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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석의 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를 말한다(6)
예상치 못한 여학생과의 언쟁이 계기, 우에무라 기자 연구 시작
 
강명석

일본어 스피치 대회가 끝나고 며칠 뒤 학교 식당에서 벌어진 일이다. 같은 서클의 한 여학생과 우에무라 사건에 대해 사소한 언쟁을 벌였다. 그녀는 나에게 우에무라 다카시 비상근 강사의 기사는 명백히 날조이며, 아사히신문 역시 ‘오보’임을 인정했다고 말한 것이다.

 

몇차례 냉랭한 말이 오고 갔다. 나는 내심 당황했다, 여학생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 당시에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사히신문이 선생님의 기사를 오보라고 인정했다고?’ 물론 나는 우에무라 선생님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나는 그녀의 논리의 출처와 배경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황이었다.

 

평소 아주 조용해 보였던 이 여학생은 나와 같은 ‘Hi-C’라는 이름의 국제교류 서클 소속이었다. 그리고 그 식당에서의 말다툼이 있기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얘기다운 얘기를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었다. 아마 ‘위안부’라는 논쟁거리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 날도 각자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조용히 식사를 마쳤을 것이다.

 

이 언쟁은 식사 도중 나의 스피치 내용이 화두에 오른 것으로 시작되었다. 호쿠세이 대학교의 연례행사인 일본어 스피치대회는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공개된 이벤트여서 일반 학생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국제교류를 표어로 내걸고 ‘유학생과 친구 되기!’를 주요 활동으로 삼는 Hi-C 친구들과 함께 하는 점심식사 자리였기 때문에 한 멤버가 내 스피치 테마가 무엇이었는지 물어온 것이다.

 

나는 조금 망설였지만, 친구들에게 이 대학교의 비상근강사인 우에무라 다카시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일본인과 역사문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언제나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 내 관점을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지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대와(특히 다수와) 대화하는 일은 항상 불안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유난히 관심을 보인 이 여학생이 나에게 세세한 내용을 질문하더니, 앞에서 말한 것 같은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금새 테이블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주변의 다른 서클 친구들이 우리 둘 사이의 기류를 알아차리고는 내심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분위기를 깨트리기가 싫어 말을 아꼈다.

 

회상해보면 당시의 나는 꽤나 흥분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고 싶은 말이 열이 있어도, 무엇 하나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언어의 장벽을 절실하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지식의 부족함도 아울러 깨닫게 된 날이기도 했다. 우에무라 교수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당시 나 자신이 논리적으로 무장할 지식이 너무도 부족해서 억울한 마음을 삼켜야 했다. 

 

그래도 이 때의 경험은 이후 내게, 당시의 ‘우에무라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이후 나는 우에무라 사건과 관련된 당시의 일본의 사회 배경을 정리하는 것을 테마로 졸업 논문을 쓰게 된다.

 

지금부터 ‘우에무라 사건의 내막’에 대해서, 그리고 위 여학생이 ‘아사히신문의 오보 인정’의 출처에 대해 내가 아는 범위에서 점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려고 한다.

 

일본 정치권과 사회문제로 번진 아사히 신문의 위안부 보도 진위 문제


2014년 8월 5일, 아사히신문은 우에무라 다카시 전  기자에게 집중된 비난과 공격에 대해 첫 반박 기사를 발표한다.

 

고베쇼인여자대학(神戸松蔭女子学院大学)에서의 임용 취소를 통고 받고 난 이후 이미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 행해진 대응 조치였다. 우에무라 다카시 본인으로서는 그야말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붙은 ‘날조기자’라는 딱지는 어떻게든 떼어내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수기(‘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에 적힌 당시 그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반박 기사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비난과 공격을 몰고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기서 먼저 2014년 8월 5일 아사히신문이 발표한 ‘위안부 문제의 본질, 직시하자(慰安婦問題の本質 直視を)’라는 당시의 기사의 일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의 작성 과정을 검증한 보고서를 지난 6월에 발표했습니다. 일부의 논담이나 인터넷 상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아사히신문의 날조다’라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전 위안부의 기사를 쓴 전 아사히신문의 기자의 실명을 거론되며, (그 기자가) 중상(中傷)을 입는 사태도 있었습니다.”

 

“피해자를 ‘매춘부’ 등으로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국의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 일부의 논조가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하여, 문제를 악화시키는 원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보고싶지 않은 과거로부터 눈을 돌려, 감정적 대립을 조장하는 언론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걱정스럽게 생각합니다.”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사히신문으로서는 자회사의 전 소속 기자를 보호하고, 가속화되고 있는 자국의 우경화를 냉철하게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발표한 기사였다. 하지만 아사히신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논란의 핵심이 된 부분은 다음 문장에 있었다.

 

“저희는 전 위안부들의 증언이나 몇 안되는 자료를 근거로 기사를 썼습니다. 그렇게 보도한 기사의 일부에 사실 관계의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전체가 보이지 않는 단계에서 일어난 실수입니다만, 검증 취재가 불충분했던 점은 반성합니다.”

 

위의 문장에서 말하는 ‘사실 관계의 문제가 있었던’ 기사란,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라는 인물의 증언 기사를 일컫는다. 요시다 세이지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 <나의 전쟁범죄, 조선인 강제연행>라는 책을 펴낸 것으로 유명한, 일제 시기 군인으로서 제주도 여성을 사냥하듯 연행했다고 증언한 인물이다. 그의 증언에 대해서는 그가 저술을 시작한 1977년부터 숱한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의 증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아사히신문은 요시다 세이지 씨와 관련한 16편의 과거 기사들이 오보임을 인정하고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그 다음날부터 아사히신문에 대한 거센 공격이 빗발치게 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의 기사에 대한 우파 미디어의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사히신문은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련해서 요시다 세이지 씨의 증언을 허위로 인정하고 사죄했다. (중략) 일본을 부당하게 능욕해온 증거를 스스로가 부정한 상당히 커다란 사건이다.”

 

위 내용은 IRONNA라는 일본의 우익 성향의 인터넷 매체가 같은 해 12월 31일 그 해를 돌아보는 의미로 작성한 기사이다. 위 기사는 제목부터가 ‘8월 5일은 아사히의 패전기념일’이다.

 

조금 더 살펴보자. 다음은 아사히신문이 문제 기사를 발표한 다음날 산케이신문의 기사이다. 산케이신문은 아사히신문의 정정 기사에 대해, “늦었다곤 해도 아사히가 위안부 문제의 사실 관계에 대해 검증한 것은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곧바로, 삭제 기사에 대해 열거해 놓지 않은 점, 오보에 대한 책임을 당시 학자들에게 돌리고 있는 점 등과 함께 “아사히의 보도가 한일관계 악화의 발단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명예를 지키려는 일부의 논조가, 한일양국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해,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원인을 만들고 있다”며 다른 언론들에게 책임전가하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다.

 

당시 일본 우익 언론의 편협한 보도 양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들의 주장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에 대한 아사히신문의 오보’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모든 위안부 문제의 논쟁거리들을 키워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여성 단체를 통한 실제 피해자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이나 우에무라 다카시 전 기자의 기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이들 기사가 발표되었을 때 위안부에 대한 관심도는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에 의해 위안부 문제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파 미디어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요시다 증언과 아사히신문 만물설’은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이 아직 자민당 당수였을 2012년 11월 30일의 기자 클럽 당수 토론 인터뷰 중의 그의 발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담화문 수정은 내각에서 결의된 것이 아니다, 애초에 아사히신문의 오보에 의한 요시다 세이지라는 사기꾼이 만든 책이, 마치 사실처럼 일본에 전해졌던 것에서 문제가 점점 더 커졌다.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증명되지 않았다. 단지, 그러한 것이(오해) 국내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대응의 방법에 따라서는 진실 일환과는 별개로 안됐지만 외교문제로 번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신문사에서도 그 부분은 신중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기서 언급된 ‘담화문’이란 8월 5일 아사히신문의 기사에서도 등장했던 ‘고노 담화’를 뜻한다. 고노 담화는 1993년에 있었던 미야자와 내각의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의 위안부 담화를 일컫는다. 담화문 속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 뿐만 아니라, 관헌 및 일본 정부의 직간접적인 관여를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재발 방지를 위한 역사교육에 대한 언급까지 있어 일본의 정권 교체 시기가 되면 언제나 이 담화문의 계승 여부가 주목을 받기도 한다.

 

2012년 12월에 발족한 아베 정권은 집권 전부터 이 고노 담화에 대한 의혹을 수차례 제기해왔다. 그리고 집권 후에는 본격적으로 내각의 각의 결정을 통해 담화문 수정(見直し)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일본 정부가 도출해내고자 한 결론은 ‘고노 담화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반성이 아닌, 단순한 한일간의 정치적인 협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평가였다. 위안부의 존재와 강제성, 군의 관여 여부 등에 대한 일본 정부로서의 책임을 인정하는 대외적이고 공식적인 입장인 이 고노 담화를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한 것이다.

 

아베 정권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국제사회의 비판 속에서도 이 같은 우경화 행보를 이어나가는 이유에는 그 이후에 있었던 ‘일본을 전쟁 가능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개헌파의 내부 결집과 강경한 분위기 조성 등의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지목된 것이 언제나 일본의 군국주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진보 언론의 대표격인 아사히신문이었고 이 가운데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이가 기요타 하루히토(清田治人) 전 테즈카야마학원대학(帝塚山学院大学) 교수와, 우에무라 다카시 전 호쿠세이대 비상근강사와 같이 일선에서 물러난 전직 아사히신문기자들이었다.


이처럼 우익 정권의 막강한 지지 속에서 우파 언론들과 우익 단체들이 득세를 하면서 일본 내부에서는 자정 능력이 상실된 언론 환경과 ‘헤이트스피치(성 정체성, 정치적 견해, 민족, 인종 등에 대한 차별적 발언)’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외로운 싸움을 해오고 있던 아사히신문은 코너에 몰려 일방적으로 펀치를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 가운데 요시다 조서의 문제, 이케가미 아키라 칼럼리스트의 칼럼 게재 거부 등의 아사히신문의 실수라고 여겨질 부분도 존재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결국 아사히신문의 기무라 다다카즈 사장은 직접 사죄 기자회견을 열고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리고 독자에 대한 신뢰성 회복이라는 명목으로 아사히는 그 해 12월 제 3자 위원회를 열어 과거의 기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이 때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기자의 기사도 검증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아사히신문의 제 3자 위원회는 1991년 8월 11일 작성된 문제의 이 기사에 대해서,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연행’되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는 판정을 내린다. 당시 기사에는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연행되어’라는 기술이 있었다.

 

그런데 아사히신문의 제 3자 위원회의 입장은 당시 기사에 등장하는 여성(故김학순 할머니)은 ‘정신대’로 연행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대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다고 표명한다. 그리고 ‘연행’이라는 표현에 대해 지적하는데, ‘연행이라는 단어가 독자에게 당시 ‘강제성’이 있었다고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수요집회를 주최하고 있는 단체의 이름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직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이었던 당시에는, 언론이며 학계에서 위안부와 정신대를 혼용하여 사용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대한 한국의 언론 보도들을 살펴보면 ‘정신대’라는 표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일본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북해도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2014년 우에무라 교수의 기사를 비판하고 있던 산케이신문이며 요미우리신문도 1990년대 초까지 ‘정신대’라는 표현을 정확히 명기하고 있었다.


코너에 몰린 아사히신문이 제 3자 위원회를 동원해, 당시의 우에무라 다카시 전 기자의 1991년 기사를 오보로 판정한 것은 당시의 일본 언론이 얼마나 편향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 중 의 하나일 것이다.


지금 회상해보면 2014년 겨울 나는 자체 검증없이 편향된 언론 환경에서 정보를 접했던 한 여학생과 조우했던 것이다.


꽤나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가? 개인적인 연구와 검증이 없으면, 이처럼 치우친 보도 환경에서 과거의 비극적인 역사가 한낱 미디어의 잘못된 보도였다고 치부해 재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정보에 자주 노출된 일본인들의 눈에, 이토록 ‘위안부 문제’에 민감한 한국의 여성단체와 피해자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쳐지겠는가? 상상만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본의 현실이다.


이 후 나는 1년간 도쿄의 죠치대학에서의 공부를 하는 동안 수많은 일본인 대학생들과 교류를 할 수가 있었다.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과거와는 달리 언제든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데 언제나 그들이 반박하는 주장에는 ‘요시다 세이지의 허언’과 ‘아사히신문의 실수’가 나왔다.


잘못된 진실을 바로 전하는 과정에서 양국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인가? 시작이 반이라고 하면 과장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들 일본인과 접하는 우리들이 제대로 알려는 노력을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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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6 [13:08]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일빠ㅄ들척살 17/06/16 [22:16] 수정 삭제
  방사능 걸린 원숭이들하고 대화 할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이미 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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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사히 신문 기자 시절, 일본군 위안부 기사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가는 대학마다 협박으로 임용이 취소되는 등 일본 극우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 그는 현재 카톨릭대학의 초빙교수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 우에무라씨를 한국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한국 유학생 강명석 씨. 우에무라씨 곁에서 그가 어떻게 일본 우익들과 싸우고 더불어 일본의 양심세력들과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지, 그 현장을 낱낱이 기록하는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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