방식으로 국풍을 확장시킨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구니비키즘’적 발상에 의한 행동양식이 일본을 세계화해 나아가는 데에 필수전략이라는 것을 일찍이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과, 다양한 방식으로 ‘구니비키즘’을 형성시켜왔다는 점 등을 진지하게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늘 그러한 발상으로 일본을 세계화시키는 데에 활용해 왔다는 점을 인식하는 한, 일본의 대외정책 내지는 독도 문제에 대한 민족심리학적 이면을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본은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대륙의 것을 끌어들이려는 ‘구니비키즘’을 작용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들이 끊임없이 발휘되어 왔었음을 확인하는 데에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일본의 전통 스포츠인 ‘스모(相撲)의 세계화’가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일본이 세계화시킨 여러 요소들 중에는 ‘김치(キムチ), 스시, 라멘, 유도(柔道), 검도(剣道)’ 등이 있다. 그런데 일본의 국기(national sport)인 스모(相撲)는 아무리 세계화를 실현하려고 해도 경기에 임하는 선수(力士)들의 특이한 복장, 특히 촌마게(ちょんまげ, 스모 선수들의 상투 모양을 한 헤어 스타일)와 마와시(삿바)를 비롯하여 까다로운 경기 규칙과 번거로운 절차 등으로 하여 세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현지가 아닌 외지에서는 스모의 활성화가 전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는 한편, 세상 사람들로부터 ‘스모는 스포츠라기보다는 에로틱 퍼포먼스’라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스모의 세계화에 대하여 한계감을 느낀 일본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발신적 사고에 의한 세계화(out-bounding globalization)’의 전략을 포기하고 ‘구니비키’식 사고논리를 발휘하여 ‘수신적 사고에 의한 세계화(in-bounding globalization)’의 전략으로 전환시켜서 세계의 파이터들(fighters)을 일본으로 끌어들여 일본 국내에서 스모의 세계화를 실현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스모 경기의 마지막 날인 결승전에 도효(土俵 : 씨름판)에 오르는 세계 굴지의 외국인 스모 선수들, 그리고 그곳에 초대되어 승자들에게 우승 트로피를 수상하는 주일 각국 대사관의 대사들과 적지 않은 외국인 관람객들에 의해서 관찰되는 ‘스모의 세계화’는 또다른 ‘구니비키’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구니비키’의 나라이다. 그리고 ‘구니비키’의 대상은 단순히 영토만이 아니라 인적자원까지 대상을 확대시킨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구니비키즘’을 이해하면 일본을 좀 더 심층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