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재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읽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읽어보실 독자님들은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전12화)를 먼저 읽으신 후 제2부 '일본 아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다'를 읽으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일본 여친 프로포즈 시리즈혼인신고 (1부)삼겹살(2부) 결혼하고 8개월쯤 지났을 때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2003년 3월이 된다.
아내는 변함없이 부동산 회사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고, 나 역시 게임회사에서 하루 걸러 철야하는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출시 막바지였다. 게임회사에 다녀봤거나,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갈 것이다. 회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졸음을 쫓기 위해 정체가 불분명한 알약을 먹었고, 커피는 그릇 사발로 나왔다. 저녁 6시에 커피 사발을 스탭들에게 건네주고 "그럼 수고들 하세요!"라고 밝게 웃으며 퇴근하던 경리 아가씨가 어찌나 밉던지.
게다가 내가 참여하고 있었던 ps2 전용 게임 소프트웨어 'shogo hamada omr-over the monochrome rainbow'는 시뮬레이션 어드벤쳐 게임이었다. 어드벤쳐 게임의 수만갈래 플래그를 일일히 체크하는 건 엄청난 중노동이다.
지금도 축 쳐진 뱃살을 보면 그 때가 생각난다. 디버깅 작업에 들어가기 전만 하더라도 54kg을 유지하고 있었던, 신교대 조교 출신의 쭉 빠진 몸매를 자랑했던 나였다. 하지만 3개월간에 걸친 '커피 사발'과 수십 종류의 초컬릿을 결국 이기지 못했다. 이러다간 스모 선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을 때 내 체중은 15kg이나 늘어나 있었다.
여기 계속 다니면 또 이런 작업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압박에 못 이겨 3월 중순 소프트웨어가 출시됨과 동시에 대표를 직접 찾아가 그만둔다고 말했다. 대표는 처음엔 말렸지만 내 의지가 워낙 완강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 그렇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요번 주까지는 나와서 인수인계 하고. 앞으로도 근처에 오면 놀러 오고..."
"네. 잘 알겠습니다."
"아참, 그런데 부인하고는 잘 생활하고 있나?"
"네. 집에 잘 들어가지 못해서 그렇지만 들어가면 웃음꽃이 피지요"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는 (결혼했다고) 말했어?"
"아뇨. 고민이예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머니가 좀 보수적이시라..."
"그래?... 음. 알았어." 그때 대표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워낙 흉중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인수인계도 순조롭게 끝나고 소프트웨어도 '하마다 쇼고'(浜田省吾, 일본의 록가수로 게임의 모티브가 된 인물)의 극성팬들이 구입해 줘 어느 정도 팔렸다. 덕분에 마음은 홀가분했다.
게임회사에서의 마지막 날, 자리정리를 말끔하게 끝낸 후 작별인사를 위해 대표를 찾아갔다. 대표는 말없이 서랍속을 열더니만 "그동안 수고했다"며 10만엔이 든 돈봉투를 주셨다. 아, 통도 크셔라. 그간의 시발, 아니... 사발 커피와 다량의 초컬릿과 정체불명의 알약에 대한 원한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낼름 챙기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대표가 뒷전에 대고 말한다.
"아참, 그거 있잖아. 그냥 껴안아 버리라고 해"
"네?"
"니네 부모님 만나러 갔을 때 말야. 부인이 말도 안 통할 거 아냐. 그러니까 그냥 만나자 말자 껴안아 버리라고. 지난 며칠간 계속 생각해 봤는데, 역시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아...네...-_-" 대표도 참 별난 사람이다. 발매된 직후니까 어느 정도 시간적인 여유는 있었을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두는 사원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온 정신을 다 쏟다니. 짐정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돈봉투를 건네 줬다. 슬쩍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나는 착했다.
결혼식 축의금 2만엔 때문에 조금은 토라져 있던 아내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역시 돈의 힘은 삼겹살만큼 대단하다. 아니 돈이 있어야 삼겹살도 먹을 수 있다. 아니나다를까 아내는 8만엔을 통장속에 끼워 넣고 나머지 2만엔을 내밀면서 말한다.
"내일 삼겹살 먹으러 가자!" 2만엔치 삼겹살을 먹자는 저 무대포 정신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삼겹살에 흥분해 버린 아내에게 농담삼아 대표의 '포옹 시나리오'를 들려줬다. 당연히 콧방귀나 뀌겠지 했는데, 이런! 아내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한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껴안아 버리면 어떻게 되는데? 한국에선 껴안는 거 괜찮아? 외국영화보면 자연스러운 거 같던데... 어머니가 놀래지 않을까?" 당연히 놀래지 그걸 말이라고. 생판 처음 보는,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아가씨가 갑자기 와락 껴안아 온다고 생각해 봐라. 게다가 우리 어머니는 촌동네에서 20년이상 생선장사만 해 온 50대 시골 아주머니다. 놀래다 못해 쓰러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아내는 진지하다. 그러고 보니 대표도 진지했다. 둘 다 한국의 풍습을 잘 모르니까 '말이 안 통할 때는 스킨쉽이 가장 좋다'는 진리를 떠올렸던 모양이다.
아내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이내 풀이 죽는다.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자신있게 말을 못하는 나를 책망할 법도 한데, 아내는 절대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나중에 모든 것이 다 해결됐을 때 아내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도 처음에는 오빠가 왜 한국 부모님들께 당당히 말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지. 근데 사실 내가 결혼하자고 해서 한 거잖아?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선 말을 못 꺼내겠더라고. 오빠도 힘들텐데 괜히 닦달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아내와 부모님과의 만남은 금세 이루어졌다. 전화통화였고, 그 대상도 아버지뿐이었지만 '만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내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아버지는 아내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고, 동거사실도 눈치챘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 무엇보다 극적인 '만남'일지도 모른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삼겹살을 먹은(물론 2만엔 전부 쓴 건 아니다) 다음날 '디리링 디리링' 전화벨 소리가 들려 왔다. 잠결이었던 나는 이불속에서 그냥 뮝기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집 전화로, 그것도 일요일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는 거의 100% 아내를 찾는 전화이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내가 일본어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의 동기 몇 명과 게임회사 직원, 그리고 처갓집과 아내 친구들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어학교는 2002년 9월에 그만 두었고 게임회사도 일요일에 집 전화로 연락하진 않는다.
그래서 처갓집, 혹은 아내 친구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거실로 나간다. 수화기를 드는 소리와 함께 '모시모시'(여보세요)가 문 저편에서 어렴풋이 들려왔다. 잠시후 벼락같이 방문을 여는 아내.
"오빠! '아버지'가 그 '아버지' 맞지?"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아내는 '오빠'와 '아버지'만 한국어를 썼고 나머지는 일본어를 썼다. 게다가 잠결이다. 기묘한 언어조합에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아내의 볼이 발갛다.
"아버지야. 아버지. 오빠네 아버지!" 이 무슨 자다가 옆차기 하는 소리란 말인가. 마산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여기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해 왔다는 것인지 처음엔 이해가 안 갔다. 용건이 있다면 핸드폰으로 걸어왔던 아버지다. 갑작스레 집 전화로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온다는 건 백번을 양보해도 불가능했다.
"에이, 자기가 잘못 들었겠지"
"빨리 받아봐. 내 귀엔 아버지라고 들렸어" 거실로 나가 수화기를 들었다.
'뚜- 뚜- 뚜-'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정말 아버지였어? 말투가 어떻던데?"
"음. 표준어는 아닌 것 같고...누군데? 아니 '니눈데?' 아! 모르겠다. 암튼 '현아 아버지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어. 두번이나"
"어? '니눈데'라고 했어?"
"어. '니눈데'라고 했던 것 같아" '니눈데'는 경상도 사투리로 "너 누구냐?"라는 의미다. '니눈데'라는 말을 아내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조금은 두려워졌다.
'따르릉 따르릉'
순간 고개를 돌렸다. 아, 집 전화가 아니다. 이번엔 내 핸드폰이다. 액정에 '통지불가능'이라는 표시가 뜬다. 지금은 발신자 번호가 뜨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해외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통지불가능' 메시지가 떴었다. 즉 한국에서 걸려 온 전화일 확률이 아주 높다.
'꿀꺽'. 아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침을 삼켰다. 조심스레 핸드폰 플립을 열었다.
"여보세요?"
"내다" 바로 자기소개에 들어가는 둔탁한 저음의 경상도 사투리. 그렇다. 아버지였다.
"아...아버지 어쩐 일로..."
"니 지금 어디고?"
"아, 여긴 지금 살고 있는 집이죠"
"이상하네. 내가 좀전에 니 집에 전화했었는데 어떤 일본여자가 받던데..."
"어? 무슨 말이신지...(-_-;;;;;)"
"니 집 전화번호가 81번 누르고 뭐라뭐라뭐라 맞지? 용식이라고 니 학교친구였다는 애가 가르쳐 주더라" 아! 그제서야 비밀이 풀렸다.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던 친한 일본어학교 동기가 8월달에 한국에 귀국할 때 마산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받기 전이었다. 당연히 나도 귀국할 예정이었고 용식이란 친구는 내가 한국에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친구가 마산에 들른 김에 나를 만나려고 연락을 해 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런 전후사정을 전혀 몰랐다. 설상가상으로 용식이는 "철현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아버지한테 "어? 학교 등록 안했을 건데... 걔 비자는 어떻게 한대요?"라고 말했다. 젊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10년을 체재했던 아버지다. 비자나 불법체류등에 대해선 아주 잘 알고 계신다.
아버지는 용식이와의 통화를 끝내고 즉시 용식이가 알려준 이쪽 집 전화번호 다이얼을 돌렸던 것이다. 그런데 웬 일본여자가 갑자기 '모시모시'하고 있다. 누가 봐도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시츄에이션이다.
"아, 그랬군요. 게임회사 다녀서 비자는 걱정없구요(미안합니다 아부지). 용식이는, 그래...잘 있대요?" 애써 화제를 돌려보지만 아버지가 또 이런 데는 귀신 뺨치는 눈치를 자랑한다. 게다가 경상도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직설적이다. 스트레이트로 치고 들어오는 건 아버지의 주특기다.
"그래. 잘 있단다. 암튼 그 옆에... 일본여자 한번 바꿔봐라"
"아...그, 그게..."
"엄마한테 말할까?"
"아! 아뇨. 아뇨. 바꿔 드릴께요" 수화기를 아내에게 건넸다. 분명 난 울상이었을 테다. 아니 어쩌면 울고 있었을지 모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내도 울상이었다. 분명 아내의 심장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을 테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든 아내는 조심스럽게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이런... '아/버/지'라니. 늘어나는 내 손짓과 발짓만큼 아내의 표정은 거꾸로 침착해져 갔다.
"저는 다카하시 미와코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국어 교실에서 배운 몇 안되는 단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여자는 강하다. 아니 강했다. 원래 페미니스트였던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경상도 남자의 피가 흐르니까. 하지만 아내를 만나면서 여자를 존경하게 됐다.
▲ 아이들 이야기는 '시즌3' 에서 계속될 것이다. 사진은 큰 딸 미우가 태어난지 6개월이 지난 2006년 7월에 찍은 것임. © 박철현 | |
아내가 큰 딸 미우를 직접 낳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을 때도 그랬지만(시즌3에 아마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 이전부터 위기상황에 처했을때 아내는 오히려 냉정함과 침착함을 발휘했다. 강한 여자다.
대화는 금세 멈췄다. 아내가 도와달라는 듯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조심스럽게 수화기 반대편에 귀를 갖다 댔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둔탁한 저음의 아버지가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거의 웃지 않는 당신이 '허허허' 거리면서 아내가 전혀 못 알아들을 '경상도 사투리'를 내뱉고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가 아버지의 신조다. 국제전화비가 아깝다고 전화도 거의 안 거시는 분이 생판 처음 보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여자한테 뭐가 그리 좋은지 너털웃음까지 지어가며 즐거워 하시는 걸까?
아내는 "호호호, 네", "호호호, 네. 알겠습니다", "호호호, 네"만 반복했다. 아내의 '아이즈치(相づち, 상대방의 말에 동조하는 추임새나 간단한 답변들)가 좋았던 걸까? 아버지는 그토록 아깝다는 '국제전화비'와 '용건만 간단히'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2,3분쯤 지났을까? 아내가 sos 신호를 보내왔다. 완전 울상이다. 도저히 힘들어 안되겠다는 심정이 일그러진 표정 속에서 전해져 온다. 수화기를 뺏었다.
"아버지!"
"허허허, 그래서 우리 아들이...... 응? 너냐?"
"네"
"아......그래"
"......"
"......끊는다. 전화비 많이 나온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나저나 그 애 한국어 잘 한다. 신기하다 신기해..."
"네?" '딸칵, 뚜- 뚜- 뚜-'
아버지는 어느샌가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오늘의 용건은 결국 '아내가 한국어를 잘 한다'는 것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아내를 쳐다봤다. 아내는 무언가 모를 뿌듯함과 떨림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듯 했다. 아내가 내 손을 덥썩 잡더니만 속사포를 쏘아댔다.
"뭐래, 뭐래? 아버지가 뭐래? 나 한마디도 못했는데, 뭐라고 그래? 응? 빨리 빨리!"
"어? 어... 자기 한국어 잘 한다고 하네"
"어? 한국어?"
"응"
"그거 말고 딴건? 응? 딴 건 뭐라 그래?"
"그게... 그 말만 하고 끊었어"
"어?! 그래?"
"응"
잠시 정적이 흘렀다. 결국 이날의 통화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사실 통화내용은 지금도 베일에 싸여 있다. 2004년 추석때 아내와 함께 처음으로 마산에 갔을 때 아버지는, 적어도 아내에게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던 이 전화통화 내용은커녕 당신이 전화를 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면서 "내가 그런 전화를 했었나? 모르겠다"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물론 아내도 모른다. 한국어 공부한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을 뿐더러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다. 알아들을 리가 없다. 아내는 그냥 '예, 예'라는 답변만 실없이 웃어가며 반복했을 뿐이다.
아무튼 이 통화 이후로 아내는 무척 밝아졌다. 룰루랄라 혼자서 실없이 웃기도 하고 한국어 공부도 더욱 열심히 했다. 갑자기 물어오기도 했다.
"오빠! '오늘은 늦게 마쳐요'를 사투리로 뭐라 그래?""오늘 늦을 꺼 같은데예""푸하하! 그거 진짜 웃기다. '예'가 뭐야. '요'지""......-_-" 그렇게 즐거워하는 아내를 보고 있노라니 '아버지의 권력은 거의 제로(0)에 가깝다'는 사실을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다만, 나역시 근 2년간 우리의 동거를 비밀로 해 주신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든위크'(4월말부터 5월초까지 약 일주일 정도 쉬는 일본의 연휴기간)가 다가왔다. 나는 신문사로 직장을 옮겼다. 처음으로 직업기자의 세계에 발을 담갔다. 생활자체는 이전과 비슷했다. 한국의 기자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나는 매일같이 철야를 하면서 기사를 써 댔다. 물론 정체불명의 알약은 먹지 않았지만.
4월 한달간 힘들게 일을 하니 신문사 대표가 골든위크 때 5일간 쉬라는 명령을 내린다. 아마 3일정도 밤샜던 것 같다. 오래간만에 귀가하자 아내가 봉투를 꺼낸다. 돈봉투라고 보기엔 너무 두껍다. "뭐냐"고 물어봐도 아내는 마냥 웃을 뿐이다.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두 사람 분의 '서울행 왕복티켓'이다. 내 이름과 아내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아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한테 말하면 뭐라고 할까봐서 그냥 끊었어. 서울만 다녀오자. 마산은 안 가도 돼. 오빠하고 꼭 가고 싶었거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inchon, korea'라고 적힌 티켓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소리내어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리 강한 척 해도 외로웠던 것 같다. 아내는 울고 있는 나를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안아 주었다.
2003년 4월 29일, 우리는 서울로 떠났다. 그리고 아내에게 있어 '한국'이란 나라는 놀라움과 흥분과 경악이 공존하는 '환타지월드'가 되어 버린다.
■ 4부 "어쩌면 번데기를 저렇게 발랄하게" ■ 글쓴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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