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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명성황후 모임' 만든 까닭
[현장]가이 도시오 대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김현근 기자
지난 8월 24일, 민영방송사상 처음으로 <tv아사히>의 '보도스테이션'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방영되었다.
 
매일 밤 10시경 시작하는 '보도스테이션(월-금,9시54분-)'은 저녁 뉴스 중에서 시청률이 높은 편이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그 전모를 방영한 것은 전국방송인 특성상 이외로 받아들여졌다. 

 
방송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무엇이며,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인지를 차례로 훑어나간다.
 
영상은 실행범 구니모토 시게아키의 외손자인 가와노 다쓰미(87)씨와 이에이리 가키치의 손녀인 이에이리 게이코(80) 씨의 한국방문 및 사죄과정도 상세하게 담았다. 
 

▲ 명성황후 사건 다큐멘타리를 을15분 정도 편집해서 방영하고 있는 tv아사히 '보도 스테이션' 
 
가와노씨와 이에이리 씨를 포함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명성황후의 묘 '홍릉'을 방문해서 사죄를 한 뒤 명성황후 박물관을 직접 찾았다.
 
가와노씨가 명성황후 박물관을 찾은 이유는, 조부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증거로 가져온 향낭을 반납하기 위해서였다. 진품이 원래 집에 있었으나 잃어버려 본인이 직접 다시 만든 것을 명성황후 박물관에 되돌려 주었는데, 그때 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영상은 그 후 2007년에도 이들이 한국을 방문해 사죄했고, 이것을 계기로 명성황후의 묘를 지키고 제례를 담당하는 조선왕조의 자손들이 일본 구마모토에서 가와노씨를 만나 화해를 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됐다.
 
이 다큐멘타리는 2005년 '다큐서울' 정수웅 감독이 제작한 것으로, 이 다큐가 <tv아사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되기까지는 사건의 진실을 일본사회에 알리려는 사람들이 숨겨진 노력이 있었다.
 
지난 9월 12일 오후 도쿄 코다이라시 국평사(国平寺)에서는 명성황후 시해범 자손의 한국방문 및 사죄를 이끈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대표 가이 도시오(80)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가이 도시오 대표는 구마모토의 평범한 영어선생으로 정년퇴직한 뒤 명성황후의 진실에 대해서 일본에 알리고, 또 실행범들의 후손을 데리고 한국에 참배 및 사죄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 
 
가이 도시오 선생은 강연 전 jpnew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실행범 48명 중 21명이 구마모토 출신이다. 그 외 관여한 현이 15군데. 따라서 그  외 일본 지역에서는 거의 모른다. 따라서 구마모토에서라도 명성황후에 대해 열심히 공부한다면 왜 일본과 한국이 현재에도 뒤틀려있는지 잘 알 수 있게 된다.실행범의 여러 후손 중 2명은 확실히 자신들이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그 후손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 있다" 
  
그는 명성황후 사건이 지금까지 일본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 및 문부과학성이)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국과 일본에 제대로 된 우호관계를 맺으려면 일본이 먼저 진실을 제대로 알아야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날 이루어진 '명성황후와 구마모토' 라는 제목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 국평사에서 열린 명성황후와 구마모토 강연    ©구지은/ jpnews
 
◆ 선생님 "민비사건 알아요?" 
 
1958년 구마모토현의 평범한 중학교 영어선생이었던 가이 도시오 선생에게 '청소년 적십자 운동'을 하자고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어느날 가이 선생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민비사건 아세요" 
 
'민비사건(ミンピ事件)'은 일본어 발음으로 '민삐지켄'이었으므로 선생은 일본의 어느 현을 가리키는 줄 알고 '홋카이도, 아오모리, 미야기 등은 있지만 그런 이름의 현은 일본에 없다'고 대답했다.
 
"선생님 농담하시는 건가요. 실은 많은 일본 남자들이 조선의 왕궁에 쳐들어가서 조선의 여왕을 칼로 베어 죽였습니다. 그것도 살해한 다음 태워 버려서 뼈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는 민비라는 이름도, 또 그런 사건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명성황후 사건을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소녀는 '민비사건'이 사전에도 실려있다고 해서,
 
"누구한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냐"고 물었고, 그녀는 "엄마로부터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때 이 학생의 엄마는 공부를 많이 했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학생의 엄마가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학생이 창씨개명을 해서 일본인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 여학생은 매우 성적이 좋았는데,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서 생활보호를 받고 있었고, 고등학교를 가게 되면 생활보호가 끊기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 후 그 소녀는 도쿄에 갔다가 2년후에 혼자서 구마모토에 돌아와서 '청소년 적십자 운동' 및 '조선인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주었다. 
 
"대단한 여성이었다"고 회고한 그는, 그녀에게 받은 편지등을 1990년에 일어난 대규모 수해로 잃게 되었고, 지금은 기억속에만 남아있다고 했다. 또 그 이후로는 교사 생활에 바빠 점차 잊혀졌다고 한다. 

 
▲ 실행범 명단 중에서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것이 구마모토 출신이라고 밝히는 가이 선생   ©구지은/ jpnews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명성황후 사건을 알고는 있었으나 활동을 하지 않던 그에게 한국에서 새로운 손님이 찾아오면서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역사교과서 문제로 충청남도와 연대를 하고 있던 재일동포 주영덕 씨와 함께 온 <오마이뉴스>의 심규상 기자
는 가이 도시오 선생에게 명성황후 문제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몇번이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이 선생 자신은 '글쎄,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고 해도 별로 생각을 해보지 않아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그는 곰곰히 생각해 보니 역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 <다큐서울>의 정수웅 감독이 자신을 찾아오게 되면서 그때부터 같이 활동을 시작했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오늘과 같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가이 도시오 선생이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명성황후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아니라 '알릴 의도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명성황후 사건'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다들 모른다고 했고, 그는 '왜 일본사람들에게 이 중대한 사건이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골똘히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다니는 곳마다 느낀 점을 종합해 보니까, 이 사건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리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알릴 의무가 있는 일본정부, 문부과학성이 알리지 않았으니 선생은 모르고, 선생이 가르치지 않으니 아이들도 모른다.
왜 일본정부는 이 내용을 알리지 않은 것일까.
 
이것이, 그에게는 '상당한 불만'으로 다가왔다.
 

◆ 구마모토현 사람들은 "갑신정변"때부터 한국역사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청중들에게 '임오군란'에 언급한 뒤 김옥균의 '갑신정변'과 다케조이 신이치로(竹添進一郎) 공사에 대해 말했다.

 
그는 "갑신정변 때부터 구마모토현 사람들은 한국역사의 중요한 부분에 관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케조이는 김옥균에게 정변을 지시했으나 결국 중요할 때 뒤로 빠졌고,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노우에 가오루(당시 외무대신)가  다케조이 신이치로에게 지시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구지은/ jpnews
가이 도시오 선생은 삿사 도모후사를 지목하며 이 사람은 일본에서 아주 중요한 정치인이지만 별로 알려져있지 않은 인물이다. 막후조정을 했을 뿐 일본 관직에 없었기 때문인데, 구마모토에서 유명한 고등학교를 만들고 교장까지 한 인물로 빨리 일본이 한국에 가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가져와야한다 주장한 사람으로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구지은/ jpnews

그는 청일전쟁 전에 방곡령이 있었고,  그후 배상금 요구 등 당시 일본정부의 말도 안되는 요구 등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일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일본의 고등학교 선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어봤다. 다들 우물쭈물 대답을 못했다. "바다 위인가요?", "일본인가요, 아니면 청나라인가요?".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 곳은 한반도였고, 전쟁이 일어나면서 가장 피해를 입은 쪽은 민간인들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삼국간섭에 의해 요동반도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고 명성황후는 일본과 청국을 배제하고 러시아의 힘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때 조선공사로 파견된 미우라 고로를 통해 일본정부는 명성황후의 암살을 지시한다. 
 
그때 가이 선생은 그런 암살 지시를 내린 문서를 찾으러 정 감독과 다녔다.
 
정 감독이  어느날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750매를 복사해 가지고 와서는, 갑자기 '이거 독해해주세요'라고 맡겼다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 글자는 너무 어려워서 본인이 직접 독해할 수가 없었고, 구마모토 대학의 교수와 한국 대학교수가 절반씩 맡아 6개월 걸려서 풀었다.

그 문서의 독해 결과는 "미봉책은 적당히 그만두고 결행할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도쿄의 교수진에게 맡겨 새롭게 해석한 것에는 "그런 방식으로는 불충분하다"라는 반대의사를 피력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문서의 분위기는 일본정부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것으로 초점을 옮겨가고 있었다.

◆ 시해사건 후 일본으로 잡혀온 범인들을 위해 모금운동 한 지역주민들
 
결국 1895년 8월20일 새벽 일본 자객 48명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고, 이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이 붙잡혀서 일본으로 송환되게 된다. 
 
이들이 범인으로 일본에 돌아왔을 때 신문에는 "구마모토 사람들이 만세를 불렀다"고 실렸다. 그후 다들 수갑을 한 채로 재판관에게 심문을 받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낭인들이 시해사건에 가담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이들은 당대의 엘리트였다는 것이 차차 밝혀진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가이 선생은,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라는 이름의 지역신문사 사장이 직접 자신이 살해하러 간 것이라고 신문에 밝혔다는 것을 들었다. 재판은 3개월 20여일이 지난 후 전원 무죄 판결로 끝났다. 
 
▲ 한국을 찾은 이에이리 게이코(80)씨의 조부  이에이리 가키치    ©구지은/jpnews

가이 선생은 실행범 중 한 사람인 이에이리 가키치가 84세에 자기가 쓴 수기를 소개하면서, 그 수기에는 감옥에서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고 적혀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히로시마 재판소에 전달했기 때문이고,  지금도 각 마을에 그 당시 1엔, 3엔 등 돈을 모은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그 증거 마지막에는 이에이리 가키치에게 보냈다는 기록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전에 우쓰노미야 교육위원회에 이런 증거를 보이자 교육위원회는 곤란해 하며 "선생, 그것은 비밀로 해달라. 이제와서 그런 자료가 나오다니..."라며 난처해 했다고 한다.
 
가이 선생은 이번에 <tv 아사히>에서 직접 찾아왔을 때 그 자료를 밝히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말려서 못했으나, 언젠가 이 자료는 세상에 확실히 내 놓을 생각이니 "강연을 듣고 있는 여러분이 저와 함께 같이 하시면 저는 그 힘을 빌려서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증거가 계속 나오는 것이 즐겁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알게 된 것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결성된 다음부터" 라고 밝혔다.
 
◆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고 나서
 
가이 선생은 모임이 결성된 후,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한 끝에 모임 사람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명성황후가 최후를 맞았던 경복궁 건청궁에 가자."
"묘지에도 가자. 기념관에도 가자."
"하지만, 단지 가는 것만으로는 안되므로 '명성황후님!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사죄의 마음을 담아서 무언가를 두고 와야한다."

그 중 하나가 구니모토 시게아키의 후손인 가와노 씨가 가지고 간 향낭이다.
또 하나는 가이 선생이 직접 만들어서 두고온 다마토로(玉灯篭, 구슬등롱).

▲  자신이 만든 구슬등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구지은/jpnews
 
"세상은 암흑이다. 사람들은 모두 평화의 빛을 바라고 있다. 빛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평화의 길을 비춰줄 것이다."

그는 등롱을 만든 이유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 몇년간 매번 명성황후 기념관 가서 이 등롱을 두고 왔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5년 혹은 10년, 아니면 훨씬 훗날 많은 일본인들이 당당히 참배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아니 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 때 구마모토의 사람들이 한참 전부터 이런 물건은 놔두었구나. 그것이 신뢰와 우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는 것'의 중요함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역사를 아는 것의 중요함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몇해에 걸친 한국방문으로 어렵게 성사된 것이 홍릉 대표의 구마모토 방문이다.

 
가이 선생은 구마모토 시청에 명성황후 홍릉 측의 대표가 구마모토를, 공식초청으로 찾아온다고 하자, 시청은 그 이유에 대해서 밝히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때 선생은 "구마모토의 21명이 이런 일을 저질렀고 우리들과 그동안 이런 교류가 있어서 한국측에서 우리 쪽으로 찾아오고 싶다고 하는 우호행사다"라고 밝혔으나, 시청쪽의 창구담당 직원은 "사죄요구를 받으면 거절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중간에 그 둘을 연결한 사람도 "선생님, 그건 어려운 모양입니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별도의 루트를 통해 다른 방법을 쓰니까 괜찮았다.
 
그 차이는 바로 역사를 아는가, 모르는가였다.
 
처음 부탁한 사람은 명성황후 사건의 본질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중간에 섰으니 상대쪽에서 곤란하다고 하니까 "네, 그것도 그렇군요"하고 그냥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시청과 다리 역할을 했을때 시청직원이 차가운 반응을 보이자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당신들이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하면 가이 선생 쪽의 사람들(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이 난리를 피울 것이고, 그런 일이 있으면 구마모토에 대한 한국사람들 인식이 달라지게 된다. 그럼 한국에서 구마모토에 관광을 안 올지도 모른다.


구마모토는 일본 지자체 중에서 한국사람이 3번째로 많이 찾는 곳 아닌가. 구마모토의 공항이나 관광지에 가면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위축될 정도로 많이 찾아오는 데 당신네들이 그걸 책임질 수 있는가"
 
가이 선생은 그 일을 겪고 나서 "아는 것의 중요성, 아는 것은 에너지가 된다. 그런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싶은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바램"이라고 밝혔다.
 
그는 강연 마지막에서 명성황후 암살사건의 지금과 앞으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년까지는 중학교 교과서에 명성황후의 사진이 있었고, 상당한 실권을 쥐고 있는...이라는 캡션이 달려 있었습니다. 올해부터 앞으로 2년간 사용할 중학교 교과서에는 그것이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교과서에 없으면 선생님들이 가르칩니까? 안 가르칩니다. 선생 자신이 명성황후에 대해 잘 모르니까 교과서에 없다면 더더욱 안가르칩니다.앞으로 2년간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는 사라져 버립니다. 안타깝습니다. 이것이 현재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더욱 나 같은 사람이 사람들이 늘어나서 전국의 선생님이나 아이들에게 일본과 한국이 뒤틀린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식을 시켜야 됩니다"

 
가이 선생은 앞으로도 일본사람들에게 명성황후 사건의 본질을 알릴 싸움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 '명성황후 모임'을 주도한 또 한사람의 주인공 재일동포 주영덕 씨. 

일본사회에서 '명성황후' 문제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데 불을 붙인 또 한사람의 주인공으로 재일동포 주영덕 씨(54)가 있다. 재일동포 2세로 구마모토 출신이다. 다음은 주영덕 씨가 밝힌 그동안의 경과다.   
 

▲ 검은 양복을 입은 이가 주영덕 선생     ©구지은/jpnews
 
국평사의 선대 주지스님으로부터 여러가지 신세를 져서 보답을 하기 위해 이곳에서 강연을 열었다.
 
실은 1997년 종군위안부의 기술이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그때 전국의 자민당계의 보수세력이 "그런 일은 없었다, 괘씸하다" 라고 하면서 일본 전국에서 기술내용을 삭제하라는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구마모토에도 청원서가 올라왔다. 당시 '교과서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든 시민단체분들이 있었는데, 사실상 그때부터 이런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들 힘이 부족해서 당시 구마모토와 충청남도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던 것도 있어서 한국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이것은 일본과 한국의 문제이니까 시민들이 서로 손을 잡고 연대해서 싸워나가자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결국 구마모토 의회에서 1년간 끌다가 교과서 취소가 결정났다. 전국의 47개 도토후현 중에서 구마모토가 유일하게 기각 결정이 난 것이다.
 
그후부터 여러 한국시민단체와 교류가 시작되었다.  2001년 명성황후 사건에 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그때부터 가이 선생을 필두로 본격적인 조사활동에 들어갔다. 그 가운데 한국을 방문하는 등(비디오 내용) 가이 선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드디어 8월 24일 전국방송으로 처음 명성황후 사건을 다루게 된 것이다. 

 
약 10년 정도 걸린 셈이다. 감회가 새롭다.
 

■ '명성황후와 구마모토' 강연 이모저모
 
▲  코다이라시 국평사   ©구지은/jpnews
▲  가이 선생이 만든 구슬등롱   ©구지은/jpnews
▲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한국 방문시     ©구지은/jpnews
▲ 일한의 과거를 직시하고 더 나은 우호를...이라고 적혀있다    ©구지은/jpnews
▲ 제 4회 명성태황후 사적 방문단    ©구지은/jpnews
▲ 강연장 정면   ©구지은/jpnews
▲ 명성황후 초상화    ©구지은/jpnews
▲ 강연을 듣는 사람들    ©구지은/jpnews
▲ 국평사 주지 윤벽암 스님     ©구지은/jpnews
▲ 강연은 다큐멘터리 시청부터 시작되었다. 홍릉을 참배하고 있는 가와노 다쓰미 씨    ©jpnews
▲  가와노 씨가 직접 만들어서 바친 향낭(조부가 살해 후 가져온 것은 잃어버림)   ©jpnews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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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9/14 [23:52]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또 자기 무덤을 파고 있네요. 불타는공 09/09/15 [05:18]
조선실록만 봐도 민비 시해 사건의 주모자가 당시 조선인이라는 것이 명확 합니다. 그리고 민비가 죽을 때 같이 있었던 순종의 당시 증언도 조선인이 범인이라고 했던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네요. 게다가 고종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범인을 조선인이라고 판결 한것도 증거가 되네요.

이미 과거의 일이고 증거 까지 있는 마당에 일본인이 죽였다고 일본을 비난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이렇게 들쑤시다가 만약 일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집중 조사를 해서 모든 것이 한국인의 거짓말인 것이 들통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수정 삭제
불타는 공님 무슨 말씀이신지? 테츠 09/09/15 [09:02]
이른바 대원군파와 민비파의 대립이 큰 틀의 역사적 맥락에서 있었다는 건 사살이지만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모자가 조선인이라는 건 말이 안됩니다. '시해'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님 논리대로라면 일본 황가에 민족파과 친미파가 대립하고 있다고 해서 제가 친미파의 사주를 사주를 받아 민족파의 거두인 황족을 실제로 '시해'해도 아무런 죄가 없겠군요.

게다가 조선시대 마지막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던 순종의 '증언'은 일본의 인터넷 우익들이 자주 들이대는 말인데요. 이런 이들조차 미우라 고로 당시 공사가 주도했다는 건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공문서 기록은 없지만, 당시 미우라 공사의 수기를 보면, 이노우에 가오루 등에 암살계획을 논의하고 또 지시한 내용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요.

일본정부는 48명이 전원 무죄로 풀려난 히로시마 재판을 근거로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주모자 격인 '공사'는 지금으로 치면 특명전권대사입니다. 관여는 안해도 알고는 있었고, 지시는 내리지 않았지만 묵인했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입니다.

님은 순종의 '증언'을 끌이대는데 그게 얼마나 초라한 논리인지 아시나요? 조선지대 마지막 임금, 목숨부지하느라 바빴던 어렸던 그 분이 제대로 증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과도한 반일감정의 소재로 삼는 등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선 아주 눈꼴시럽게 보는 입장입니다만, 님처럼 명백히 사실인 것을 당대의 구조적 내부문제로 치환시켜 있던 일도 없던 것처럼 말해버리는 건 역사를 전부 소설로 치환시켜버리는 행위가 아닌가 합니다.(님의 논리구조라면 '정한론'을 주장하지 않았던 당시 조선총독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도 천하의 몹쓸 놈이 됩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서 히로시마 재판에서 전원무죄가 되었고 국내에서 열린 재판에서 당시 군신대신등 많은 조선인 관여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고 죽거나 귀향을 갔다는 '사실'(팩트)는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팩트'를 근거로 이 사건은 조선인이 주모했고, 일본인들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온당한 것일까요? 수정 삭제
아참, 참고로 일본인들의 대체적 인식 테츠 09/09/15 [09:04]
http://detail.chiebukuro.yahoo.co.jp/qa/
question_detail/q1119168771
양쪽 의견이 모두 나와있으니 참고하세요.
(일본어 페이지이고 주소창에 연결해서 붙여 넣으세요)

http://homepage2.nifty.com/kumando/
mj/mj030806.html
그리고 상기 주소는 출전및 서적을 중심으로 시해사건이 나와 있는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온건한 의견을 낸 스미야 미키오조차 을미사변은 미우라 고로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라 적고 있습니다. 와타나베 쇼이치 등도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스미야 미키오나 와타나베 쇼이치등은 일본에서도 보수적인 경제학자, 사회학자로 알려진 인물들입니다. (와타나베에 이르러서는 노구교 사건은 중국 공산당의 음모이며, 남경대학살 따위는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와타나베는 그의 책 "와타나베 쇼이치의 쇼와사" 112페이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민비를 죽인 것은 참으로 난폭한 이야기로 일본을 위해서도 해선 안되는 짓이었다...(중략) 그때까지 일본의 공사관이 습격되고 일본인이 다수 죽은 임오군란이나 일본 공사관이 불태워지고 여성을 비롯해 많은 일본인 거류민이 죽은 갑신정변등 지금 눈으로 보면 어이없는 행위가 조선반도에서 일어났으니 둘다 참 어지간하다..(하략)"

이 부분을 보면 보수극우적인 와타나베 조차 명성황후 시해를 일본인들이 저질렀다는 걸 인정하고 있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또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즉 왕정인 조선시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일반인이 죽는 것과 왕비가 죽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이분법적인 단순 구조로 치환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선 일본인들조차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걸 알려두고 싶습니다. 저는 반일감정 그런게 아니라 지금 불타는 공님께서 조선실록 말고는 아마도 모르실 것으로 예상되는 팩트를 제시했을 뿐입니다. 이런 팩트도 존재하니까 독자님들께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수정 삭제
이봐요...불타는공! 자나가는 나그네 09/09/15 [09:38]
적어도 당신이 근거로 들고 있는 조선왕조실록(명성황후 사건이 기록 되어있다면 고종실록이거나 혹은 그 이후겠죠?)은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빠진 것이지요.
그런데 그걸 근거로 삼을 수 있나요?
수정 삭제
역시 제이피뉴스다운 기사입니다 리틀비 09/09/15 [12:04]
오랜만에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역시 제이피뉴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기사입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을 들을 수 있어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정 삭제
불타는공! 고베toshiko 같은 새퀴가 여기 또 있네 파이어볼? 09/09/15 [12:50]
있었던 사실은 인정해라.
어떻게든 숨기려고만 하지말고 씨밸놈아!
수정 삭제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바다하늘 09/09/15 [13:02]
한국인이면서도 정확한 내용까지 세세하게 몰랐는데, 조금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네요. 많은 일본사람들이 저런 것을 알면 좋겠지만, 내가 본 많은 일본인들은 일본사람들이 근대화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도, 한국사람들이 싫어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더군요. 좋은것만 가르치는 일본역사교육의 한 일면이겠죠. 수정 삭제
명성황후, 그는 정말 국모였을까. 씨보이 09/09/15 [13:06]
일본인들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침략자들의 하수인 노릇을 한 '개인'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사실적 차원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명성황후'는 많은 논란을 가진 인물이다. 일본의 침략적 음모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된 것과는 달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권력자로서 명성황후는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시해되었다는 사실이 추앙의 형태로 전이되어서는 안 된다. 구한말, 민씨의 외척 정치가 어떻게 그 시대를 부정부패로 몰아갔고 동학농민전쟁과 같은 집단적 봉기를 야기하였는지를 제대로 평가하여야 한다.

한국에서도 명성황후에 추모하는 모임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명성황후는 추모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력을 오남용하여 국가를 망하게 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매천 황현 선생의 과 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페라 는 명성황후를 이런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마치 민족을 대변하는 여인처럼 만들어 버렸다. 만약 누군가가 오페라 만을 관람하고 명성황후에 대해 주장을 한다면 어떤 주장을 할까. 두렵다. 역사는 현대에서조차 이렇게 사실과 다르게 유통되고 있다. 수정 삭제
이넘 뭐하는 새끼임? q불타지않은공 09/09/15 [15:42]
댓글도 첫번째,,이상한 글에 놀라고 분노가 느껴 진다.이런 새께가 있으니 일본놈들이 우리나라를 무시하지,,,넘하네 자국의 역사조차 모르는 넘이 아직도 설쳐대니,,,결혼 안했으면 공부좀 하고 결혼 했으면 자식들 한테 잘 가르쳐라,,애비인지 에미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인생은 니때에 끝내라,,,바보같은 새끼,,그리고 씨보이님이 쓴글을 보면 일본놈의 논리를 대변 하는듯 써갈겨 놓았는데,,,중요한 팩트는 곁가지가 아닌 본질을 봐야 한다는거야,,국모건 누구건 수도 한양의 그것도 조선의 정궁에서 그런일이 벌어졌다는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있을수 없는 일이지,,,

마치 씨보이님을 보니까 이병도가 생각 나는군 짝퉁 서양문물에 현혹되 말도 안되는 실증사학에 눈이 돌아가서 자기를 가르친 교수도 자국엔 대입시키지 않은 학문에 심취해 조국의 역사에 실증사학을 대입한,,,조또 내세울것도 없는 나라역사 지만 헛발싸게 역사도 아니라는걸 기억해 둬라,,,친일이 괜한 친일이 아니다 이병도도 죽기전에 단군은 실존한다고 실토를 하고 죽었다.

바보같은 놈들아 역사는 가정이나 설위에 만들어 지는게 아니야,,,그리고 정사에 눈을 주시해라,,,어디서 듣다 말다 한 그런 기록 보고 말하지 말아라,,,여기 역사모르는 학생들도 많이 온다.바보같은 새끼들,, 수정 삭제
조슈번 Nicholas 09/09/15 [17:29]
지난 8월 15일 전후해서 NHK 스페셜 3부작, 8월 24일 TV아사히 '명성왕후 시해사건'. 왜 숨겨두고 싶은 사실들을 일본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하는 것일까요?

1868년 유신의 주인공인 사쓰마번과 조슈번. 그 중에서 대한해협을 목전에 두고 있는 죠슈번. 명성왕후 시해의 기획자들.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이토와 친구), 미우라 고로는 조슈 출신들입니다. 그리고, 그 인맥의 그물망에는 누가 있을까요?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역시 조슈 출신들입니다. 알려진바대로 평민 출신 이토 히로부미는 기도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주선으로 구루하라 료조의 부하가 됩니다. 그런데, 구루하라의 아내는 바로 기도의 여동생입니다. 기도는 조슈번의 실세로 사쓰마번과 동맹을 맺고, 유신이래 처음으로 조선 침략을 제기합니다. 내치를 위해 정한론에 소극적이든 조슈번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후, 사쓰마번의 정한론보다 더 실제적으로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 나서게 됩니다. 나중에 해군을 사쓰마가 장악했다면, 육군은 조슈가 장악해버리는데, 그 수장격이 바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는 로렌츠 폰 슈타인의 ‘이익선’(주변국의 영토인 이익선을 미리 확보해 자국 영토를 보호한다. 즉, 침략의 합리화)을 조선에 들이댑니다.

등 명성왕후 시해를 다룬 기록에 따르면, 실행범 48인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조선의 자주를 위해 결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 침략의 이론가 기도 다카요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조선을 점령하면 일본의 이름을 세계에 떨칠 수 있고, 백성의 힘을 밖으로 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요. 현실의 역사에서 국가간에 힘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그 당시 실행범 48인의 집단정신을 세뇌시켜 명성왕후를 시해해도 되는 존재로 여기게 만든 '조선 침략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을 계승한 기도와 이토 히로부미의 라이벌 야마가타와 같은 핵심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수정 삭제
불타는공님 뭐밍... 아연 09/09/16 [13:38]
물론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
흥선 대원군과 조선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명성황후를 암살 용의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암살할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죽이고 그 죄를 조선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한겁니다.
일본이 의도한대로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겁니까? 수정 삭제
여기에도 2ch같은 사람들이 있네요... atacms1 09/09/16 [22:20]
황당하군요...
여긴 좀 오염된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리플 보니 어의 없군요...
명성황후의자신에 대한 평가는 제쳐 놓고라도 일본인에게 살해당한건
명백한 사실인데 그걸 아니라고 주장하는 황당한 사람이 있다니...
이런식이면 유태인 학살도 거짓이라고 주장하겠군요... 수정 삭제
왠 쪽발이 몇몇이 설치네 사실과위장 09/09/17 [06:10]
http://yuksa.new21.org/zboard/view.php?id=hisbo&no=88

[러시아측 자료로 본 명성황후 시해사건]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왕후는 갑자기 회랑(궁궐 내의 복도)을 따라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속으로 운구해 갔다.
수정 삭제
불타는 공님.. 안드로메다에서 이제 도착하셨음? 여긴 어딘가 09/09/17 [11:41]
여긴어딘가.... 수정 삭제
섬나라 원숭이들 뭐지? 쪽발이 많네 09/09/17 [17:58]
섬나라 원숭이들 왜 들어와서 설치는 거죠?
2ch에나 가서 십어 되지,,,
근데 한국말 잘하네.혹시 미즈노 개새끼인가?ㅋ
한국에 관심끄고 니네 나라나 걱정하세요. 수정 삭제
불타는 공님은 일본분이시요? 에쎄 09/09/19 [14:48]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에 남아있다... 즉 기록이 있으니까 조선인 죽인거다?
기록을 그렇게 중요시 하는 사람이 독도는 왜 일본땅 우기죠?
우리는 예전의 기록에도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나와 있고 일본 기록에도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문서가 있는데.. 이런 불리란 기록은 신빙성이 없고
일본에 유리한 기록은 진짜 인거 처럼 말하는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수정 삭제
복수의 칼 상상 09/09/27 [13:22]
이런 열기 속에서도 아무도 쪽바리들에게 천배 만배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자는 말이 한마디도 없으니 잡귀들이 설치는 구나 수정 삭제
제2차 일본열도정벌을 해야 한다. 평양택시 09/09/28 [10:58]
이제 몇십년후 일본열도정벌을 거행해야 한다. 수정 삭제
불타는공 민비가 아니고 명성황후라고 해야지. so cool 09/12/26 [14:03]
단어부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 드러나는군요... 수정 삭제
어! 10/02/23 [21:03]
아 그렇구나 하고 읽고 있는데 기자분님 이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것 같아 생각해보는데 책 내신 분이군요! 수정 삭제
쥐뿔도 모르면.. 불타는공 10/06/05 [18:27]
가만히 있어요. 그건 대원군파와 명성황후파 대립에서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것이 조선 주권 보존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 몇몇의 사람들의 일부 도움이 있었던 것이었을 뿐, 그들이 주모자급이란건 참..웃기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아니면 말을 마시길. 님같은 사람들보면 책을 한 권도 안읽은 사람보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무섭다는 말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겠네요. 쯧쯧. 수정 삭제
당신이 말하는 조선실록이 고종실록이라면... 미친 불타는공 10/06/30 [14:48]
일본이 쓴거란다...이 계두야....ㅡ,ㅡ
아!!!!!좋은글 잘 읽고....덜떨어진 계두 녀석 땜에....아 열받어.....ㅍㄷㄻㅇㅍㅊㅁㄴㅇㄿ 수정 삭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역시 아내는 일본인 10/10/21 [09:14]
일본에 살면서 양심적인 일본인은 있었구나!! 라는 것을 느끼면서 하루라도 일본정부가 과거의 저지른 일들을 속시원하게 털어놓았으면 하네요.. 그리고 대원군파 vs 명성황후파 대립이 명성황후를 죽게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불타는 공님..이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속임수이자 계략인걸 모르십니까?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면 평소 명성황후를 잘 알거나 궁궐 출입이 가능한 엘리트, 양반 가문 이상인 사람들이죠.. 그리고 궁궐에는 당시 호위무사들도 많아서 보통실력과 인원으로는 쿠테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즉 궁궐내 조선인들중 은밀히 창씨개명한 친일이 존재하였고 그리고 그 넘들이 일본인들과 무리가 되어 패륜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만, 그러나 소수의 친일이 가담했다고 해서 조선인이 죽였다고 봐야될까요? 시발점은 누가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냐?는 거죠. 명령을 내린 사람과 명령받고 움직이는 사람중에 누가 책임이 크냐?는 것을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미 일본에서 자신들이 명령을 했다는 증거도 나오고 자백하고 있기에 불타는 공님이 말씀하시는 내분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정 삭제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본인 선량한일본인?? 11/07/03 [14:44]
조선인이 명성황후를 죽였다? 에조 보고서에 따르면 왕비를 발가벗기고 국부 검사를 했다고까지 나옵니다. 당시 영국 영사관의 보고서도 남아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항상 역사를 조작하지요. 과거 기원전 3만년 정도이던 일본 역사를 지구상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까지 올렸습니다. 기원전 30만년 전으로 공인까지 받았습니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기원전 50만년으로, 또 기원전 70만년까지 올리려다가 들통났지만 말입니다. . 하긴 천황이라는 인간을 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부터가 비과학적인 태도입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의 종가제도를 비합리적이라 비난해도 자신들의 천황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뭅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서양의 신무기를 빨리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조선과 주변국들을 약탈하여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지 일본의 문화와 문명이 수준 높아서가 아닙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과거 아시아를 침략하며 주름잡던 자신들의 힘에 맞게 역사에 조작을 가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결코 UN 상임이사국이 되지 못할 겁니다. 수정 삭제
그거참 불타는공님.. 그거참 뭐 12/03/02 [00:41]
일본과의 관계를 걱정해서 인가? 한국사람들이 일본에 나쁜감정을 갖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라면 좀 잘못된 방식인듯 하네요. 얼른 바로 잡을건 바로잡고 사과도 받고 한다면 지금보단 훨씬 더 나아질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님 말씀처럼 일본을 두둔하고 모든것이 조선의 잘못이다 하는 방식은 그닥 옳지 않은 방법인거 같습니다. 언제까지 언발에 오줌누면서 미봉책으로 일관해 관계개선을 바란답니까? 제 생각엔 지금의 한일간의 골이 말 한마디에 고개 끄덕이며 해소될 정도로 가벼운건 아니라 생각하는데...현실에 대한 직시 능력이 없으면 스스로 대안이라 판단하는 것들을 좀더 구체화 시키고 대한민국과 일본이 당면한 현실에 맞추려 노력해봐야 하는게 하는거 아닌가요?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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