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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극장판:Q' 개봉, 日팬 반응 폭발적
'에반게리온 Q' 2012년 오프닝 흥행수입1위 기록
 
이동구 기자
극장판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Q'가 지난 17일, 일본에서 개봉했다. 애니메이션 팬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보도에 따르면, 극장판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Q'의 공개 이틀째 흥행수입이 11억 3,100만 엔에 달했다. 이는 올해 개봉한 영화 오프닝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이다. 7월 13일 개봉한 영화 'BRAVE HEARTS 우미자루(海猿)'가 개봉 이후 3일간 약 11억 1,900만 엔의 흥행수입을 기록했는데, 이를 뛰어넘은 것.  
 
에반게리온의 개봉 이후 이틀간 동원 관객 수는 약 77만 1,800명으로, '우미자루'의 개봉 3일간 87만 5600명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에반게리온의 경우, 할인티켓 발매를 억제했기 때문에 흥행수입에서 1위를 기록했다. 하루가 부족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프닝 1위를 기록해 재차 인기작의 힘을 보여줬다.
 
'에반게리온 극장판'은, 1990년대 붐을 일으킨 TV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기초로 한 4부작이다. 'Q'는 그 세번째 작품으로 17일에 개봉했는데, 도쿄 도내의 영화관에서는 첫날, 이튿날 연속으로 만석을 기록했다.

 
▲ 에반게리온 극장판 '파'부터 나오는 새로운 케릭터 '마키나미' ©JPNews/야마모토 히로키




 

ⓒ 일본이 보인다! 일본전문뉴스 JPNews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기사입력: 2012/11/20 [09:34]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다 좋은데... 꽃놀이패 12/11/20 [12:22]
인간적으로 마지막 사진의 코스프레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 이러지말자...-_ - 수정 삭제
우리에게 고길동을 돌려달라! 아기공룡 둘리 12/11/20 [22:58]
때로 지능의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인류는 자살해야 하는가? 논리적으로 아주 간단한 귀결이다. 허공에 점 하나를 찍어놓았을 때 그곳을 정점으로 하는 가상의 피라미드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상태이다. 상상의 눈을 통해 숨은 외형을 볼 수 있건, 없건 자라나는 생명의 의지는 밑의 층부터 순차적으로 채워나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찍어놓았던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 껍질이 깨져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다.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그래서 정점은 언제나 압제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행동한 이유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점을 찍어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이 무엇인가? 어떤 거창한 명분을 붙여도 좋다.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국가를 위해? 인민을 위해? 왕한테 충성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기 위해? 뭐든 좋다. 아무튼 목표로 하는 인간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체제가 필요하다. 오직 체제만이 인간을 안정되게 양육할 수 있다.

원시인들은 밤에 들짐승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굴로 들어가 숨었다. 거기에서 불을 피웠다. 하잘것 없어 보이는 이 부락이 오늘날 애플과 맞먹는 거대기업의 싹인 셈이다. 어머니는 따뜻한 털가죽으로 둘러쌓인 속에서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고, 남편은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해왔다. 그리고 아내들은 밤에 ... 응응... 을 통해 생산을 했다. 그렇게 부족이 커지자 굴은 좁아졌고 부락은 들판으로 나왔다.
이 시대가 싱싱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체제를 확장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식구가 늘면 짐승 한 마리 대신 두 마리를 잡아오면 된다. 입이 더 늘면 말 대신 맘모스를 사냥하면 된다. 맘모스는 위험한 상대이다. 하지만 입이 늘어난 만큼 부락의 힘도 세어졌다. 그래서 맘모스를 때려잡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후세인과 카다피를 때려잡는 일보다 훨씬 쉬웠다. 이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다. 모델은 굉장히 성공적이어서 인식의 지평선을 땅 끝까지 넓혀놓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견됐다. 이제 뭘 하면 좋지? 맘모스가 안 보인다. 앞으론 무얼 먹고 살면 좋단 말인가?
부락의 힘은 여전히 강대하다. 하지만 사냥감이 부족하다. 맘모스가 멀리멀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말을 사냥할 수는 없다. 맘모스보다 고기가 덜 나올 것이다. 그래도 사냥은 해야 하겠지만, 부락은 배를 곯을 것이다. 누가 이 사태를 책임질 것인가!

누군 누구야? 당연히 맘모스를 몽땅 잡아먹은 너희들 책임이지. 체제에는 언제나 숨겨진 목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밑바닥부터 자라난 생명의 의지는 정점에 도달한 순간 자신을 깨뜨리고 밖으로 터져나온다. 이 때 밖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원시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금새 찾아냈다. 보라, 여기에 고기가 있다. 맘모스 대신 먹을 고기가 가득 놓여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보라, 이것도 고기 아닌가? 우리는 우리를 잡아먹고 살면 된다.
모순이다. 너무도 완벽한 체제의 모순이다. 애초 이 체제는 인간을 길렀던 것이지, 고기를 길렀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냥을 떠나야 하는 인간들은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나 - 상대 또한 나와 같은 인간이다.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를 잡아먹을 수 없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인간이다. 이 순간 지평선을 향하고 있던 인식의 힘은 자신을 궤뚫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메리카 사람들이 맘모스 고기부터 팔았던 것이다. 보라, 맘모스 고기를 먹으면 누구나 이렇게 될 것이다. 인식의 힘을 자신에게 돌려라. 그러려면 쥐 고기나 닭고기, 말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반드시 맘모스 고기부터 먹어야 한다. 그래야만 같이 사냥을 떠날 수 있고, 배를 불릴 수 있으며, 배가 꺼졌을 때 같은 고민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들고 있던 쥐 고기를 내려놓아라. 그것은 범죄행위이다. 고민을 하려면 먼저 배부터 불려야 한다.
덕분에 세상 사람들이 맘모스 고기를 포식했고, 잔치를 벌였으며, 감사하게도, 그들과 같은 고민을 할 기회를 또 다시 안게 되었다. 물론 쥐굴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맘모스 고기와 맞닥뜨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전 쥐굴 속에서의 생활도 다 잊어버렸는데, 몸에 맞지도 않은 맘모스 가죽을 두르고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항상 이렇게 극적으로 풀리지도 않는다. 맘모스 고기를 팔았던 사람들은 인식을 자신에게 돌리라는 충고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맘모스가 사라졌으니 예전만큼 강한 힘이 필요없다. 쓸모없는 자를 죽여서 돌아오는 식량의 양만 늘리면 된다. 그래서 죽였다.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기술적인 용어로 다운사이징이라고 부른다. 삶에 계산이 들어오자 문제의 풀이도 간단해졌다. 대신 그만큼 인식이 자신을 궤뚫는 빈도 또한 잦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끊임없이 혁신을 요구하고, 창조를 요구하고, 변화를 요구한다. 그런데 목적이 무엇인가? 그 속에선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오직 하나의 반응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삶이 전쟁이 되어버렸다. 서로에게 끊임없이 생각을 주입한다. 노력하면 너희도 우리처럼 될 수 있다. 들판에 널려있는 맘모스 고기를 한 번 보라. 마음만 먹으면 너희도 그것을 가질 수 있다. 사냥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달라. 우리는 이렇게 간단히 사냥을 하고 있는데, 동물복제기술과 원자력발전의 에너지로 빚어진 저 멋진 사냥감이 탐나지도 않는가?

이제 너희도 같은 고민에 빠질 것이다. 맘모스 고기를 나눠준 자들을 찬양하라. 이것은 권력이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어찌 맘모스 고기를 포식한 뒤 인류 절멸이라는 위대한 고민을 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보다 큰 책임을 가진 자들에게 보다 큰 권력을!
그래서 사람들이 보다 큰 책임을 안으려고 서로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중이다. 어찌할 셈인가? 만일 내 계산이 맞다면 이번에 죽어야 할 차례는 나다. 앞서 인디언을 죽여가면서 프런티어 정신을 발휘했으니, 상대가 뉴 프런티어 정신을 발휘한다면 대상은 분명 내가 될 것이다. 뭔가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의 잣대가 상대의 잣대를 이기지 못하면 가장 큰 책임을 맡을 것이다. 상대가 침을 흘리면서 나를... 아니, 잣대를 들여다보고 있다.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 자가 제일로 길다!"

봐, 보라구!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잣대를 늘려버리는 것만으로 대적하는 모든 상대를 간단히 제압해버렸다. 이 사람을 죽이고, 저 체제를 무너뜨리고, 때로 전쟁에서 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들고 있던 자의 길이는 점점 길어져갔다. 그래서 마침내 누구도 당하지 못할 길다란 자로 발전한 것이다.
낑낑, 자의 끄트머리에 올라앉아 하늘에 점을 찍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당신이 상상의 눈을 통해 숨은 외형을 볼 수 있건, 없건 간에 밑에서부터 자라는 생명의 의지는 정점을 향해 치솟아 올라가는 중이다. 더 이상 자의 길이에 도전하려는 자도 없고, 도전할 수도 없는 판에, 써드 임팩트(Third Impact)의 충격은 어찌 감당할 생각인가? 남한과 북한은 이미 서로 다른 의미에서의 공룡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것은 누구의 자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길이가 얼마가 됐건 하늘에 점을 찍어 파생된 체제는 필멸을 예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생명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자연은 목표로 하는 인간상을 묵묵히 양육할 뿐이다. 기술과 확률, 통제와 이데올로기 속에 숨겨도 소용없다. 정점에 들어서는 순간 체제는 반드시 깨져나간다. 완성된 직후 밑에서부터 들어올려지는 단 하나의 새싹에 의해 전체에 균열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물의 주재자인 인간은 이 체제를 채울 것인가, 아니면 비울 것인가? 채우는 것이 목표지만 스스로의 안위를 위협하고, 비움이 바람직하지만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체제는 사전에 이와 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목표로 하는 인간상을 최대한 양육하면서도, 그 중 일부를 골라내 짓밟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성을 기르고자 하면서도 학생들을 입시지옥에 몰아넣지 않을 수 없고, 취업자 수를 늘리고자 하면서도 실업자부터 양산하지 않을 수 없으며, 방사능 피해를 입지 않고자 하면서도 원자력발전소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체제가 안고 있는 숙명적인 모순이다.

전쟁이나 제노사이드, 금융이나 교육과 같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브레멘의 악대와도 같아서 당나귀와 개, 고양이와 수탉을 어떻게 배치하건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없는 까닭과도 같은 것이다. 도리어 한 번 자세를 바꿀 때마다 금쪽같은 기회만 사라진다. 애시당초 짐승의 손에 악기가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울음소리 밖에 연주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건설된 체제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중세유럽에서 왜 300만의 인간이 화형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모르고 있었는지 몰라도, 꿈꿔 왔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식으로 건설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반복되는 일 또한 가능해야 한다. 하면, 홍수전의 태평천국과는 무엇이 다른가? 믿음 또한 하나의 잣대에 불과하다. 당신이 어느 곳에 점을 찍건 하나님은 그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을 텐데 무슨 수로 절대자의 의지를 따라잡는단 말인가? 외곽과 경계를 가늠할 수 없으니 인간이 설계할 수 있는 체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되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 바람에 잣대의 길이만 길어졌다. 체제의 크기가 커져간다. 복잡해지고, 위험요인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어버렸다. 보다 많은 죽음을 예방하기 위해 사랑을 주문처럼 외워대며 학살을 태연히 자행한다. 그들은 내일 더 큰 책임을 안을 것이다. 잣대의 길이를 더는 늘릴 수도 없는 처지이다. 그 때부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직접 심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밑바닥에서부터 잘못된 씨앗을 잉태했다고 믿었고, 마녀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가 마녀처럼 보이는가?

물론 이렇게 옹호해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 유럽의 언어는 불행히도 소리문자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소리문자는 뜻문자에 비해 변천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르다. 알파벳 26자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영어도 되고, 독일어도 되며, 프랑스어도 된다. 하나의 소리값이 더해지고 탈락됨에 따라 문자의 뜻에도 변동이 뒤이은다. 단순히 단어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문법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소리값의 조합을 엄격히 관리할 필요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당연히 유럽문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라틴어를 숭상했겠지. 문맹이 많은 시대였는지라 다른 지방의 언어는 보잘것없어 보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여기에만 치중하다 보니 나중에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할 때 박해했을 수도 있다.
법의 전해짐에 일그러짐이 있을까 우려했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문자라 할지라도 잣대에 불과한 것이다. 보존해야 할 것은 뜻이지, 소리가 아니었다. 뜻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집착하다 보니 어느 틈에 그릇에 정신이 팔렸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본 애들이 이렇게 제 정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얘들 미쳤다고! 이게 어디 사람이 보는 만화야? 누가 이렇게 만들었니?

"아빠, 내가 아빠처럼 못 돼서 실망했어?"
"아니다. 네가 이 아빠처럼 되려고 해서 실망한 거란다."

... 라며 눈물 짜는 쑈나 보여주기 전에 잘 들어보아라. 뜻문자를 사용했던 동양에선 예로부터 이기(理氣)론이 발달했다. 자고로 세상을 향한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기 위해선 뜻과 소리부터 분별해야 하는 법이니, 둘이 뒤섞일 경우 자칫 독단과 아집으로 흐를 염려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천하의 중생을 다 구제하기 전까진 자기희생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제 정신이겠으나, 만천하의 중생이 다 구제되는 꼴을 보기 전까진 남을 희생시키는 짓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자가 있다면 이게 제 정신이겠는가? 앙? 서양.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스웨덴의 여류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소설 '말괄량이 삐삐'를 재미있게 읽어보았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신나게 생활하는 귀여운 아이를 보고 홀딱 반하여 삐삐처럼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것을 근거로 학교에 안 간다고 떼를 쓰면 엄마한테 얻어맞겠는가, 안 맞겠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온 세상의 학교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어린이를 구해줘야지, 하고 다짐하는 자가 있다면 테러리스트의 명단에 올라가지 않겠는가? 더욱이 심각한 건, 실제로 이 계획이 수행된 뒤에 다른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못 보자 직접 풀솜할머니를 찾아가 따졌다는 사실이다.

"할멈! 당신이 쓴 이 책은 뭔가 잘못되었어!"

뜻과 소리, 씨앗과 껍데기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결과이다. 물론 서양 문자로도 뜻과 소리는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남한에서 보면 독도, 일본에서 보면 다케시마, 미국에서 보면 리앙쿠르암이다. 인식을 가늠하는 주체가 정확히 어느 곳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해석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로 인하여 세상에 구분지음이 생겼으니 자연히 이쪽이 귀하고 저쪽이 천하다는 발상이 나왔다. 이것이 주리(主理)론이다. 그런데 같은 사안을 달리 해석하여, 나의 존재로 인하여 세상에 구분지음이 생겼으니 이쪽이 능동적이고 저쪽이 수동적이라는 발상도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주기(主氣)론이다. 서양은 이 둘이 다르다고 보는가? 서양식 표현으로 따지자면 주리론은 보수우파, 주기론은 진보좌파쯤 되겠다. 그런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자석의 N극과 S극을 갈라보라. 한 덩어리가 N극, 다른 한 덩어리가 S극이 되는가? 아니다. 꼬마 자석이 둘 생긴다. 이렇듯 뜻과 소리는 한 덩어리로서 떼어낼 수가 없다.

여기까지는 피차일반이다. 이와 기의 구분법은 서양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운용방법이다. 내면에서 뜻이 사라졌을 때 소리는 당연히 사라지지만, 소리가 사라진다고 해서 뜻도 같이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가?
방금 엄마한테 학교에 안 간다고 떼를 쓰다가 얻어맞아서 심통이 났다. 삐삐를 미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말괄량이 삐삐' 이야기는 우주 멀리 저 멀리로 사라져버렸다. 뜻이 사라지자 소리가 좇아서 사라진 결과이다. 하지만 엄마가 동화책을 빼앗아 불 태운다고 한들 한 번 가슴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꿈마저 사라질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서양은 그렇게 보았던 듯 하다. 그렇지 않고선 신교와 구교가 서로의 성경을 불 태울 리 없기 때문이다. 왜일까? 왜 이런 미친 짓이 발생했을까? 이 질문이 오늘날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인들이 너희들 때문에 앓고 있는 정신병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해석을 힘으로 바꾸고자 하는 정신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본래는 하나의 뜻으로부터 서로 다른 소리값이 나와 융통됨이 정상이겠으나, 서양에선 어찌 하나의 뜻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소리값들이 서로 다른 뜻으로 분열되어 나갔는가? 뜻 아닌 소리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추해보건대, 본래 구교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뜻이었지만 신교 입장에서 보았을 땐 소리였고, 신교가 빼앗으려고 했던 것은 소리였지만 구교 입장에서 보았을 땐 뜻이었던 셈이다. 앞서 있는 것이 뜻인지, 소리인지 모르는데 구분을 지으면 무얼 하나? 뜻과 소리를 연관지을 수 있는 주체, 즉 세상 만물에 대한 인식의 기준이 되는 주체로서의 '나'가 특정 집단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동양에서도 비록 지식인들이 한자를 배워 운용했지만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한자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다. 한자는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아무나 줏어다가 소리값을 붙여서 사용했다. 대신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자칫 정체성을 잃고 중화의 인력권에 휩쓸려 들어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인식의 기반이, 성경을 운용하는 주체인 교황청으로 통일돼있던 서양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동양에선 수도사가 대신 지켜주지 않았다.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각자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만 했다.
한자에 소리를 붙여서 사용했던 한반도의 이두와 향찰, 일본의 가나문자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사실이다. 뜻이 발한 뒤에 소리가 올라탄다는 단 하나의 진리 -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담고 있지 않은가?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느니라..."

성경에서 언급한 이 구절이 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기는 한데, 원문을 읽고자 하면 라틴어를 알아야 하고 라틴문자는 소리문자이다. 그 소리문자체계를 쥐고 흔들었던 주체가 수도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양이 이천 년 동안 성경책 한 권을 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해석할 소리값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소리가 앞서자 목적을 잃고 말았다. 껍질부터 뿌려놓고 뜻을 담아오라고 닦달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마저도 서양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껍데기로 문제를 풀려 하였다. 그래서 영혼이 슈트 속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력으로 모래성을 쌓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나폴레옹 황제 이래 헌법이 제정되고 근대교육제도가 발달하자 비로소 문맹률이 떨어지고 지평선으로부터 눈을 돌려 내면을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수도원을 대신해 인식의 기초를 제어할 수 있는 주체가 하필이면 황제였다. 그래서 근대유럽이 제국주의로 치달았는지 모른다.
반면 동양에서 제국은 거추장스럽기만 한 존재였다. 제국 자신에게도 거추장스런 존재였다. 중국이 제국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 아무리 오지 말라고 막아도 꼭 덤비는 놈들이 있어요. 하지만 자아가 껍데기에 머물러 있는 이상 한 문자의 뜻도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한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리어 덤비는 쪽이 포획되어 중화에 종속되어 버렸지.

제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들고 찾아와도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직도 기술이 빚어내는 허깨비에 맞춰 인간을 춤 추게 만들 속셈인가! 나중에 파티가 끝났을 때 어떻게 정리하려고 그러니? 기술이 그렇게 위험한 것이다. 하늘로부터 강림하며 인간을 신처럼 조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무적이라고 착각하지. 한낱 기술이 만든 슈트에 불과한데.
현대에 들어와서 서양은 교황이 황제로 바뀌었을 뿐 뜻과 소리, 인식과 사물을 연결짓는 기반이 유사했기 때문에 유물론이 발달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유물론에 따르면 인식이 지평선을 만나기 전까진 맘모스를 잡아먹는 체제 아래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당연히 맘모스가 사라진 뒤 굶어죽는다는 사실도 모르게 되지. 포식이 자아를 들여다보는 데 방해가 됐을 것이다. 인식의 창이 밖을 향할 수밖에 없으니까.
반면 조선과 일본에선, 특히 조선에선, 중화에 포획되어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보통 몸조심을 했던 게 아니라고. 여진이고 거란이고 지금은 다 사라져 없어져버린 거 보면 몰라? 경고하는데, 서양. 중국의 한어병음체계가 어느 문자로 이루어져 있게? 맞닥뜨린 인식의 창은 필경 어느 순간엔가 자신을 찌를 것이다. 그래서 내면이 고요한 자는 최후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것이 뜻인지, 소리인지 구분 못하면 이와 같은 위험을 안게 된다. 대략 이 지점에서 일본의 전체주의가 서양의 파시즘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는 듯 하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아시아 민족의 끈질김은 주체적으로 획득한 인식체계를 지키고자 했던 의지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나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서로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위라고. 만법이 곧 법이다! 내면을 향하고 있는 인식의 창은 성경 하나만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대동아공영권을 달성했다면 일본 역시 금나라의 뒤를 따랐을지 모른다. 고스란히 정체성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서양은 사물에 대한 인식만을 주체적으로 획득했을 뿐, 인식체계를 독립적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노력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마저도 위키피디아 같은 기술문서에 의존하고 있지. 하지만 이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이냐 하면, 제국이 확장되는 동안 문명의 기반이 되는 인식체계의 견고성은 반대로 약해지는 것이다. 서양이 어떤 위기에 처해있는지는 민족의 정신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언어만 관찰해도 알 수 있다.

오늘날 영어는 천하에 유통되는 문자량의 6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만에 하나 그 가운데 하나의 단어라도 빠져서 한 소리라도 바뀐다면 그것도 영어라 하겠는가? 알파벳 하나 바뀌는 순간 새로운 문법구조가 탄생하는 셈이다. 그래서 서양에선 언어의 변천이 빨랐고, 셰익스피어가 써준 죽은 언어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지금 제국은 엄청난 위기를 맞고 있다.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촉발된 계산에 의해서. 없애고자 했던 잣대가 내부에서 자라고 있지 않은가? 즐겨 맛보던 맘모스 고기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이제야 서로의 얼굴에 불빛을 비추어보며 대관절 무슨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지?
설령 지구상에서 모든 인간들이 한 날, 한 시에 사라진다 해도 땅이 남아있는 한 그리고 태양이 뜨고 지는 한 생장이 이루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땅을 어머니요, 하늘을 아버지라 일컫는 것이다. 땅의 의지가 예정되어 있는데 하늘의 의지가 꽂히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소리가 뜻을 앞서는 경우란 이 하나로 족한 것이다. 모름지기 땅을 하늘만큼 소중히 여겨달라. 이것이 천리이다. 이것이 법칙이다. 창조주께서 허락해주신 소중한 기회가 이토록 넓게 펼쳐져있는데 인류가 구태여 외면하고 자살을 택함이 옳겠는가? 저기 저 공중에 찍어놓은 점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이더냐?

... 목적이 무엇인가? 여기에 답을 못 한다면 직접 올라가서 매달린 구슬을 따올 것이요, 답을 하겠다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 것인지 손가락으로 가리켜 물어보겠다. 그런 뒤 그곳에 나를 끼워맞추는 일을 겁내지 않으리. 어차피 나는 공룡이니까! 호잇! 호잇!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우웅~~ 알 수 없는~~ 수정 삭제
보고싶다. 르르르 12/11/21 [01:43]
한국에서도 해줘~ 수정 삭제
열도내에서만 폭발. ddd 12/11/24 [13:38]
한국에서는 네타로 인해 반응 별로.ㅋ
그이외의 외부 세계는 열도상황에 대해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ㅋㅋㅋ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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