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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로봇가전 흑역사 (13 회)
 
김명갑

코무라를 떠나는 차 안에서 야스다는 내내 말이 없었다. 계약까지 연결된 것은 결국 사사키 씨 하나 뿐이었다. 아침에 산몬이 미나로부터 카탈로그를 건네 받긴 했지만 어떤 확답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 야스다는 기운이 쭉 빠졌다.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그간 쌓아 놓았던 세일즈맨으로서의 감각을 모두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 안은 야스다의 한숨 소리와 함께 금방 답답한 공기로 가득 찼다.

 

“잠깐 차 좀 세워 주세요.”

 

그제 차가 퍼졌던 곳에서 미나는 잠시 차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야스다 역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어 별 말 없이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미나는 가드레일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차에서 점점 멀어지는 미나의 뒷모습을 야스다는 담배를 피우며 말없이 지켜보았다.

 

미나는 어제 산몬에게 로봇청소기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뱀 시체와 함께 버려져 있던 HIKARI-RAI의 녹슨 동체가 떠올랐다. 로봇 청소기가 스스로 마을을 빠져나가 수 킬로 떨어진 지방 국도 가드레일 밑에서 최후를 맞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걸 우연히 발견할 확률은? 그러나 이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자극했다.

 

미나는 치마를 말아 올리고 가드레일을 넘어 풀밭으로 건너갔다. 엇그제 야스다가 놀란 나머지 거의 반쯤은 내던졌으니 가드레일 너머 어딘가에 로봇 청소기는 있을 것이다. 그녀는 풀밭을 헤치며 20대 중반부터 자신을 계속 괴롭혀온 불안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렸다.

 

미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수준의 4년제 대학, 그것도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나와 면접에 붙여주는 기업에 들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월급을 받으며, 적당히 4살 차이나는 남자와 평범한 연애를 했다. 아마도 몇 년 후에는 결혼도 하고 경기도 근방에 융자를 끼고 방 두 개 짜리 아파트를 구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너무도 편안했고 구체적으로 미래까지 상상할 수 있어 그녀는 오히려 이런 만남에 피곤을 느꼈다. 물론, 그녀의 주변에는 연애는 커녕 취직조차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미나의 존재는 이미 궤도에 올라 달리기 시작한 바쁜 직장인으로,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승리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미나는 오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같이 할 때마다 무리해서 산 샤넬 핸드백을 들고 갈까 말까를 고민했다. 몇 년째 인턴을 전전하고 있는 친구, 유럽의 몇 개 대학에 박사 과정을 예약해 둔 친구, 임신과 동시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 친구 등등. 친구들 관계에서조차 자신의 빈약한 자존심을 내세워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미나는 굳이 자신의 삶을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거대한 방패를 든 중세의 병사처럼 어깨에 샤넬 백을 매고 거리로 나갔다.

 

그러다 우연히 남자친구의 핸드폰에서 어떤 여자와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발견했다. 미나는 그 짧막한 메시지들에서 이제 서로를 막 알아가기 시작한 남녀 사이의 긴장감과 날을 숨긴 욕망들을 읽어냈다. 둘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것들이었다. 남자 친구는 전보다 얼굴이 밝았고, 의욕적이었다. 미나와의 관계도 그 이전보다 좋았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나는 남자친구 가슴에 피어올라 있는 불씨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배신감이 들었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가장 친한 동지라고 생각했던 그가 자신은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삶의 권태를 너무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 남자 친구 몰래 애인을 만들 수도 있었다. 지루하고 평범한 삶이 주는 안정감과 어쩌면 그 안정감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도 있는 짜릿한 스릴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충분히 즐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안 그런척 그녀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 명의로 된 펀드와 주택청약, 보험들을 전부 해약했다. 그리고 그토록 아꼈던 샤넬 가방을 외국 대학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싼 값으로 팔았다. 여기에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합쳐보니 천 만원이 겨우 넘었다.

 

미나는 그것을 들고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왔다. 직장도 없고 일본어도 서툰 미나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제로에서 시작해야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남자친구와 부모님으로부터 수시로 전화가 걸려 왔지만 그녀는 일체 받지 않았다. 다만 시끄럽게 벨이 울리는 좁은 원룸 방에서 상용한자 2000자를 외우며, 이걸 다 외우면 뭔가 인생이 극적으로 변할 것이라 스스로를 세뇌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일본에 정착하고 수중의 천만원이 사라진 것은 그야 말로 순식간이었다.

 

마침내 미나가 찾던 로봇청소기가 눈에 띄었다. 아무렇게나 뒤집혀 진채 굴러다니는 HIKARI-RAI. 미나가 이 모델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것이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이면서도 쓸모없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로봇 청소기는 이 시대에서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쓸모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불필요하면서도 어려운 기술들을 오랜 시간 연구해야 했다.

 

그 과정 속에는 어떤 로망이나 전설 같은 게 있었고, 때로는 근거 없는 희망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대부분의 일본인 집에 로봇청소기를 한 대 씩 놓는 꿈, 누군가와 평범하게 결혼을 해서 아이들 학원비 걱정을 하며 평화롭게 거실에서 사과를 깎는 모습. 물론 이 같은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그런 장면은 이제 더 이상 미나의 가슴을 뛰게 하지 못했다.

 

“뭐야. 저번에 더럽다고 내가 던져 버린 거 아니야? 그걸 주우러 다녀온 거야?”

야스다는 미나의 손에 들린 로봇 청소기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녀는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로봇청소기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제가 한번 고쳐 보게요.”

미나는 언제부터인가 녀석이 산몬의 집에서 나온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고 극적이니까. 하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야스다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름이 껴 조금은 선선한 날씨였다. 야스다는 창을 내리고 사카이 이즈미의 CD를 재생시켰다. 바람이 차 안을 시끄럽게 긁었지만, 노래 소리를 묻어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CD가 절반 정도 돌아갔을 때 미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카이 이즈미는 레이싱걸에서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유명해질 것을 예상했을까요?”

“음...이 정도로 유명해 질지는 예상 못했겠지. 그녀라면 하고 싶었던 거니까 불확실 하더라도 그냥 했을 거야. 사람 앞 날은 모르는 거니까.”

 

야스다는 그렇게 말하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사카이 이즈미가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수 데뷔 이후 15년 동안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궁경부암이 폐까지 전이 되면서, 한 때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투병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겨우 몸이 조금 회복되어 병원 주변을 산책하다가 발을 헛디뎌 병원 난간 밑으로 추락했고, 그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항간에는 자살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목격자가 없어 결국 실족사로 처리되었다.

 

사카이 이즈미의 마지막은 분명 히노와 겹쳤다. 그 역시 발을 헛디뎌 선로에 떨어져 죽었으니까. 야스다의 마음 한구석에는 혹시 히노 선배가 자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웅크리고 있었으니까. 히노의 사고는 자살이라고 핑게를 대고 싶을 만큼 정말이지 믿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야스다는 사카이 이즈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히노가 떠올라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그 괴로움을 일부러 피하고 싶진 않았다. 그의 차 안에는 사카이 이즈미의 CD 밖에 없었고, 이즈미는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가수이기도 했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건, 누굴 떠올리게 하건 그 아름다운 노래들을 그로부터 내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불안함과 조급함에서 조금은 편안해졌다. 고민하지 말고 좋아하는 것들을 하자. 야스다는 그렇게 생각하며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

 

도쿄에 돌아오고 미나는 일주일 간 휴가를 냈다. 야스다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출장 판매보다는 지방 판매소 컨설팅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며 자연스럽게 바빠졌다.

 

미나가 휴가를 내자, 신입 사원이 첫 현장 실습과 동시에 휴가를 쓴다고 부서 안에서는 건방지다는 시선도 있었지만 야스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어차피 현장에 남을 사람이 아니었다. 개발부 일을 사랑했고, 파는 것보다 직접 만들고 고치는 일을 좋아했다. 적당한 거짓말과 사탕발림으로 사람 마음을 얻으려 하지 않았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야스다는 미나의 자유스러움이 부러웠다. 동시에 그녀 앞에서 자꾸 히노를 의식하는 자신이 싫어 괴로웠다. 야스다는 이미 마음 속에서 훌쩍 커버린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척 하기로 마음 먹었다. 야스다는 아주 어른스럽고 선배다운 결정이라고 스스로를 대견해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자신 옆에 잠들어 있는 호스티스를 발견하고는 이내 자신이 위선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좁은 원룸에서 미나는 망가진 로봇청소기와 하루 종일 씨름했다. 내부에 녹물이 스며 들어 기판 전체를 갈아야 할 판이었다. 메모리는 건들이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메인보드를 갈기 보다는 부품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복구하는 쪽을 선택했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시간이 많았다.

                                       ( 계속 - 다음호에 마지막 회가 게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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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8/06 [09:50]  최종편집: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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