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새해 첫날부터 3일까지 꿀맛같은 휴식을 취했다.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뒹굴뒹굴하는데, tv 사운드가 영 시끄럽다. 일본 전통의 오세치(お節) 요리로 하루 세끼를 때우자고 작정한 일본인 아내는 아침밥을 대강 해치우고 텔레비젼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리모콘을 만지작하더니만 4번 채널(관동지역의 경우 니혼tv)로 고정시킨다.
"아! 와세다가 추월당했습니다. 추월당했습니다. 이로써 다니엘은 10명을 추월하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습니다. 선두를 달리던 와세다 추월당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대단합니다." 흥분한 실황 아나운서의 들뜬 목소리에 마치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아내는 브라운관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브라운관 안에서는 대학생들이 학교이름이 적힌 어깨띠를 둘러메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 아내가 이틀 연속으로 도합 10시간 남짓 본 이 프로그램은, 일본 신년의 풍물시 '하코네 에키덴'(箱根駅伝) 마라톤이다. 아내는 이걸 보느라 처갓집도 3일 오후 3시에 찾아갈 정도였다. 그런데 아내 뿐만이 아니다. 손윗 처남도 마찬가지다.
"우리 에키덴 보고 있는데 이거 끝나면 출발할께. 4시쯤에 도착할 거야"
장남인 손윗 처남도 에키덴에 빠져 본가에 늦게 오겠다는 거다. 보통 일본인들도 그랬다. 도쿄와 하코네 사이의 도로 주변에는 응원하는 사람들로 빽빽히 들어차 있다. 응원꾼이 없는 구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연인원 50만명이 몰린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새해 연휴다. 꿀처럼 달콤한 이 황금연휴에 아침부터 오후까지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마라톤에 열광하다니.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 2010년 하코네 에키덴을 보기 위해 도쿄 오테마치에 몰린 일본인들 ©타쿠미 코다/jpnews | |
영어로 로드 릴레이(road relay)라고 불리는 '에키덴'은 몇 명의 주자가 이어 달리기를 하는 육상경기의 일종이다. 도쿄 하코네 에키덴은 관동지역 대학들이 참가하는데, 일본의 3대 에키덴으로 불린다. 관동지역의 수백개 대학중 참가가능한 팀은 20개에 불과하다. 이중 10개팀은 전년도 에키덴에서 10위 이내에 들어가 시드를 배정받은, 이른바 부전승 팀이다.
나머지 10개, 아니 9장의 출전티켓을 놓고 치열한 예선전을 벌인다. 나머지 한장은 관동지역 대학연합이다. 개인성적은 상위권임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탈락하는 바람에 뛰지 못하게 된 선수 10명을 추려 내 관동학생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출전시키는 것이다.
아무튼 이 본선시드 때문에 1위 다툼 뿐만 아니라 10위권의 싸움도 볼 만하다.
총 구간은 왕복 217.9km(하행 108.0km、상행 109.9km)로, 이 거리를 10개 구간으로 나누어 하행 5구간, 상행 5구간을 10명의 선수가 이어 달린다. 중계권은 주최측인 요미우리 그룹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미우리 그룹 산하인 니혼tv가 독점중계하는 것이다.
<제이피뉴스>의 일본인 스탭들도 이 '에키덴'에 흥분했다. 스기모토 씨는 연말연시 바쁜 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日 새해, 대학생 릴레이에 열광하는 이유'를 썼고, 사진부의 타쿠미 코다 씨는 굳이 갈 필요 없다고 말해도 "무조건 취재하겠다"며 새벽부터 카메라를 둘러 멨다.
대학생들이 대학의 명예를 걸고 사력을 다해 질주한 후 '다스키'(たすき、어깨띠)를 다음 주자에 건네주며 장렬히 쓰러져가는 그 광경, 확실히 감동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틀간 도합 10시간이나 같은 방송을 틀어놓고 마지막 20번째 주자의 골인광경까지 다 보는 아내의 모습이 이해가 안 갔다.
올해만 그런게 아니다. 벌써 몇 년째 이러고 있다. 재작년이던가? 아내가 졸업한 고쿠가쿠인(國学院) 대학이 출전했을 때는 아예 나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출발지점인 요미우리 신문사 앞으로 응원하러 갔을 정도다.
3일도 그랬다. 그렇게 tv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아내가 목소리가 떨리더니만 갑자기 박수를 친다.
"아! 이시다가 완주했어. 정말 다행이야!" 화면을 쳐다보니 조사이(城西) 대학의 이시다 료라고 자막이 나온다. 8구간을 완주했다는데, 카메라 플래쉬가 번쩍거린다. 자기에게 맡겨진 구간을 완주한 것일 뿐인데 왜 그럴까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낯이 익다.
아! 이 선수, 작년에 도중에 기권한 선수다. 아직도 뇌리에 선연히 남아 있다. 눈자위가 풀린 상태로 비틀비틀거리다가 결국 도중에 쓰러진 선수. 작년 같은 날, 비록 그 때는 8구간이 아니라 7구간이었지만, 그렇게 곧 죽을 듯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이시다 료 선수.
결국 그는 이 때 몇 십미터를 걸어가다가 쓰러져 후송됐다. 마지막까지 '다스키'를 건네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을 그의 심리상태는 마치 군대에서 행군을 낙오했다간 큰일난다는 그런 절박함과 비슷할 것이다. 저렇게 잔인한 경기를 왜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 그리고 낙오하지 않게끔 충분히 준비를 했어야지 하는 질책하는 마음도 동시에 들었다.
에키덴 팬인 아내 앞에서 차마 잔인한 경기라는 말은 못했다. 그래서 질책하는 말을 했다.
"에휴, 열심히 훈련했어야지. 포기하면 어떡하냐. 쩝" 그러자 아내는 갑자기 눈이 커지면서 이렇게 대꾸한다.
"오빠! 어쩌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정말 실망이야. 정말 엄청나게 실망했어!" 결혼하고 나서 싸움을 거의 하지 않았던 우리 부부지만 이날만큼은 엄청나게 싸웠다. 아니, 싸웠다기 보다 에키덴에 대한 의견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라는 토론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자기 대학의 '다스키'를 어깨에 걸고 오직 저것을 다음 주자에게 연결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저렇게 열심히, 저 추운 날에 저렇게 고통스러운 고독한 싸움을 하다가 결국 극복하지 못한 건데... 그걸 보면서 훈련을 열심히 했어야지라니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 "아니, 그렇다면 확실하게 준비하고 훈련해서 기권하지 않도록 해야지. 그렇게 중요한 경기라면 말야. 또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쓰러질 때까지 아무도 안 도와주는 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 저러다 죽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는 거야?" "오빤 에키덴을 몰라. 모르면서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암튼 실망했어"
▲ 2010년 하코네 에키덴. 도합 20명의 선수들이 각자 자신의 학교의 명예를 걸고 달린다. ©타쿠미 코다/jpnews | |
결국 작년 이날 무심코 내뱉은 내 말을, 아내는 지금도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이번 에키덴도 그래서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봤다.
그런데 올해는 나도 조금은 달랐다. 무엇보다 스기모토 씨가 쓴 글 덕분이다. 이걸 읽고 나는 에키덴에 왜 일본인들이 열광하는지, 물론 아직 동의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이시다의 경우 작년 그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완주한 후 부축하는 주위 동료들에게 눈물을 흘려가며 "아리가또! 아리가또!"(고맙다, 고마워!)를 울부짖는 모습이 웬지 모르게 찡해 오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 완주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이 말을 듣고 아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기억했었어?""어. 작년에 그렇게 싸웠는데 모를리가 없지""싸운게 아니라 오빠가 너무 모르니까 그런거지""아! 에키덴 이젠 나도 알아""어? 공부했어?""공부는 아니고 우리 사이트에 에키덴 칼럼이 올라왔는데 읽다보니 대충 느낌이 오더라고. 요즘에는 보기드문 스포츠인 것 같아" 아내가 그 글을 보여 달란다. 운 좋게도 스기모토 씨의 이 글은 일본어도 같이 실려 있었다. 꽤나 장문이지만 아내는 한번에 다 읽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정말 괜찮은 칼럼이다. 이 칼럼대로야. 일본인은 이래서 '에키덴'을 좋아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나머지 9, 10구간을 같이 나란히 앉아서 봤다. 도요대학의 2연패가 결정되고 나머지 대학들도 차례차례 들어온다. 1위를 못해도, 아니 시드에도 못 들어가도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이 마지막 주자를 웃는 낯으로 반겨준다.
중간에 시간제한에 걸려 '다스키'를 다음 주자에 건네지 못해 결국 '다스키'없이 맨 몸으로 들어온 아세아 대학 마지막 주자가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기권 주자를 둘러싸고 마지막 주자 및 동료들이 "괜찮아! 내년에 힘내자!"를 외치며 격려한다.
'에키덴'을 꿈쩍않고 한 시간 정도 보다 보니 그 매력이 전해져 온다. 어떻게 보면 '에키덴'이야 말로 호불호를 떠나 가장 일본적인 스포츠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대로 된 일본문화를 체험해 보고 싶은 독자들은 내년 1월 2일, 3일에 열리는 '하코네 에키덴'을 꼭 보시길 바란다. 그 숭고함, 열정, 와(和)는 물론 잔인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