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마와의 그 이후
하루마는 그가 선언한 대로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땄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시 연인이 되는 일은 없었다.
자주 메일을 주고 받고, 학교에서 만나면 서로 웃어주고 인사하는 사이였지만, 그가 내게 다시 사귀자는 말을 하지도 않았고, 나도 적절한 선을 유지하는데 만족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해 얼마나 흥미를 느끼느냐에 달려있다. 미유끼가 사이에 끼어있던만큼 난 미유끼에게도 지쳐있었지만, 하루마에 대해서도 지쳐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20대 초반엔 연애 말고도 해야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느 대학은 들어가기 힘들고 나오기 쉽다는데, 게이오 대학 후지사와 캠퍼스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매일처럼 나오는 리포트 과제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어학수업까지.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후지사와 캠퍼스가 도쿄를 마다하고, 에노시마섬 근처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도시의 유혹에서 벗어나 공부를 하라, 는 의미 말이다.
하루마와 헤어진 후, 난 몇 번쯤 더 연애를 했다. 연극 동아리 선배, 줄곳 내 논문을 봐주고 끈질기게 연락을 취해오던 남학생, 밴드 보컬시절 우리 밴드의 팬이 되어준 남자…….. 그렇게 연애는 열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하루마가 가장 특별한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첫사랑이라기엔 좀 늦은 감도 있지만, 중고시절 느꼈던 첫사랑이란 감정과는 좀 다른, ‘연인’이란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헤어진 이후에도 유일하게 연락하는 남자도 하루마였고, 아마 내가 먼저 다가갔던 게 하루마가 처음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졸업 후, 그는 오사카의 회사에 취업을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그가 보내온 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책을 하다가 예쁜 단풍잎을 보았다던가, 공원에서 만난 초등학생들의 재치에 관해, 오사카란 지역의 특성에 관해 그는 꽤나 긴 메일을 보내오곤 했다.
참, 미유끼에 관해 덧붙여두자. 그녀도 지금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다. 가끔 내게 연락을 취해오기도 한다. 그래도 난 여전히 그녀가 무섭다. 왜냐면 그녀의 블로그엔 지금도 내가 나쁜 여자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인연은 참 질기고도 섬뜩하다. 그렇다고 끊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일본남편과 결혼하기까지>의 소재로 하루마를 잡은 것만 봐도, 그가 내게 있어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단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 인연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결혼은 타이밍이다1-우연한 만남
돌이켜보면 내 연애상대는 늘상 일본인이었다.
일본인이 좋아서 일본인과 사귀었던 건 아니다. 한국인이 거의 없는 일본의 대학에 다녔고, 일을 시작하면서도 한국인보다 일본인 사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한국 남자를 만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한 결과였다.
한국남과 일본남이 어디가 다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아니, 한국남은 다 드라마 속 주인공 같냐는 질문을 더 많이 받는다. 솔직히 한국남을 그다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겐 적절한 데이터가 없다. 근데, 뭐 그리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일본 남자도 개개인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고, 한국 남자도 그럴 것이 분명하니까.
2002년 여름. 한일은 월드컵 열기로 달궈질만큼 달궈져있었다. 정확하게 그 무렵이었다. 대학 동창 다이스케(가명)에게서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있잖아. 생각나? 쇼타(가명)말야. 미국에 갔다가 거기서 만났어.'
다이스케에 따르면, 연극 동아리 동창인 쇼타와 미국에서 우연히 재회했다고 한다. 그것도 뉴욕이나 로스엔젤리스처럼 대도시가 아니라 텍사스의 산안토니오에서.
다이스케는 학회에 발표를 하러 산안토니오를 방문했고, 쇼타는 취재차 산안토니오를 찾았던 것이다. 쇼타가 밥을 먹고 있는 식당, 같은 시각 다이스케도 밥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이었고 다이스케는 “이것도 인연인데 오랜만에 밥이라도 먹자”며 메일을 끝맺었다.
쇼타라구? 아, 쇼타!
알프레드 히치콕의 <특수촬영비법>. 그걸 아직 돌려주지 않았어. 대학시절 그에게서 빌린 수만엔짜리 책이 내 책장에 자리하고 있단 사실이 맨 처음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쇼타는 두달쯤 연극 동아리에 있던 남학생이었다. 그는 연극 동아리에서 밥을 먹을 땐 늘 내 앞자리나 옆자리를 차지했는데, 그래서 조금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한번은 그가 쓴 극본으로 내가 연출을 맡은 적이 있어서, 조금쯤 친해지기도 했다.
연극 무대에 서겠다는 포부로 가득한 끼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늘 묵묵했다. 그에겐 서늘한 하우라가 넘치고 있었다. 그는 과묵하고, 솔직했다. 근데 솔직하단 사실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는 ‘하얀거짓말’조차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자기 대본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해석을 제대로 못한 배우들에겐 철저히 공격적이고, 냉정했다.
"그 대사는 쓸데가 없어."
"네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과장이야."
너무 솔직해서, 그래서 꼭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고, 그가 두달만에 연극 동아리를 그만두자, 배우들은 거의 환호성을 지르다시피 했다.
근데 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에겐 남들이 잘 모르는 자상한 부분도 있었다. 내가 하루마와 미유끼로 인해 고심하고 있을 때, 내 이야기를 들어준 건 다름 아닌 쇼타였다.
그뿐이 아니다. 쇼타는 우리 연극동아리 공연중, 내가 출연했던 공연엔 늘 얼굴을 비춰주었다. 가끔 같은 체육 수업을 듣기도 했고, 가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값싼(일본에서 패밀리 레스토랑은 저렴한 가게로 인식된다:필자) 음식을 시켜놓고 영화론을 떠벌이기도 했다.
내가 어찌 그를 잊을까. 내가 하루마와 사귀던 시절, 쇼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니가 아니면 안돼, 그러니까 나와 사귀자."
이렇게 쓰자니 너무나도 쑥스럽지만, 그런 시절도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다이스케의 메일을 통해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했다. 연구직에 취직한 다이스케가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버렸고, 덕분에 쇼타와 조금 더 시간을 같이 할 수 있었다.
쇼타는 여전히 과묵하고, 냉정한 성격이었지만, 회사에 다니면서 많이 둥그래졌는지, 이젠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히치콕의 책, 아직도 나한테 있어.”
난 그말을 하지 못했다. 돌려주고 싶었지만, 이제와서 그말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우린 자주 만나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저녁을 먹기도 했다.
결혼은 타이밍이다 2
“자전거를 탈 줄 몰라.”
자전거를 못탄다는 내 말에, 쇼타는 다음날 자전거를 사서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집 앞 공원에서 자전거를 가르쳐줬고, 한 시간도 채 안되어 자전거를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어, 별 거 아니었잖아.”
그는 웃을 따름이었다. 그는 늘 그랬다. “응” “아니” , 그가 하는 말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대신, 그는 적절하고, 확실했다.
자전거를 타고 싶다면, 자전거를 사서 가르쳐줬고, 수영을 못한다면 바로 수영장으로, 스키를 타겠다면 스키장으로 데려가는 성격이었다. 말대신 행동으로 옮겨주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듬직해보였다. 그걸 빼면 그는 심심한 남자였다. 뛰어난 유머감각도 없었다. 그치만, 그는 말을 아꼈고, 말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믿어.”
그는 그런 로맨틱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네 자신을 믿어, 그럼 돼.”
그는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장녀로 자라, 일본에까지 와서, 내 길만을 걸어왔던 나에게 '네 자신을 믿어'란 말은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 참으로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어느새 4년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 사이 캐나다 유학도 다녀왔다. 그치만 결혼을 생각하지는 못했다. 내겐 가정에 대한 동경도, 결혼에 대한 환상도 없었다. 그도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참 많이도 변해서 결혼을 안한들 지장이 없어보였다.
2009년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70%가 결혼을 안해도 된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결혼? 그게 별건가. 꼭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평생 연애나 하면서 살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를 우린 나스에서 보내기로 했다. 야마나시에 잠시 들렸다가 나스로 가던 길, 화장실에 가고자 고속도로 휴게소를 찾았다. 그게 결혼의 타이밍이란 사실을 우린 그 땐 당연히 몰랐다. 그의 부모님도 크리스마스를 나스에서 보냈고, 그날 그 휴게소에서 우리 모습을 보셨단 거였다.
한국 부모님 같았서도 우리를 보고 그냥 조용히 가셨을까? 쇼타의 부모님은 소리 소문 없이 가셨다가, 도쿄에 도착한 이후, 며칠이 지나서야 연락을 주셨던 것이다.
지금도 변함없으시다. 가까울 수록 예의를 지키고 피해를 주지 말자는 게 일본인인듯 싶다.
아들과 부모 사이에도 지켜야할 예절이 있는 것이다. 결혼 후 4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우리집에 오실 때는, 우리집이 일본왕실인 것도 아닌데, 한달 전에 전화로 예약을 하시고, 찾아오신다.
당일에 몇 시에 도착하시며 식사는 밖에서 드실 건지, 집에서 드실 건지 의향을 밝히신다. 거기에 맞춰 준비하면 되고, 갑작스레 찾아오시지 않기 때문에 며느리로서는 매우 편하다. 청소 안해놓은 걸 들킬 염려도 없고…….
good timing? 혹은 bad timing? 여하튼, 운명의 무언가가 우리와 그의 부모님을 연결시켜 준 것만은 분명했다. 그의 부모님은 쇼타에게 나를 데리고 인사를 하러 오라 하셨고, 난 긴장은 했지만 별 생각없이 인사를 드리러 갔다.
“내일이면 서른인데 결혼은 안할 거야?”
그의 아버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어 정말 서른이 코앞이야. 그도 나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결혼 자금도 안 모였구요.”
내가 먼저 대답했다.
“결혼 자금은 우리가 내니까 그런 건 걱정 안해도 돼요.”
그의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어머님의 식탁은 깔끔하고 따스했다. 냄비 속에선 스키야키가 김을 내고 있었고, 각자의 접시에 담긴 빨간 참치 회도 맛나 보였다. 허브가 듬뿍 담긴 샐러드도 마음에 들었다. 식사나 즐기면 될 것을, 내 머릿 속은 결혼이란 단어에 당황했는지, 뭔가를 말해야겠다 싶어 어쩔 줄 몰라했다.
“저, 근데…….”
당돌하게도 내 입은 조잘거리고 있었다.
“저, 아버님, 근데, 좀 살아보고 해야겠어요. 한달만 시간을 주세요.”
라고 말이다. 참으로 당돌하게도.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무려 4년을 만나오지 않았던가. 술을 마시지 못하니 술먹고 주정 부리는 일 따윈 없었다.
무슨 일이 있든 내 의견을 존중해줬고, 일 때문에 많이 바빠서 연락을 자주 취하지는 못했지만, 일이 끝나면 바로 데이트 신청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좀 살아봐야지 싶었다. 이 남자의 감춰진 가면을 다 봐야만 해.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다구.
결혼. 그게 환상이 아니란 걸 어렴풋이가 아니라 확실하게 난 알고 있었다. 내 주변엔 결혼을 하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보단, 결혼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더 많았고, 이혼한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기 전엔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연애할 땐 몰랐는데…….”
그런 후회를 피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동거’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의 부모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의 부모님은 아마 많이 놀라셨을 텐데, 그런 내색도 않으시고, 그러라고 하셨다.
같은 집에 사는 한달. 그는 변함없이 일 때문에 바빴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 수두룩했지만, 나 역시도 회사원이었기 때문인지 그리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과묵하고 솔직했고, 20살부터 혼자 살아서였는지 가사에 있어선 나보다 한 수 위였다. 누가 밥을 하느냐, 누가 청소를 하고, 누가 쓰레기를 버리느냐. 아무 탈없이, 별다른 규칙같은 걸 정하지 않고도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내가 먼저 챙겼고, 어느 날은 그가 먼저 챙겼다. 우리에게 있어, 가사란 귀찮은 일거리라기 보단,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 해야 마땅한 당연지사라 인식하고 있었다.
딱 한달을 같은 집에서 지내고, 우린 그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예, 결혼하겠습니다."
(7부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