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놈들아! 이게 뭐야. 재판장 다시 나와! 나오라고!!" 여운택(85) 씨의 노기어린 고성이 텅빈 재판정 안에 울려 퍼졌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시민연대의 신일본제철 소송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16일 1심 판결(도쿄지방재판소 민사3부 522호 법정)이 내려진 '한일회담 외교문서 전면공개' 재판의 원고이기도 하다.
2008년 4월 23일, 한국측 원고 3명과 일본측 원고 7명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일회담문서를 전면공개하라는 소송을 냈다.
일본정부는 2006년 8월 17일부터 2008년 5월 9일까지 6차례에 걸쳐 6만페이지에 달하는 한일회담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하지만 일본측이 공개한 문서는 25%에 해당하는 분량이 먹칠된 상태로 나왔고, 특히 독도에 관한 문헌자료(문서번호 137)는 공개조차 되지 못했다.
'감추어진 25%와 외무성이 작성한 독도에 관한 문헌자료의 공개'가 이번 재판의 쟁점이었다.
▲ 재판에서 패소한 뒤 세이료 회관에서 열린 보고집회에서 공탁금, 후생연금 등의 자료를 보여주면서 울분을 감추지 못한 여운택 씨. 오른쪽 아래는 최봉태 변호사다. ©박철현/jpnews | |
16일 오후 1시 20분. 법정대기실에서 만난 한국측 원고단 최봉태 변호사와 이금주(90) 씨, 여운택 씨의 표정은 괜찮아 보였다. 최봉태 변호사는 "지난번 결심(結審)에서 재판장이 한 말도 있으니까"라며 "지켜봐야 겠지만 가능성도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 변호사가 언급한 '재판장의 말'은 다음과 같다.
"먹칠된 부분의 내용이 어떤지 나도 모르는 상황이라 판결내리기가 상당히 어렵다. 일본 외무성이 일본측 문서 뿐만 아니라 한국문서까지 먹칠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야기 가즈히로 주임재판관) 즉 판결을 내려야 하는 재판장이 이런 말을 했을 정도니까 어느 정도는 기대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대는 불과 12초만에 깨졌다. 야기 재판관은 법정에 들어서자 마자 "원고측의 요구는 전면기각한다. 재판비용은 원고측이 부담한다"는 12초짜리 판결문을 낭독하고 퇴장했다. 방청석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지금 끝난거야?"
"어이! 재판장!!" 판결이유에 대한 설명없이 끝나버린 재판에 원고단도 참아왔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여운택 씨는 "재판장 나와! 이 자식들아! 그 돈이 어떤 돈인데!!"라며 목청을 높였다. 여운택 씨는 <제이피뉴스>의 취재에 이렇게 말했다.
"억울하고 분해서 죽고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이건 재판도 아니고 강제적인 명령이야. 명령. 무슨 이런 재판이 다 있어! 일본은 민주주의 나라가 아냐. 나쁜 놈들!"
▲ 이금주 씨도 일방적으로 판결을 내려버린 재판부를 비판했다. ©박철현/ jpnews | |
이금주 씨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재판이 아냐. 동물의 재판이야. 22년간 싸워 오면서 별의별 경험을 다 했지만 이런 강제적인 재판은 처음이야. 무엇 때문에 그런 판결을 내렸는지 그 이유를 말해줘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최봉태 변호사는 "즉시 항소할 것"이라며 "비공개된 독도자료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에서 공개된 자료는 공개하라는 판결이 내려지지 않을까 했는데 전부 기각한다고 하니까... 아무튼 법정싸움과는 별개로 다른 방식도 구체적으로 연구해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오늘 재판이 패소했을 경우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또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양한 외교적 채널을 가동시키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일본에서도 공개요구모임을 중심으로 오카다 가쓰야 외무성 장관에 직접 건의하는 방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한다" 판결이 끝난 이후 나가타쵸 인근의 세이료회관에서 열린 보고집회에 참석한 원고측 변호사 히가시자와 야스시 씨는 "판결문을 받아왔다. 딱 100쪽짜리다. 50페이지가 판결 내용이며 나머지 50페이지는 우리측과 저쪽의 주장, 논거자료를 정리한 것"이라며, 재판부의 판결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한국정부가 공개한 문서를 토대로 (일본측의) 비공개부분을 '추측'하는 것과 행정문서의 정보가 전면적으로 '명확'하게 공개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아직 국교 정상화가 안된 북한과의 외교 교섭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공개하기 힘들다고 한다. 특히 독도문제에 관해서도 문서공개로 말미암아 나라에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히가시자와 변호사) 즉 재판부는 15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자료가 전부 공개되는 순간, 장래에 있을 북일국교정상화에서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할 지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자료(한국측)가 이미 공개돼 있다. 북한은 일본측 자료가 아니라 한국측 자료를 통해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일본정부가 감춘다고 해도 별로 의미가 없다. 재일동포 3세 장계만 변호사가 지적한다.
"이번 판결문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일본은 사법기관이 행정부(일본 외무성 등)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판결자체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근거가 빈약하다.
언제 할지 아무도 모르는 북일국교정상화를 근거로 기록을 공개할 수 없다는 것도 그렇지만, 먹칠된 부분을 제외하면 한국측 문서와 전부 일치하는 부분도 많다. 그런 부분을 '추측'과 '명확'이라는 추상적 단어를 동원해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전면기각의 판결을 내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고 본다" 일례로 한국이 05년 8월에 공개한 제5차 예비회담 예비회의 일반 청구 소위원회 회의록의 자료를 보자. 여기에는 조선전업주식회사, 경성전기주식회사, 농지개발영단 등 일본기업의 이름이 전부 공개됐다.
반면 일본측 자료는 이들 기업명이 먹칠된 상태로 나왔다. 그런데 먹칠된 부분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부분이, 심지어 양측 대표단이 나눈 가벼운 인사, 대화마저 전부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부의 '추측'이라는 발언은 설득력이 없다.
▲ 재판후 열린 보고집회에서 100페이지에 이르는 판결문 중 주요부분이 언급되기도... ©박철현/jpnews | |
▲ 원고 패소 판결을 받은 1심 판결문 중 일부. ©박철현/jpnews | |
공개요구모임의 고다케 히로코 사무국장은 "하토야마 정권은 정보공개에 적극적이고 또 얼마전 오키나와 핵밀약도 공개해서 기대를 했었는데 한일회담 문서공개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다"며 현 정권을 비판했다. 이양수 사무차장도 "의미가 없는 부분까지 감추는 이유도 모르겠고 판결도 이해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집회에 참석한 어떤 이는 "법무대신 지바 게이코, 외무대신 오카다 가쓰야를 상대로 재판을 벌이다니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 놓는다.
지바 법무상은 사민당 출신의 민주당 참의원으로 공개요구모임의 구성원들과 함께 자민당 정권의 은폐체질을 비판하며 같이 투쟁했던 인물이다. 오카다 외무상 역시 현 내각대신 가운데 가장 정보공개에 열성적이다.
그는 "법정싸움보다 그냥 오카다 외무상을 직접 만나 제대로 말하면 '그런 불필요한 싸움을 왜 하고 있냐'며 뭔가 조치를 내려주지 않을까 기대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안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아사히신문>, <도쿄신문> 등 일본 매스컴도 이 재판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도쿄신문>은 "변하지 않는 비공개 체질"(특별보도부 사사가세 유지 기자)이라는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박아 눈길을 끌었다.
이 신문은 다카사키 소지 쓰다주쿠 대학교수의 입을 빌려 "식민지 지배 청산문제의 화근을 남겨놓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일교섭 경위를 밝혀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