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재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읽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읽어보실 독자님들은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전12화)를 먼저 읽으신 후 제2부 '일본 아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다'를 읽으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일본 여친 프로포즈 시리즈혼인신고 (1부)삼겹살 (2부)아버지가 눈치챈 동거 (3부)번데기 (4부)유산 (5부) 첫 아이의 유산은, 어떻게 보면 이기적일 수 있겠지만, 아내와 나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됐다. 아내를 당분간 혼자 두지 말라는 의사 선생의 지적을, 나는 너무나 충실히 지켰다. '당분간'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말해주지 않은 선생님의 잘못도 크다. 그 '당분간'은 아마 2004년 추석 때까지, 그러니까 아내가 처음으로 마산의 시댁을 찾아갔을 때까지 이어졌다. 2003년 6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무려 1년여 동안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여행을 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대단한 여행은 아니다. 도쿄의 동쪽과 서쪽을 가로지르는 쥬오센(中央線)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진 '동네여행'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여행은 아내와 나에게 엄청난 자극을 줬다. 도쿄 토박이인 아내는 가는 곳마다 "아니! 이런 곳이 있었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전까지 신주쿠나 시부야, 오다이바, 하라주쿠, 이케부쿠로, 우에노 등 도쿄 23구 안의, 관광가이드에 언제나 실려있는 유명한 곳들만 찾아다녔던 나 역시 이 '동네여행'에서 진짜배기 일본인의 문화와 삶을 느낄 수 있었다.
동네여행도 동네여행이지만 이 1년간의 경험은 우리 부부에게 있어 '권태기'라는 걸 앗아갔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결혼하고 2, 3년이 지나면 권태기가 찾아온다고들 했다. 권태기란 것 별 게 아니다. '연인'이 '가족'으로 변하는 순간 찾아오는 게 권태기다. 모토키 마사히코라는 일본의 유명한 잡지 편집자가 있다. 일본드라마 '하타라키망'(働きマン)에 등장하는 '슈칸 지다이' 편집장의 실제 모델인 이 분은 어느 부부동반 술자리에서 그 날따라 유독 금슬이 좋은 우리 부부에게 이런 질문을 불쑥 던지기도 했다.
"박군 부부는 오늘 밤에 그거 하는 건가?"
"예? 뭘요?"
"그거...밤에 '연인'들이 하는 거"
"아, 모르겠는데요..."
"박군 부부 보면 참 독특해"
"왜요?"
"일본사람들은 결혼하면 그거 안 하거든"
"어?! 왜요?"
"'가족'끼리 하면 근친상간이 되잖아. 껄껄껄."
"......-_-" 물론 농담조였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양 옆과 대각선 건너 편에 앉아있던 회사 동료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손발의 오글거림을 참아가며 익지도 않은 숯불구이를 꾸역꾸역 삼켰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연인이 가족이 되어버리는 순간 '권태기'가 찾아온다. 누구 아빠, 누구 엄마로 불리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이름, 아니면 연애시절 서로가 서로를 불렀을 때의 호칭을 계속 사용한다면 권태기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뭐, 만고 내 지론일 뿐이지만.
쥬오센 동네여행은 신주쿠 역을 기점으로 서쪽 편에 위치한 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오쿠보는 삼겹살 먹으러 워낙 자주 갔기 때문에 여행이라고 할 만한 건덕지가 별로 없었다.
우리의 동네여행은 미타카 역을 중심으로 히가시 나카노, 나카노, 고엔지, 아사가야, 오기쿠보, 기치죠지 등 동쪽의 역들과 다치가와, 구니타치, 도요타, 하치오지, 오메 등 서쪽의 역 근처에서 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다치가와, 하치오지 역에서는 전철을 갈아타고 다시 북쪽, 아니면 남쪽으로 발길을 옮기기도 했다. 전혀 모르는 역, 예를 들어 아내 역시 한번도 타 본 적이 없다는 무사시사카이 역에서 세이부다마가와(西武多摩川) 선을 탄 후 비로소 목적지를 정하는 '배째라 여행'도 꽤 했다.
이 세이부다마가와 선은 정말 재밌는 노선이다. 종점부터 종점까지 불과 8km에 그 사이에는 6개의 역만 존재한다. 세이부 철도회사가 운영하는 전철이 낡았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지만 특히 이 쪽 노선은 완전히 버림받은 자식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폐차되기 일보직전의 전철만 다닌다.
아내와 탔을 때도 그랬다. 햋볕을 막으려고 창문 쪽 칸막이를 내리려고 하는데 이게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내려 온다. 아내가 "비켜봐. 내가 해 볼께"라고 대신 내려 보려 하지만 마찬가지다. 몇 분을 용을 써도 안되는 우리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옆 좌석의, 딱 보니 이 전철을 오랜기간 이용한 듯 보이는 초로의 아저씨가 씨익 웃으면서 이러는 거다.
"그거 고장난지 아마 1년은 됐을거야. 그냥 저쪽 건너편에 앉는게 좋아" 일본사람들, 어디 고장나면 바로바로 고치고 그러는 줄 알았다. 또 대부분은 실제 그랬다. 하지만 이 세이부다마가와 선만큼은 논외다. 혹시 전철 마니아가 도쿄에 올 일이 있다면 삐까번쩍 신칸센이나 철도 박물관만 찾지 말고 꼭 세이부다마가와 선을 타 보시길 권한다.
색다른 재미도 재미지만 일본에서 운행되고 있는 상용전철 중에 가장 오래된 전철차량을 직접 타 볼 수 있다는, 돈 주고도 못할 체험도 가능하다.
거의 모든 여성들이 그렇겠지만 아내도 쇼핑을 좋아한다. 그런데 아내는 신상품 보다 중고를 선호한다. 안티크(antique) 체질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왜 중고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니 단숨에 답한다.
"당연하지. 싸잖아!" 그러고 보니 아내는 어제도 만삭이 된 몸으로 신생아를 업을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는 '만능군'를 사 왔다. 무려 8천엔. 내 감각으론 좀 비싼 것 같았다.
"미우(첫 아이) 낳을 때 산 게 아마 5천엔인가 했던 것 같은데..."
"응? 아 그땐 그랬던 것 같다"
"근데 이건 왜 이리 비싸?"
"재질이 다르잖아. 순면이야, 순면. 게다가 원래 1만 5천엔하던 게 8천엔으로 내린거야. 얼마나 싸고 좋아?!" 아내의 쇼핑감각은 마지막 말에 집약돼 있다. 한국에서 생활했다간 바가지 쓰기 딱 좋다. 실제로 아내는 첫 한국여행에서 동대문 시장에 갔다가 "원래 3만원 짜린데 특별히 2만 8천원에 줄께요" 류의 상술에 혹해 무려 30만원치나 옷을 샀다. 정가보다 싸면 혹하고 보는 아내의 쇼핑 스타일에 중고 옷가게는 딱 들어 맞았다.
▲ 고엔지에는 그야말로 개성만점의 중고 옷가게들이 널려 있다. 사진은 그중 하나인 쥬에. © 박철현/jpnews | |
이런 중고 옷가게들이 몰려 있는 곳이 고엔지(高円寺)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패션의 성지는 하라주쿠 혹은 시부야였다. 관광가이드 북에도 그렇게 실려 있었다. 뭐, 지금도 하라주쿠와 시부야는 여전히 인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하라주쿠, 시부야에 짜증내는 사람들도 있을테다. 다들 같은 목소리를 낼 때 웬지 동참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들.
사실 아내가 그랬다. 물론 아내도 하라주쿠나 시부야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 신나게 새벽까지 싸돌아 다닌 적도 많다. 하라주쿠에서 개최된 '스차다라파' 등의 심야공연에는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어떻게 그 땐 아침까지 '헤이 요!'를 외쳐댈 수 있었을까 새삼스러워지지만. 아무튼 하라주쿠와 시부야에 지친 사람들에게 고엔지를 추천한다.
고엔지는, 이때만 하더라도 '일본의 인도'였다.
지금은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의 신주쿠 가부키쵸 정화작전 때문에 거기서 밀려난 성(性) 풍속업 가게들도 꽤 많은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엔지의 거리는 대단히 인도적이다. 어떻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 인도적 감수성을, 고엔지 거리에서 느꼈다.
얼마전 한국에도 번역・출판된 '가난뱅이의 역습'을 쓴 마쓰모토 하지메 군도 고엔지 역 쪽에서 '평범한 이들의 난(素人の乱) 5호점'이라는 중고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 그룹이 운영하는 가게들도 상당히 인도적이다.
패션거리는 주로 고엔지 남쪽 에이리어에 형성돼 있다. 래디컬 임팩트, 레이스 업, 핀타나, 엑스트라 비젼, 비치, 로드 마르스, 파워스, 프리크 아웃 등 지금도 가게이름이 금세 떠오를 정도로 아내와 나는 이쪽 가게들을 애용했다.
다들 개성만점의 컬렉션이다. 가격도 2, 3천엔으로 저렴하다. 개중에는 당연히 2, 3만엔 이상가는 비싼 곳도 있다(90만엔짜리 리바이스 한정품 청바지도 봤다). 하지만 워낙 가게가 많다 보니 충분히 비교가능하다.
고엔지만 그런게 아니다. 쥬오센의 역들은 그 문화적 향기가 정말 독특하다. 오밀조밀한 서브컬쳐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유명해져 버린 나카노 브로드웨이의 만다라케만 하더라도 아키하바라의 오타쿠 문화와는 또다른 서브컬쳐적 향기를 맛보게 한다.
아내와 나는 이런 쥬오센 문화를 한동안 만끽했다. 권태기 따윌 느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유복했던 동네여행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아내가 지도를 보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고마(高麗) 라는게 그 옛날 고구려 맞지?"
"아! 그거. 응, 맞어. 한국에도 뉴스로 나오기도 했어. 고려는 따로 있는데 '고마'는 고구려 유민이 정착한 데 맞어"
"음... 오늘은 여기 갈까?
"좋아! 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 고마 이야기는 아마 한국 독자들도 들어본 바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와 정착한 곳으로 고마가와 역과 고마 역 근처에는 일본 정치계의 유력인사들이 자주 찾는 고마신사를 비롯해 고구려의 세력(?)이 140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날 우리는 고마 역으로 떠났다. 말로만 들었던 그 곳은 우리가 지금까지 다녔던 쥬오센과 또 달랐다. 쥬오센을 타고 간다면 다치가와 역에서 오메 선으로 갈아타고 하이지마(拝島)를 거쳐 고마가와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이날 따라 세이부 선을 타고 싶었다. 맨날 쥬오센 타는 거 지겹다.
고쿠분지에서 히가시무라야마 역, 도코로자와 역을 거쳐 고마 역에 내렸다. 물경 1시간 20분이나 걸리는, 동네여행 사상 가장 긴 여행이었다.
고마 역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놀랬고 돌처럼 굳어졌다. 나의 그런 모습에 아내는 의아해 했다.
"왜 그래?"
"저...저거..."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손을 들어 가리켰다. 내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우와! 저게 뭐야?" 아내는 신기한 듯 물어왔지만 나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이야기로 들었던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역시 천양지차다. 지금은 역사기행 관광명소가 된 고마 역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간혹 학생들을 데리고 역사기행을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내가 말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자(그만큼 충격이었다) 아내는 결국 개찰구의 역원에게 물었다. 고마 역에만 10년째 있다는 그는 친절하게 웃으며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조선반도의 전통적인 조형물인데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해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지요. 자세한 건 이 팜플렛을 보면 나와요. 여기 보면 이쪽 일대를 돌아보는 코스도 있으니까. 아참, 고마신사는 꼭 가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원래 고마신사를 가려고 했기 때문에 일단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마신사는 산 중턱에 있었다. 산길을 걷는데 신기하게도 일본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장승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였던 걸까? 하지만 아내도 색다른 기분이라며 말을 꺼냈다.
"고구려 유민들이 살아서 그런지 좀 다른 것 같아. 오빠네 고향이 깡촌이라고 했잖아. 마치 이런 분위기일 것 같아. 호호호" 날씨도 좋았다. 늦여름의 더위도 어느새 한풀 꺽이고 있었다. 방문객들이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싶어 2, 300미터 간격으로 고마신사(高麗神社) 라는 간판도 세워져 있었다. 30분 정도 걷자 웅장한 고마신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크고 멋있다. 물론 메이지 신궁이나 야스쿠니 신사에 비한다면 턱없이 작지만 동네 신사는 아니다. 수수하면서도 강인한 기운이 느껴진다. 경내까지 들어가는 길도 길었다. 보통 신사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 도리이(鳥居)의 수와 경내까지의 거리다. 메이지 신궁을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동의할 테다.
고마신사도 경내까지의 거리가 길었다. 백미터는 훨씬 넘었던 것 같다. 경내로 들어가는 길 양옆에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나무들 앞에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표지판이 서 있었다. 누가 식수했는지를 알려주는 셈이다.
빨리 경내로 들어가고 싶어 앞서 걸어가고 있는 나를 아내가 부른다.
"오빠! 오빠! 우와, 여기 나무들 엄청나다"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런데 아내의 다음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여기 봐봐. 나무 심은 사람 명단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오부치 게이조 이름이 있다니까" 그제서야 양 옆에 세워진 사람들의 이름을 봤다. 이런! 쟁쟁한 사람들 투성이다. 일본 정치계를 좌지우지했던 이들의 이름은 거의 다 보였다. 아내가 말한 고이즈미, 오부치 전 총리는 물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에 가네마루 신 등 자민당을 좌지우지했던 정치인들의 이름이 보였다.
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아내와 집에 돌아와서 조금 찾아보니 알 것 같았다. 고마신사는 이른바 '출세신사'였다. 일본의 신사는 각 신사별로 특색이 있다. 취직이나 취학을 기원하는 '합격신사',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안전신사', 물론 야스쿠니는 호국신사다. 즉 고마신사는 출세를 바라는 정치인들이 주로 찾는 '정치인 전용의 출세신사'였던 것이다.
나카소네, 하시모토 뿐만이 아니다. 조선총독부 통감으로 있으면서 일본동화 정책을 폈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 그리고 현 일본총리인 하토야마 유키오의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까지 이 신사에 참배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참 아이러니하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자로 불리는 약광(若光)이 세웠고 또 그의 위패가 안치된 고마신사에 쟁쟁한 일본의 정치인들이 참배를 올리면서 신사의 번영을 위해 식수까지 했다고 하니.
기념으로 나도 참배를 올렸다. 그때까지 신사에 참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때 처음으로 참배하는 내 모습을 보고 아내가 놀랬다.
"오빠가 참배하는 거 처음 본다. 웬일이래?"
"이 신사는 참배안하면 그게 더 이상한 것 같아서"
"그래? 그럼 나도 해야지" 아내의 참배는 꽤나 길었다. 뭘 빌었는지 물어봤지만 아내는 아무런 말을 안 한다.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안 말할 꺼야." 지금도 이때 아내가 뭐라고 기원했는지 모른다. 이번 에피소드를 쓰면서 아내에게 물어보자 아내는 당황해 했다.
"어? 그때 음... 아! 이런, 까먹었다! 그때 내가 뭐 빌었었지? 오빠, 몰라?""......-_-" 아무튼 이 1년간 아내와 나는 아마 책으로 쓴다면 몇 권 분량이 나올 정도로 다양한 동네여행을 경험했다. 또 몇몇 매체에 이 때의 동네여행을 기사나 엣세이 형태로 공개하기도 했다.
아내도 유산에 대한 아픔을 어느샌가 잊었고 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한류 붐이 불어왔던 시기다. 아내와 나는 일본방송에도 몇 차례 소개됐다. 한류 붐이 불기 이전에 결혼한 국제커플로 소개되는 와이드쇼, 그리고 한일간의 젊은이들이 서로간의 혼네(속마음)을 남김없이 말하는 토론 프로그램에도 불려 나갔다.
그런 와중에 어느 날 아침, 추석을 2주일정도 앞둔 일요일 아침이었다.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비분에 찬 목소리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너, 일본여자와 같이 산다며? 3년이나 있었으면 됐다. 나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당장 들어와!" 수화기를 든 채 멍하니 있는 내 모습을 본 아내가 상황을 알아챘는지 금세 침울한 표정으로 변한다. 아무 말 없이 말이다.
그런 아내에게 조용히 다가가 손을 꽉 쥐면서 말했다.
"같이 가자. 설득할 자신 있어" 그리고 2주 후 아내는 처음으로 마산 시댁을 찾았다.
■ 7부 "어머니의 갈라진 손, 아내의 앞치마"
■ 글쓴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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