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그런 표정.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온 요코하마 거주 유학생.
국화꽃 한 송이를 사기 위해 신주쿠 쇼쿠안도리를 헤매고 다니던 예닐곱 명의 유학생들.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으로 조심스럽게 향불을 올리는 중년부부.
허겁지겁 퇴근길을 재촉하여 달려온 회사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같은 슬픔과 같은 분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더불어 함께 사는 마을, 숲'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는 것.
26일 밤 8시 45분, 소위 코리안타운으로 불리는 쇼쿠안도리에 설치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관음사)의 분위기는 슬픔으로 가득했지만, 그러나 서로의 신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무척 따스했다. 아마도 가슴이 먹먹한, 같은 심정으로 달려온 이들이었기 때문이리라.
2층 관음사에 차려진 노 전 대통령의 분향소. 벌써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하얀 국화가 제단 앞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주최 측에 의하면 25일 하루동안 200여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향불을 피웠단다. 모두들 생업에 종사하랴, 공부하랴 하루 24시간을 종종걸음으로 사는 한인들을 생각한다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한편, 주최 측에서는 조문객들에게 절을 하기 전에 먼저 노 전 대통령에게 술 한잔을 올리라고 일일이 조문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향불을 피운 다음 세 번의 절을 하게 했다.
혼자, 혹은 그룹으로 조문을 온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다.
혼자 조문을 온 이들은 정장을 한 회사원들이 많았고, 그룹으로 온 젊은이들은 대부분
유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조문을 한 다음 분향소 한켠에 놓인 방명록에 자신의 마음을 적었다. 주최측에서는 장례식이 끝나면 봉하마을에 전달할 예정이라고 했다.
조문을 마친 사람들은 주최 측이 차 한잔하고 가시라는 말 한마디에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과자와 따끈따끈한 오차가 놓여져 있었다. 여자 유학생 두 명이 주최 측에게 인사를 했다.
"추모할 곳이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 말에 모두들 "우리도요" 라고 이구동성으로 합창하듯 말했다.
kbs의 9시 뉴스.
분향소가 차려진 봉하마을 특집이 방송되고 있었다. 휠체어를 탄 권양숙 여사가 반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나왔다.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몇 명의 여학생은 노 전 대통령의 사진이 나오자마자 흐느껴 울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봉하마을 조문거부 뉴스도 나왔다.
누군가 감정을 실어 "사람 죽여 놓고 무슨 조문이야"라고 내뱉었다.
모두들 "그러게 말이야" 이때도 그들은 한마음이었다.
이처럼 24일 오후 3시부터 차려진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는, 조문하고 싶어도 그럴 장소가 없어 내심 안타까워 하던 한인들을 모이게 했다.
문제는 25일에 일어났다. 도쿄 내에서 갑자기 제2, 제3의 분향소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대사관과 한인회.
▲ 주 일본 대사관 분향소 공지 ©jpnews | |
<공지사항>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2009년 5월 23일 서거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가족과 협의하여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발인제와 영결식은 2009년 5월 29일 개최될 예정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 대사관은 아래와 같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장소를
설치 운영할 계획임을 공지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장소 : 주일본대한민국대사관 1층 접견실 내
주소 :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 1-2-5
기간 : 2009년 5월 25일(월) - 2009년 5월 28일(목)
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 단 5월 25일(월)은 오후 - 6시
연락처 : (03) 3452 - 0000 위 내용은 일본 주재 대한민국대사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또 한 곳이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소 마련>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소를 아래와 같이 마련함을 알려 드립니다.
1. 장소 : 재일본한국인연합회 회의실
2. 기간 : 2009년 5월 25일(월) 10 : 00 - 2009년 5월 28일(목) 20: 00
재일본한국인연합회 회장 박 00 그럼 위 두 곳의 분향소 설치가 왜 '문제'인지를 살펴보자.
본디 '조문'이라는 것은 죽은 혹은 돌아가신 이에 대한 마음이 담긴 예의 표시다.
그런데 위 두 곳 모두, 노 전 대통령은 23일에 돌아가셨는데 분향소는 25일에 설치했다. 그것도 오후에 말이다. 더구나 대한민국대사관은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지도자로 모시고 있던 수장이었다.
그런데도 본국 눈치를 보느라 이미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즉 의리조차도 지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본국에서 국민장으로 한다니까 그제서야 마지못해 한국대사관에 분향소를 차린 것이다.
이는 억지춘향식의 제스처에 불과하지 않은가?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죽은 권력'이라 할지라도 망자에 대한 예의나 의리는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마땅하다. 특히 국가공무원에게는.
게다가 또 한가지.
조문시간이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다.
이 시간대에는 유학생이나 회사원의 조문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혹자는 그럼 점심시간에 조문을 하면 되잖으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일본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국처럼 철야를 한다든가, 근무시간을 할애하여 조문하는 행위는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직장을 그만둘 각오를 한다면 모를까.
때문에 유학생이나 회사원은 대한민국대사관 분향소에서 조문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몇 명의 유학생과 회사원은 일이 끝난 6시 이후에 대사관을 찾아갔다가 헛걸음만 했다고 성토했다. 대사관이 진정성을 갖고 분향소를 설치했다면, 유학생들과 회사원의 입장을 배려했어야 했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거리 또한 시내로부터 상당히 멀어 조퇴를 하고 찾아간다고 해도 6시까지 맞추기는 시간상으로 매우 어렵다. 게다가 한국대사관은 자신의 신분증을 내보이고 기록한 뒤에야 대사관 내로 들어갈 수가 있다.
물론 고급승용차를 탄 고이즈미 전 수상과 일부 일본정치인(25일 조문)들, 그리고 아소 타로 수상(26일 아침조문) 같은 이들은, 여유롭게 대한민국대사관 분향소를 찾아 조문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또 한 곳 한인회.
▲ 한인회에서 온 분향소 시간 변경 팩스 ©jpnews | |
25일 오후, 편집실 팩스로 공문서 한 장이 날라왔다. 분향소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문할 수 있는 시간대가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오후 1시부터 6시까지라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학생이나 회사원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시간에 조문할 수 있는 이들은 일이 없는 사람이나 사장밖에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국인을 위해 분향소를 설치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시간대다.
그래서 기자가 한인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물었다. 누구를 위한 분향소냐고. 유학생이나 회사원들이 어떻게 그 시간에 조문을 갈 수가 있느냐고.
전화를 받은 사무원은 윗분과 상의를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기자는 시간이 변경되면 다시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26일 오전, 한인회로부터 다시 팩스가 왔다. 변경된 시간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25일 오후 3시- 28일 오후 18:00시였던 것이 25일 오전 10:00- 28일 20시로 바뀌었다.
이같은 대한민국대사관과 한인회의 때 늦은 분향소 설치는 당연히 한인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대사관을 찾아갔다가 헛걸음을 한 유학생과 회사원은 관음사 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뒤, 대한민국대사관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관이냐며 비판했다.
차라리 자기네끼리나 조문할 것이지 뭣 하러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바로 전시행정적인 행위가 아니냐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을 진심으로 추모하고 싶었다면, 비록 '죽은 권력자'였지만 한 때는 일국의 지도자였던 분이었으므로, 23일 오후에라도 분향소를 설치했어야 마땅했다고 성토했다.
시간책정도 조금이라도 성의가 있었다면, 29일 국민장이 끝나는 날까지만이라도 조문시간을 연장해(공관원들의 약간의 퇴근시간을 희생하더라도), 조문하고 싶은 한인들을 배려했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국가공무원이라면 그 정도 재외국민 서비스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어떤 회사원은 어차피 관음사에서 분향소를 차렸는데, 이를 뻔히 알면서도 불과 10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의 한인회에서, 별도의 분향소를 차린 것은 무슨 의도냐면서 한탄했다.
이렇듯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분향소 설치를 놓고, 국가기관인 대한민국 대사관과 한인회가 한인들의 정서와 편의 도모와는 전혀 동떨어진 뒷북치기 행동으로 빈축을 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