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를 시작하며
전 아사히 신문 기자 시절, 일본군 위안부 기사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가는 대학마다 협박으로 임용이 취소되는 등 일본 극우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 그는 현재 카톨릭대학의 초빙교수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 우에무라씨를 한국으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한국 유학생 강명석 씨. 우에무라씨 곁에서 그가 어떻게 일본 우익들과 싸우고 더불어 일본의 양심세력들과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지, 그 현장을 낱낱이 기록하는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1년 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이 될 여행으로 히로시마로 향했다.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이동에 12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장거리 여행은 언제나 막연히 주어진 좁은 공간과 긴 공백의 시간에 대한 불안감으로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히로시마에서 하카타, 페리를 통해 부산,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길디긴 여정은 아직 20대의 팔팔한 내게 있어서도 피곤함을 동반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리타, 하네다라면 하늘길로 2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간편함을 두고 구태여 이 같은 비효율적인 행로를 선택한 이유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한번 히로시마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을 맞은 도시로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도시의 중심부에 두 갈래의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큰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 히로시마는 강과 녹원이 어우러진 공원이 드넓게 펼쳐져 시민들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원폭 투하 현장인 히로시마 공원은 당시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건물들의 잔해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을 평화기념공원으로 재조성한 곳이다. 내가 히로시마에 와보고 싶다고 느꼈던 가장 큰 이유가 이 공원에 있었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것은 공원 내의 안내원들이 강바닥에서 건져 올린 과거 건축물들의 잔해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오랜 시간 숯 위에 올려 태운 것처럼 검게 그을려 있었다.그 잔해물 뒤로는 앙상한 뼈대만 남아 당시의 피해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원폭돔이 상징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새하얗게 타올라 모든 것을 지워버린 당시의 폭격을 마치 직접 목격한 것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안내원들 중 한 분께 정중히 안내를 부탁드렸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점잖고 친절한 노신사였다. 이 노신사는 나를 조선인 위령비로 안내해주었다.
히로시마의 원폭에 희생된 조선인을 기리는 위령비. 그는 평화공원을 찾는 다른 일본인들에게도 이곳을 소개하며 과거 일본의 그릇된 정책의 말로가 일본인 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인 및 중국인, 그 밖에 아시아인들을 아프게 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원폭 2세라고 소개하는 그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바로 다음해에 태어나, 방사선의 영향 때문인지 태어났을 때부터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일본이 벌인 전쟁과 히로시마에 대한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폭격 당시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아마도 트라우마로 남아서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리라고 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생선 굽는 냄새를 지독히 싫어했다고 한다.
전쟁의 비극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 피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가슴 한 켠에도 깊은 멍을 남겨 놓은 것이다. 아마도 이 노신사는 자신과 깊게 연결되어 있는 당시의 아픔을 이야기를 해나가는 것으로 극복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는 히로시마와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히로시마 공원 안내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이러니한 것은 이 땅의 비극과 나의 조국의 독립이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수소탄과 원자탄의 연이은 폭격을 당하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조선으로부터도 철수했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한 것이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품속의 태극기를 꺼내큰 소리로 해방의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나는 미국의 원자탄 투하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응징처럼 이야기하던 한국인들을 여럿 만난 적이 있다. 혹은 인간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폭격 자체에 대해서는 정당화하는 이들도 만났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이곳 조선인 약 2만명을 포함한 히로시마의 희생자들의 죽음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인간의 무고한 희생에 가해국과 피해국의 차이를 둘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원폭투하로 목숨을 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을 벌인 이들과는 전혀 무관한, 단지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쿄 유학중에 홋카이도 슈마리나이의 워크숍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 워크숍의 테마는 슈마리나이 지역의 댐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유골을 발굴하며 한일의 우호를 다지는 것이었다. 워크숍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제껏 댐 건설 지역과 인근 지역에서 발굴된 유골들 가운데 조선인의 유골보다 일본인의 유골이 몇 배 이상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회상해보면 학창시절 역사 교과서에서는 조선 민중의 아픔과 애환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지만, 일본 본토인들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 받았던 고통들에 대해서는 그리고 있지 않았다. 그야 조선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에 끌려나갔으며 일본 본토인들보다 심각한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나, 일본의파시즘 속에서 일본 민중들도 영문도 모른 채 혹은 세뇌 교육이나 강압에 의해 전장터로 탄광으로 동원되었다.
결국 힘의 논리가 극에 달한 당시 일본 위정자들의 정책과 정권 하에서 일본 국민들은 ‘국가를 위하여, 황제를 위하여’라는 대의명분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내놔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국가와 체제의 피해자였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때때로 내 주변의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일본의 제국주의,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동일시하며 조롱하거나 악감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당장 내 친구들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 마찰이 생기면 어김없이 일본인들의 잔인함과 비도덕성, 비인간성을 끄집어내 비판하곤 한다. 물론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주로 일본에서는 한국의 야만성,무질서 등을 지적하며 비난한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쪽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간 내가 접해온 일본이라는 나라, 그리고 내가 직접 자라온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되거나 특징지어질 수 없다고 내심 부정하고 싶어진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시대나 제국주의 당시 파시즘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은 일본의 식자층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무고한 희생을 치른 평민들까지 묶어서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양국의 국민들이 과거의 사실에 대한 해석을 두고 첨예하게 갈등해야 할 필요는 없다. 국가가 인간의 자유를 빼앗고, 인권을 유린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는 행위는 정의롭지 않은 것이며, 전쟁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민중들이 이 강압적인 시대의 피해자였다. 우리는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아 미래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과거 문제가 현재 양국의 민족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된다면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현재 나는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와 전후 양국이 서로 독립된 국가가 되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양국의 민족감정이 대립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 지금까지 공부한 조지대학이 아닌 와세다대학원아시아태평양연구과에 원서를 넣었다. 한일관계사에 대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일 양국 국민들이 평화와 화합을 위해 나아가야할 방향과 그 방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학문적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일본에서 공부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 신문기자와의 인연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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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명석은 누구?
1990년생으로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홋카이도 홋쿠세이대학원대학에 유학,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와 만남을 통해 인생이 일변한다. 우에무라 씨가 일본 우익들과 맞서 온몸으로 사투하는 것을 보며 그 자신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취미는 여행, 특기는 자전거 오래 타기. 이 취미를 살려 2015년 여름에는 하카타에서 북단 삿포로까지 일본을 종단하는 여행을 했다.
차별과 억압, 민족 등의 이슈에 관심이 많고 자유를 가로막는 사회적 압력에 대해 태생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자칭 자유주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