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재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읽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읽어보실 독자님들은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전12화)를 먼저 읽으신 후 제2부 '일본 아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다'를 읽으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일본 여친 프로포즈 시리즈혼인신고 (1부)삼겹살 (2부)아버지가 눈치챈 동거 (3부)번데기 (4부)유산 (5부)어머니의 전화 (6부)손 (7부)장인에게 한 거짓말 (8부)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다. 2005년 3월 6일.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가 절에서 받아오신 날짜다. 어머니께 왜 이 날로 했는지 물었다.
"자식복이 좋은 날이래. 근데 너거는 많이 낳지 마라. 애들 많이 낳으면 키우기 힘들데이."
아버지가 장손이니 어머니는 큰 며느리가 된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큰 며느리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계신다. 미우와 유나가 태어났을 때도 그랬다. 어머니는 당신의 손주딸들을 누구보다도 귀여워하시면서도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아이고, 우리 귀여운 손녀들. 고마, 꼬추만 하나 딱 달고 나왔으면 너거 엄마도 고생 안하고 얼마나 좋았겠노." 이 말은 결국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낳으란 말이다. 이 기대에 아내는 마침내 부응했다. 아니, 내가 열심히 한 건가? 아내는 둘째 유나를 낳고 금세 임신했다. 어머니께 임신사실을 알려드리자 당신은 걱정부터 하셨다.
"너거는 돈도 없으면서 애들만 그리 펑펑 낳아서 우짤라카노? 아이고 마, 내는 모르겠데이. 너거 맘대로 해라이."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후 '아들'임이 밝혀지자 180도 자세가 달라지신다.
"아이고! 이제 고마 됐다! 미와코도 이제 한시름 놨다. 진짜 수고했데이. 정말 잘했데이. 미와코한테 아무쪼록 몸조리 잘 하라고 해라. 그리고 내가 미역 좀 보내줄께" 그놈의 '아이고'는 도대체 몇 번 나왔는지 모르겠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감이 안 올 정도로 어머니는 왔다갔다 하셨다. 이런 어머니의 초조함과는 상관없이 아내는 셋째이자 장남인 '준'(准)을 낳았다. 2010년 1월 17일 01시에. 몸무게는 2700그램이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시즌2의 최종화가 이틀 늦게 나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국제결혼의 비애라면 비애라고도 할 수 있다. 처갓집 장인, 장모가 몸이 안 좋으시고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못 오셨다. 큰 애 미우와 작은 애 유나를 돌봐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
게다가 아이들은 유행성 구토설사증이라는 전염병에 걸린 상태였다. 이틀동안 아이들의 구토 및 설사를 받아내다 보니 새삼 아내들이 존경스러워졌다. 가사일,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새벽에도 귀신처럼 일어나 "아빠, 뭐 해?"라고 말을 걸어오니 도무지 뭘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튼 참 이 스님 용한 분이시다. 결혼식을 올리고 약 5년이 지난 지금 우리 부부는 돈도 집도 차도 없지만 아이만큼은 잘 낳았다. 결혼식 날짜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받은 셈이다.
결혼식 날 이틀전에 우리는 한국으로 들어왔다. 아내와 나는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예행연습이 뭐가 그리 많은지. 드레스, 턱시도를 고르는 것도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낼름 해치웠다.
"아! 딴 거 더 입어보고 싶었는데...흑." 아내는 한국에서의 결혼식 준비가 너무 '빨리빨리'로 진행되는 것에 적응을 못했다. 드레스도 다 한번씩 입어보고 싶었댄다. 식을 올리기로 한 호텔 웨딩부의 아가씨가 추천한 드레스를 입은 아내가 한국말로,
"아! 이거 이쁘다." 라고 외치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걸로 정해졌다. 아내는 단순히 아가씨한테 고맙다는 의미로, 그러니까 그냥 다테마에(建前, 예의상 하는 소리)로 예쁘다고 한 것일 뿐인데. 제 딴에는 일본어로 말하면 미안해서 일부러 한국말로 했는데 이 아가씨가,
"역시 그렇지예. 이게 제일 이쁩니더. 그라모 이걸로 하지예." 라며 자기 안목에 절대적 자신을 가지고 휙 정해버린 것이다. 어머니도 옆에서 "그래 그래, 이게 제일 좋네"라고 거들었다. 아내는 무슨 말들이 오고가는지 몰랐다. 그냥 웃음띤 얼굴을 고개만 끄덕거렸는데 말이다.
하지만 멋대로 정해져버린 웨딩드레스에 울상짓던 아내도 피로연에서 입게 될 한복에는 무척이나 감격스러워했다. 너무 아름답단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선 한복이 치마저고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이 치마저고리에 대한 인상은 보통 흑백이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조선학교 아이들이 통학하면서 입고다니는 하얀색 저고리에 검정색 치마라고 줄곧 상상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은은한 연분홍색과 연한 빨강색이 조화를 이룬 한복을 직접 보고 또 입어보니 이렇게 아름다운 옷이 없다는 것이다. 진짜 한국 며느리, 한국 아내가 되는구나라는 실감도 이때 처음으로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는 한복이 좋은 이유가 또 있다고 덧붙였다.
그건 바로 실용성이었다.
"한복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참 편해서 좋은 것 같아. 기모노보다 훨씬 편했어. 기모노는 이쁘긴 하지만 실용적이진 않거든. 어디 앉을때도 불편하고. 근데 비오는 날은 쥐약일거 같아. 끝자락이 다 더럽혀질 것 같아. 호호호." 이 얘길 들은 어머니가 포즈를 취하시면서 한마디 하신다.
"아가야. 그땐 오른손으로 한번 이렇게 착 감아돌리면 된데이." 한복을 차려입은 아내가 어머니의 몸동작을 따라 흉내를 냈다. 허드러지게 휘감기는 치마폭. 그때까지 수수하고 정갈해 보이던 아내가 갑자기 섹시하게 변한다. 이게 바로 한복의 위력인가 보다.
추석때 주문했었던 반지를 찾으러 갔다. 어머니는 다이아몬드로 하라고 했지만 나중에 아내가 그냥 보통 반지로 해 달라고 해서 바꾸었다. 평상시에도 하고 싶기 때문이란다. 일본에서는 혼약반지와 결혼반지가 따로 있다. 결혼식 때는 고급반지를 서로 나누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혼약반지를 낀다.
한국에서는 교환하는 반지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아내가 어머니에게 직접 말해서 바꾸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매일 하고 다닐 순 없잖아? 그냥 보통 반지로 해 주세요. 14케이나 그런 것도 좋아요." 이 말에 어머니는 "참, 미와코도 별나다. 다이아 싫어하는 여자앤 처음 봤네"라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냥 금반지만 해주기 그래던 것인지 돈 들어온다는 금덩이 복돼지 핸드폰 줄을 같이 사 오셨다. 아내는 반지보다 금덩이 복돼지가 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어머니! 돼지가 아주 귀여워요! 고마워요. 잘 쓸께요."
어머니가 웃으며 되묻는다.
"반지는?"
"아!...네. 죄송해요. 반지도 참 예뻐요."
"엎드려 절받기네." 아내가 엎드려 절받기 같은 고난이도의 한국어를 알 리가 없다.
"어머니, 엎드려 절받기가 뭐예요?"
"엉? 엎드려 절받기...음..." 어머니가 나를 쳐다본다.
"현아, 엎드려 절받기 미와코한테 설명 좀 해줘라."
"에? 그..그거..." 말문이 막혔다. 엎드려 절받기를 일본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거의 네이티브 수준에까지 올라온 지금도 이 엎드려 절받기만큼은 '넘사벽'이다. 도무지 뭐라고 번역해야 할 지 감이 안 온다. 어머니가 '쯧쯧' 혀를 차신다.
"니는 일본에 몇 년이나 살았는데 그런 말도 모르나? 공부는 안하고 연애만 해서 안 그렇나."
"그...그게 아니고..."
"근데 뭐, 연애는 잘 한 것 같으니까 내가 봐준다." 멀뚱멀뚱거리는 아내. 그런 아내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는 어머니. 나만 바보됐다. 하긴 어머니 입장에서는 뭐든지 잘해주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아무 것도 이룬 것 하나 없는 딴따라 출신의, 게다가 그 때 난 소송까지 걸려있는 입장이었다. '이런 문제아가 어디가 좋다'라고, 어머니는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실제로 어머니는, 나중에야 말씀하셨지만 걱정투성이였다. 지금도 걱정투성이다. 무엇보다 스님 영향이 컸다. 다산(多産)을 맞춘 이 용하신 스님은 언젠가 내 인생에 대해 "결혼? 그런 건 안 보이고 방랑벽만 수두룩해"라고 어머니께 말씀하셨다고 한다. 스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빚는다해도 믿고 보는 어머니다. 그의 이 '선언'은, 어머니에게 장손의 핏줄이 여기서 끊긴다는 '좌절'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그랬는데 덜컥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왔으니, 그것도 어머니의 마음에 쏙 드는 여자였으니 얼마나 예뻤을까?
결혼식 전날에는 장인어른과 장모님, 그리고 손윗처남 내외가 마산에 도착했다. 도착한 날 결혼식장인 아리랑호텔 1층 커피숍에서 처음으로 상견례를 가졌다. 3년 4개월만에 처음으로 양가 집안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우리 가족(부모님과 누나, 매형)이 먼저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윗 객실에서 처갓집 식구들과 같이 있던 아내와 나는 장인어른과 손윗처남, 그리고 그가 부축하던 장모님을 인도하면서 커피숍으로 내려 왔다.
장인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모님도 머리를 매만졌다. '괜찮아요' 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떨리시는 모양이다. 커피숍 자동문이 열렸다. 가족이 눈에 안 들어 온다. 한번 휘이 둘러보는데, 오른편 안쪽 구석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손을 들어 모시고 왔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시더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온다. 상견례에서 남자쪽 집안이 먼저 일어나고 그러는 거 들어본 적이 별로 없어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선두에 선 나를 본 척도 안 한다. 당신은 곧장 장모님의 한쪽 비어있던 어깨를 부축했다.
"아이고,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지예. 우리가 가야 하는데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더."
어머니의 눈이 어느새 젖어있다. 원래 눈물이 많은 분이시다. 거동이 불편한 손윗어른만 보면 괜히 눈물이 나온단다. 당신도 손이 좋지 않으시니까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뒤를 따라 매형도 왔다. 매형은 손윗처남 쪽을 거들었다. 아버지도, 누나도 일어서서 이쪽으로 왔다.
결국 다 선 채로 상견례를 하는 모양새가 됐다. 좁은 커피숍에 10명이 동시에 서 있는 형국이다. 말이 안 통하니 서로 머뭇거린다. 누나가 그나마 '곤니치와'(안녕하세요) 라고 말해 보지만 이런 경우엔 '하지메마시테'(처음 뵙겠습니다)가 모범답안이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통역도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장모님은 이 전례없는 상견례에 깊은 인상을 받으신 듯 했다. 원래 조용하신 분이라 일부러 표현을 하시진 않지만, 이후 항상 나를 만나기만 하면 물어 보신다. "어머니는 잘 계시냐"고.
상견례는 금세 끝났다. 별다른 말이 오고간 건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 말에 처갓집 식구들은 기뻐했고, 또 안심했다.
"따님 정말 잘 키우셨어예. 며느리가 아니라 항상 딸처럼 생각하겠습니더." 이 말을 통역해서 들려주자 긴장해 있던 장인어른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기분좋은 웃음을 보인다. 장모님도 보조개가 들어간다. 하지만 아내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상견례가 끝난 후 그런다.
"눈물 나와서 혼났어. 어머니가 딸이라고 말하는 순간 가슴이 울컥해지더라." 결혼식 전날 아내는 잠을 못 이뤘다.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냥 손을 조용히, 하지만 꼭 잡아줬다. 서로 나란히 누워 천장만 쳐다봤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채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단꿈을 꿨다. 둘 다.
아침이 밝았다.
"아!..."
아내의 탄성에 눈을 떴다.
"왜 그래?" 창문가에 선 아내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창문밖으로 손짓만 할 뿐이었다. 부시시 일어나 아내 곁으로 갔다.
"아!..." 나도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은세계였다. 거의 눈구경을 할 수 없는 마산인데, 그것도 3월 6일이다, 세상에! 새벽에 엄청난 눈이 내린 것이다. 우리가 손을 잡고 잠을 청한 그 때, 그 새벽나절동안 적설량 20센티미터의 기록적인 폭설이 내릴 줄이야.
"손을 꼭 잡고 자서 그런가 보다. 호호호." 아내가 활짝 웃는다. 나도 정말 이 기적같은 우연이 너무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님의 표정은 별로 안 좋다. 아내가 눈치를 슬금슬금 살핀다. 나도 잘 이해가 안되서 아침식사시간에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런다.
"조금만 오면 좋았는데... 너무 많이 와서 손님이 없겠다야." '에이 뭐 별로 안와도 상관없지' 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식후 담배를 한 대 물고 눈이 가득싸인 창문너머를 쳐다보며 결정타를 날린다.
"본전은 뽑아야 하는데...(먼산)" 하객은 곧 축의금이다. 그간 꾸준히 경조사에 발품을 팔았던 아버지가 단단히 한몫 잡을 걸로 생각했던 날에 이런 폭설이 내릴 줄은 몰랐다, 뭐 그런 스토리였다. 전후사정을 파악한 나도 상당히 가슴이 아려왔다. 어머니도 '너거는 복도 없다'라며 애잔한 눈빛을 보내신다. 이런 전후사정도 모른채 아내는 마냥 즐거워한다.
눈 때문에 모든 것들이 빨라졌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 결혼식인데 더 정신없어졌다. 한복을 받고 미용실에 들러 번개처럼 신부화장을 끝냈다. 결혼식 촬영해 줄 친구도 늦게 온단다. 사진기사도 차가 막혔다. 식장에서는 부모님, 누나, 친척들의 핸드폰이 불이 났다. 대부분이 조금 늦겠다는 전화였다. 개중에는 '결혼식을 늦춰라', '일주일 후에 하면 안되냐?'는 전화도 있었다. 이거 100% 실화다.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러나 오직 한 명, 아내만큼은 진심으로 '눈'에 감사했다. 하늘이 내린 축복이란다. 주인공이 만면에 웃음꽃을 띠고 있으니 사람들의 초조함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무엇보다 마산시청의 발빠른 제설작업으로 인해 결혼식을 한 시간 앞두고는 교통체증이 거의 사라졌다. 고맙다. 마산시청.
제시간에 결혼식은 거행됐다. 하객은, 그래봤자 4명을 빼곤 전부 우리쪽이지만, 다행스럽게도 꽉 찼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결혼식인데 역시 직접 당사자가 되고 보니 떨린다.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이다.
'신랑입장'에 맞춰 걷기는 걷는데 정말 단상이 까마득하다. 겨우 도착했다. 사명을 완수했다. 하지만 이내 또다른 시련이 왔다. 주례선생님께 인사하고 뒤로 도는데 모든 하객의 눈빛이 나를 향하는 것이다. 게다가 왁자지껄하다.
"철현아! 쫄지 마라. 임마!"
"니 지금 다리가 후들후들거리제? 껄껄" 아! 짖굿은 어른들, 삼촌들. 이거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버텨내기 힘들다. 결혼식 두번, 세번씩 올리는 분들, 정말 대단하신 양반들이다.
그러면서 웬지 걱정이 됐다. 아내가 과연 이런 일본의 결혼식과는 전혀 다른, 마치 시골장터에 온 것 같은 이질적 분위기를 잘 견뎌낼 수 있을지 말이다. 사회를 보기 위해 일부러 마산까지 내려온 절친한 영화친구가 일본어로 '신부입장'을 외쳤다.
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왔다. 다소곳한 표정으로 장인의 팔짱을 끼고 조심스럽게 한발 두발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내가 걸어왔을 때보다 한 서너배는 느린 것 같다. 아주 조심스럽다. 표정도 약간은 굳은 듯 했다. 그런데 중간쯤 왔을때 누가 외쳤다.
"가와이이!"(귀엽다, 예쁘다는 뜻의 일본어) 아내는 소리난 곳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는 웃었다.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단상에서는 장인어른이 팔짱을 풀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손을 빼더니만 내 쪽에 건넨다. 장인어른과 나는 황당해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장인은 겸연쩍어했다. 장인의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웃고 아내도 웃으니 하객들은 박장대소한다.
"신부가 적극적이데이!"
"이야, 결혼식에서 저렇게 잘 웃는 신부 별로 없다 아이가!"
"딸부자 되겄다! 하하하" 결혼식에 걸린 시간이 한 30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신랑입장만 제외하고 한 28분정도는 시종일관 이런 분위기였다. 사회 본 친구녀석이 도중에 순서를 까먹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아내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갈비탕 드시는 하객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했을 때도, 나름대로 엄숙하다는 폐백 때도 뭐가 그리 좋은지 내내 웃었다. 물론 아내는 잘 웃는다. 하지만 이 날처럼 많은 웃은 날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결혼식 다음날 처갓집 식구들은 먼저 일본으로 떠났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지 않았던지라 김해공항까지 같이 나갔다. 금세 볼 거니까 석별의 정이 어쩌고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식구들이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것까지 보고 아내와 나는 다시 마산으로 돌아오는 공항 리무진 버스를 기다렸다.
아내가 잠시 일어서더니만 자판기 커피를 두 개 뽑아 온다. 자판기 커피의 광적인 팬인 아내는 뜨겁지도 않은지 훌훌 잘도 마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묻고 싶어졌다.
"아참, 근데 어제 왜 그리 웃은거야?"
"응? 오빠, 무슨 말이야?"
"아니 어제 결혼식... 많이 웃었잖아."
"누가? 내가?"
"자기 웃은 거 몰라?"
"어, 글쎄. 난 모르겠는데. 그렇게 많이 웃었나?"
"이런..."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지 뭐. 억/수/로!" 아내와 내가 자판기 커피를 비우자 버스가 왔다. 아내는 빈 종이컵을 항아리 휴지통 안에 멋지게 골인시킨다. 내 종이컵도 뺏더니만 연속골에 성공한다. 한국사람 다 됐다.
버스에 올라타 한참 달리고 있자니 아내가 물어온다
"오빠! 궁금한 게 있어."
"응? 뭐?"
"프로포즈 말야."
"아. 프로포즈..."
"오빤 도대체 프로포즈 언제 할 생각이야?"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아내에게 프로포즈 한 적이 없다. 무심한 녀석. 당황해 하는 나를, 아내는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아내의 손에 끼워진 반짝거리는 반지가 눈에 들어 온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안 해도 돼." 고개를 들었다. 아내는 어느새 결혼식장에서 보인, 웃음띤 얼굴로 변해 있었다.
"내가 했으니까 괜찮아. 한국에 와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 앞으로도 많이 만나겠지? 오빤 그냥 변하지만 않으면 돼. 많이 고마워." 아내는 손을 다시 한번 꼭 잡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너머에는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내는 이날 밤새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어머니한테 건네졌는지 아닌지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그 편지의 겉봉에는 분명히 '딸 미와코' 라는 한글이 적혀져 있었다.
아내는 어떻게 보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은게 아니라 스스로 '어머니의 딸'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 부부는 정확하게 10개월 후인 2006년 1월 7일, 큰 딸 미우를 낳았다.
(시즌 2 끝, 시즌 3로 이어짐)
■ 기자주
그간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문에서도 밝혔지만 가족이 한 명 더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1개월간 이 연재는 쉬려고 합니다. 아내의 몸이 추스려지는 대로 다시 연재하겠습니다. 시즌 3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럼 앞으로도 변함없는 성원과 기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