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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친, 옛 남자친구를 만나다 (9부)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9부)
 
박철현 기자
(이 글은 연재물인 관계로 처음부터 읽지 않으시면 이해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오타쿠(1부)
헌책방(2부)
걱정(3부)
이별(4부)
한국남자(5부)
바둑(6부)
동거(7부)

관계(8부)

2002년에 들어서면서 '나에겐' 좋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먼저 아르바이트였다. 아르바이트 따위에 뭘 그리 흥분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아르바이트가 일본온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게다가 일본어가 그다지 능숙한 것이 아닌 유학생은 감이 엄두도 못낼 종류의 일이었다.

게임회사의 플래너.

물론 어시스턴트 플래너였지만, 그래도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smei)가 기획한 꽤 대작게임이다. smei에 들어간 건 아니다. smei는 기획 및 발매원이었고, 실제 게임개발은 '오피스 다이나마이토'라는 게임전문제작사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캐릭터 설정이나 그림콘티등을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운이 좋다' 혹은 '나쁘다'는 건 이미 잊고 있었던 일이 지금 바로 이순간, 생각치도 못했던 순간에 불현듯 현실로 나타날 때 쓰이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 이 아르바이트는 '이때'만 하더라도 당연히 전자의 영역이었다. 왜냐면 이쪽이 아무 말도 안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구인의 손길을 뻗쳐왔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일본으로 오기전 한국에서 몇개월간 게임회사를 다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일본인 디렉터 m씨가 6개월만에 메일을 보내왔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일본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도 지금 한국파견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가 어드벤쳐 게임개발을 진행중인데, 이 게임이 플래그 성립후의 무비연출이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박상이 학교 끝나고 여기와서 아르바이트도 할 겸 연출콘티 좀 그리면 어떨까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m씨가 메일주소를, 아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또 감격스러웠다. 왜냐면 내 일본어 실력이 어느정도인지 잘 아는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6개월이라는 기간이 있었지만 그 안에 늘어봤자 얼마나 늘었겠는가.

 
m씨에게 연출실력만으로 나를 기억해주고, 또 뽑으려 한다는 것은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너무나도 기뻤던 나머지 이 메일 내용을, 아직도 근무중인 아내에게 알렸다. 이런 메일이 왔다고. 와우! 나 어떡하면 좋냐고. 물론 마음속으로는 이미 이곳에 다니기로 결정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아내의 '어머, 오빠 최곤데. 게임회사라니!! 너무 멋져!'류의 추임새를 기대하고 있었던 거다. 이런, 속물같으니라고. 이런 내 심정을 눈치챈 걸까? 아내는 금세 문자를 보내왔다. 하지만, 아내의 문자는 건조했다.  

"게임? 플래그 성립후의 무비연출?... 역시 오빠는 오타쿠였군. 쩝."

아내의 의외의 반응에 놀래 다시 문자를 보냈다.

"어? 그럼 관둘까?"

물론 관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있잖아. 플래그 성립후의 무비라면 렌더링된 영상을 말하거든. 리얼타임과는 다르기 때문에 하드 부하를 생각하거나 클로즈 폴리곤(closed polygon)과 오픈 폴리곤(open polygon), 위상기하학(topology) 따윈 염두에 두지 않아도 돼...어쩌구 저쩌구'

원래는 위와 같은 내용으로 아내를 설득시키려고 했는데, 아니 실제로 조금 입력시켜 봤는데 써놓고 보니, 아내가 걱정했던 오타쿠적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또 이 문자를 받고 혹시라도 역질문, 예를 들어 '클로즈 폴리곤하고 오픈 폴리곤의 차이가 뭐야?' 따위의 질문을 해오면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감도 안왔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다면 "리얼타임이 아닌 렌더링 영상은 거의 영화의 연출과 비슷하니까 전공살리는 거야"라고, 충분히 아내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내의 업무시간. 일이 끝나려면 아직 2시간이나 남아있다. 그래서 "그럼 관둘까?"라는 넌지시 마음을 떠보는 간단한 문자를 보낸 것이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문자가 왔다. 오늘은 그쪽 부동산 회사도 손님이 없나 보다. 하긴 신년연휴 끝나고 부동산 찾아보러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아내의 재답장은 아주 간단했다.

"끝까지 읽어. 하하"

알고보니 첫줄에 "게임? 플래그 성립후의 무비연출?... 역시 오빠는 오타쿠였군. 쩝"이라고 적어놓고 엔터키를 수십번 친 후 진짜배기 본론을 집어넣는 장난을 쳤던 것이다. 지금도 아내는 그런 장난을 잘 치는데, 도대체 뭐하러 그런 짓 하는지 이해가 안될 때가 많다.














...보라구. 조금 해봤지만 아무 의미 없잖아?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 손목의 관절만 아려올 뿐이다. 그때도 그랬다. 하나도 재미없는 짓을 왜 하지라는 생각으로 메뉴키 아래 보턴을 한동안 누르다 보니 아내의 메시지가 떴다.

"오빠! 취직 정말 축하해! 게임소프트웨어 제작이라니, 너무 멋진거 같아. 오빠도 나중엔 게임에만 머물지 말고, 사토 마사히코(佐藤雅彦)같은 장르를 넘나드는 크리에이터가 되길 기원할께. 오늘밤엔 기념으로 i.q나 하자. 하하하"

이 메시지만 보자면 아내가 더 오타쿠스럽다. 아니, 사실 그랬다. 아내는 오타쿠처럼 어느 한분야의 전문성을 필요이상으로 강조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독특했다. 나도 내딴엔 얼터너티브적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아내의 서브컬쳐적 마인드에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 <광고비평>의 표지   © 광고비평 
일테면 이런 거다. 아내는 <광고비평>을 정기구독하고 있었고, <tv가이드>가 아닌 <tv브로스>를 매주 샀으며, "덴키그루브"나 "스짜다라파"의 모든 앨범을 소유하고 있었다.
 
"유라유라테이고쿠"의 콘서트에서 그 파괴적 일렉트릭 사운드에 고통받던 내가 안스러웠던지, 아내는 그 다음날 위로한답시고 "지골로"의 심야 라이브에 나를 끌고 갔다. 
 
아내는 또래의 일반적 여성들이 대부분 좋아했던 smap를 정말 싫어했었고, 매년 안기고 싶은 남성 1위에 뽑혔던 기무라 다쿠야는 싫어하다 못해 경멸했다.

 
아내는 어드벤쳐나 rpg를 즐기는 게이머들을 '오타쿠'라 부르면서, 정작 당신은 유유히 xi(사이), 뿌요뿌요 등의 퍼즐게임을 밤새도록 즐기기도 했다. 아내 왈 "퍼즐게임은 머리가 좋아진다는 장점이 있어"서 rpg 따위(?)와 비교하면 안된다고 한다.  

아내가 위 메일에서 말한 사토 마사히코는 "i.q매니아"라는 불세출의 퍼즐게임을 만든 cm 디렉터이면서 지난 8년간 우리의 아침을 열어주는 교육방송의 전설적 프로그램 "피타고라스윗치"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즉 아내는 내가 어차피 게임업계에 투신한다면, 사토 마사히코처럼 장르를 넘나드는 훌륭한 미디어 크리에이터가 되라고 격려한 것이다. 아내식으로 말이다. 물론 그날 밤새도록 i.q를 즐겨야했지만 말이다.
 
두번째 좋은 일은 '갑자기' 일본어 실력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노력을 해야 늘어나는 어휘나 문장, 회화, 문법이 좋아졌다는 게 아니다. 축복은 어느날 아침 여느때와 다름없이 m역에서 s선을 탔을 때, 갑자기 닥쳐왔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일본어만 담겨있는 회화 테이프를 소니 워크맨 플레이어에 넣고 시작 보턴을 누르는 순간, 테이프 속 캐릭터들의 외계어같은 일본어가 모조리 들리는 것이었다. 쉬운 회화는 물론, 상당히 어려운 회화도 전부 들려왔다. 마치 모국어처럼 말이다. 물론 뜻을 모르는 단어는 아직도 많았지만, 이들이 어떤 발음을 구사하고 있는지만큼은 전부 알 수 있었다.
 
설마하는 마음에 정차역인 n역에 내려 역안내원의 스피커 소리, 개찰구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역원과 손님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워봐도 역시 다 들렸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가 전부다 들렸을 때, 그 기분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이때부터 내 일본어 실력은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다 들리니까, 그 문맥상 모르는 단어는 물어보면 된다. 설명을 해주면 대강 감이 잡히고 그 설명 안에서 모르는 단어가 있다면 또 물어보면 된다. 이렇게 지식을 쌓아가면 금방 는다. 특히 나는 아내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그때 아내와 종종 이런 놀이를 했었다.
 
나) 난 준비됐어. 해 봐.
아내) 좋았어. 그럼 시작한다.
나) 응. 시~작!
 
아내) (빠른 말로) 오늘회사에서사장이갑자기쓰러져서구급차를불렀는데구급차가지저분해서사장이화냈어.
나) 오늘 회사에서 사장이 갑자기 쓰러져서 '큐우큐우샤'을 불렀는데 '큐우큐우샤'가 지저분해서 사장이 화냈어.
아내) 오! 대단한데.
 
나) '큐우큐우샤'만 모르겠다.
아내) '큐우큐우샤'는 사람이 쓰러졌을때 119 다이얼 돌리면 오는 차.
 
나) 아! 앰뷸런스!
아내) 앰뷸런스가 뭐야?
 
나) 아... 일본식으로 암뷰란스라 해야 하나?
아내) 그게 뭐래? 그런 단어 안 쓰는데...
 
나) 앰뷸런스가 없어?
아내) 응. 그냥 구급차라고 해.
나) ......-_-

 
이런 회화를 통해 일본어의 발음과 그 뜻, 그리고 상식(앰뷸런스는 쓰지 않는 단어)을 동시에 넓혀 나가게 되니까 1월 10일부터 다니기 시작한 게임회사에서의 아르바이트도 점점 수월해졌다. 언어때문에 뽑힌 건 아니지만, 의사소통이 되고 안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아무튼 나를 불러온 m씨는 물론, 오너마저 경이적인 속도로 느는 내 일본어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이 글의 서두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2002년 들어서 '나에겐' 좋은 일들(아르바이트와 일본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여기서 '나에겐'에 따옴표를 친 이유가 있다. 나에게 좋은 일이라 생각했던 이 두개가 한달이 지나면서 아내에겐 나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본격적인 프로덕팅 작업에 들어가면서 무비 콘티뿐 아니라 거의 엑스트라에 가까운 조연 캐릭터 설정을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쓴 사람이 워낙 까다로운 작가라 조연 캐릭터 설정에 어마어마한 간섭을 해왔다. 영화로 치자면 대화 한마디 없는 행인1, 행인2도 어떤 캐릭터인지, 예를 들어 60살, 여자, 어디서 자라났고, 취미/특기가 뭔지 정도는 작성해야만 했다. 그 인원 물경 600여명에 달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는데, 프로듀서를 맡고 있던 회사 오너가 "박상 일본어면 충분하지"라며 나에게 떠맡긴 것이다. 시급 900엔이었던 것을 950엔까지 올려주면서 말이다. 일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돈은 웬만한 샐러리맨 수준까지 벌게 되었지만, 한달만에, 그러니까 2월 10일부터 집에 못들어 가는 날도 생기고 그랬다. 일에 치이다 보니 아내에게 전화조차 못하는 날도 생겨났다. '나에겐' 좋았던 일이 결국 '아내에겐' 나쁜 일이 되어 버렸다.
 
"오늘도 못 와?"
"아! 전화 못해서 미안해. 지금 챕터2의 산중노인3과 낚시꾼 1,2,3 캐릭터를..."
 
찰칵. 뚜뚜뚜.
 
아내가 화가 났다. 그도 그렇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때 산중노인3과 낚시꾼1,2,3의 캐릭터 설정을 했던 날이 외박한지 2일째 되던 날이었고 내 생일인 2월 22일을 이틀 남겨둔 2월 20일이었다.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이라면 모르겠다만, "저리로 가라", "아닌가? 그럼 저리로 가봐", "......"만 프로그래밍될 '듣보잡' 산중노인 따위가 우리 둘 사이를 갈라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나는 아내와 쉽게 화해할 걸로 믿고 있었다. 2월 22일도 있으니 그렇게 믿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음날, 그러니까 2월 21일이다. 일본어 학교도 결석하면서, 졸린 눈을 부여잡고 열심히 워드질을 해대던 나에게 저녁 7시쯤 m씨가 말을 걸어왔다.
 
m) 집에 못간지 3일쯤 됐지?
나) 아... 네.
 
m) 근데 너 내일 생일이잖아.
나) 어? 어떻게 알았어요?
 
m) 한번 들으면 외우지. 2월 22일 정도는. 하하.
나) 아참, 그렇군요.
 
m) 아무튼 3일간 수고했으니까 오늘은 그만 퇴근하고 한 이틀정도 푹 쉬어.
나) 말씀은 고맙지만, 아직 안끝났는데요.
 
m) 괜찮아. 그거 그리 급한게 아니거든.
나) ......-_-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산중노인의 캐릭터 설정따위를 며칠안에 완성하라는 건, 그리고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건 좀 말이 안되는 구석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이지메였던 것 같다. 웬지 재수없던 시나리오 작가의 부하 길들이기?
 
당시 게임회사는 y선의 s역 근처에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s역에서 y선을 타고 또다른 s역에 내려 쥬오센을 탔겠지만, 이날은 빨리 가고 싶은 욕심에 무리해서 정기권 구간이 아닌 i선을 타고 k역에 내려, 쥬오센이나 s선을 이용해 m역에 내리기로 했다. 그만큼 3일이나 못 본 아내를 빨리 보고 싶었다.
 
"뚜뚜뚜..지금 거신 전화는 발신이 불가능한 지역에 있거나 전원이 꺼져있사오니..."
 
저녁 8시였다. 아내가 다녔던 부동산 회사는 6시 정시퇴근을 철저히 지키는 회사였고, 잔업이 있다고 해도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처음엔 샤워하고 있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회사를 나오자 마자 전화했고, y선의 s역과 i선의 k역, 그리고 m역에 도착해서 다시 전화를 했지만 아내는 받지 않았다. 혹시 잔업하나 싶어 부동산 회사까지 가보았지만 셔터는 내려져 있다.
 
일단 집으로 갔다. 페달을 밟고 아마 지금까지를 통털어 가장 빠른 스피드를 냈던 것 같다. 트럭에 치일 뻔하고, 유모차를 칠 뻔했다. 스미마셍을 내뱉는 그 와중에서도 머릿속엔 온통 불안한 생각만 감돌고 있었다. 사고가 난 건 아닐까라는 걱정이다. 
 
핸드폰에 암호번호를 걸어놓는 아내다. 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어버리면 근처 다른 이가 혹 아내의 핸드폰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착발신 경력 전부 가장 위에 찍혀있을 나에게 전화를 걸 수가 없다. 나에게 전화만 걸면 다 해결되는데 그게 안된다. 빌어먹을. 당장 암호번호부터 풀라고 해야지.
 
그리고 불안은 영혼은 잠식한다. 파스빈더의 영화는 옳았다. 바이에른 뉘른베르크의 소인이 찍힌 아내의 옛 남자친구의 "귀환" 편지가, 아내와 내가 식사를 같이했던 둘만의 소품이었던 앉은뱅이 탁자위에 마치 침입자마냥 널부러져 있었다. 불안에 잠식당한 내 영혼의 지령은, 밖을 뛰쳐 나가 한손으로 자전거를 몰면서, 또다른 한손으론 아내의 핸드폰 번호를 밧데리가 떨어질 때까지 눌러 대라는, 고작 그런 것들 뿐이었다.
 
4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나는 26번째 생일을 조용히, 혼자서 m역 근처의 지금은 n/c으로 이름이 바뀐 m/k이라는 파친코 가게앞에서 맞이했다. 자전거를 옆에 세워둔 채, 화단옆에 앉아 마일드세븐 슈퍼라이트를 피워 대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뉘른베르크의 소인이 찍힌, 앉은뱅이 탁자위에 널부러져 있던 그 편지 말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그 편지내용도 읽지 않은 채 무작정 뛰쳐 나왔다. 원래 다른 사람의 편지나 일기, 문자메시지, 메일 등을 보지 않는 나였지만, 이날만큼은 독일식 맥주모양의 우표와 뉘른베르크의 소인이 찍혀진 봉투 안을 엿보고 싶었다.
 
단걸음에 달려갔다. 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내로부터의 기척은 없었다. 이미 1건부터 20건까지 기록가능한 내 핸드폰의 발신번호란은 전부 아내의 전화번호로 메워져 있었지만 아내로부터의 전화는 없었다.
 
탁자위의 편지봉투를 집었다. 안을 열었지만, 2장짜리 편지를 꺼집어 냈지만, 또 몇번이고 펼치려고 했지만, 결국 펼치지 못했다. 읽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아내는 나중에 "읽었지?"라고 물어왔지만, 그리고 일부러 읽으라고 보이게끔 놓아두었다고 한다.
 
"일도 좋지만 여자친구에도 관심 좀 기울여 봐라는 교훈이 담긴 내용이었단 말야. 오빠가 언제 들어올 지 모르겠지만 설마 생일전날엔 들어오겠지라고 일부러 제일 잘 보이는데 놓아 두었는데, 어떻게 그걸 안 읽냐? 어휴. 이 고지식한 양반아!"
 
그랬다. 사실 그걸 읽었다면 나는 4시간 동안 헤맬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그 편지 안에는... 아니다. 조금 있다 밝히자.
 
따르릉 따르릉!
 
벌떡 일어났다. 꿈이 아니다. 내 둔탁한 핸드폰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번호다. 새벽 3시 30분. 이 시간에 전화 올 데가 있을리 없는데. 조심스럽게 폴더를 열었다.
 
나) 여보세요
아내) 오빠. 나야!
나) 야 넌 정말...
 
더이상 말을 잇질 못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몇시간동안 걱정했던 것, 의심했던 것, 질투했던 것, 분노했던 것, 그리고 불안에 잠식당했다고 여겼던 내 영혼은 아내의 한 옥타브 높은 톤의, 그렇다, 2001년 11월 10일 자정이 지난 시간에 술에 취해 첫전화를 걸어 왔던 그때의 분위기. 어쩌면 11월 10일을 떠올렸기에 아내의 "오빠"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풀어졌는지 모른다.
 
아내) 아직도 회사야? 일하고 있어? 그 회사 정말 엄청나다 엄청나. 어떻게 알바생을 며칠이나 집에 안보내냐?
나) 집에 왔어.
아내) 뭐야? 집에 왔는데 왜 집에 있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갔다. 또 나역시 기분은 풀어졌지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나) 전화번호가 다르네. 누구 전화야?
 
고작 나온다는 소리가 전화번호 타령이다. 하지만 확인할 건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아내는 호쾌하게 웃는다.
 
아내) 아! 이건 친구전화. 나 핸드폰 회사에 놓고 왔어. 근데 어차피 나야 뭐 오빠밖에 전화올 데가 없는데, 오빤 뭐 전화도 안하니까 필요도 없지. 오빤 일만 하잖아. 깔깔깔.
나) 그나저나 지금 시간이 도대체 몇시니?
 
또, 고작 나온다는 소리가 시간 타령이다. 하지만 확인할 건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아내는 보다 호쾌하게 웃으면서 핵심을 거론한다.
 
아내) 어?! 오빠 정말 안 본 모양이네. 지금 집이야?
나) 응
 
아내) 편지 안봤어? 탁자위에 올려놓고 왔잖아. 그 안에 핸드폰, 회사에 놓아두고 왔다고 써놨어.
나) 기분나빠서 안봤어. 너 사생활을 내가 왜 보니?
 
아내) 오! 멋진데? 그거 한번 열어봐.
나) 왜?
아내) 열어보면 알아. 빨리 열어보고 빨리 와. 이것도 거의 밧데리 없으니까 끊는다.
 
딸칵! 방금전의 소란스러움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이내 정적이 감돌았다. 빨리 가기 위해서 편지봉투를 열었다. 두장짜리 편지라고 여겼던 것이 각각 달랐다.
 
한장은 아내의 남자친구로부터 온 편지였고, 또 다른 한장은 아내가 따로 적어넣은 나에게 보낸 편지, 아니 메시지였다. 아내의 남자친구 편지는 잘 읽을 수 없었다. 글씨가 날라다녀서 무슨 글을 쓴 건지 잘 몰랐다. 다만 안심한 건 있었다. 아내의 남자친구, 즉 m/a는 아내의 풀네임을 적었고, 그 뒤에는 '상(さん)'이라는 경어를 붙였다. 
 
"高橋美和子さんへ"
 
여자친구한테 쓰는 표현이 '절대' 아니다. 그냥 친했던 친구한테 쓰는 거라면 본문내용은 그냥 읽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워낙 난필이라 읽혀지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아내의 메시지를 펼쳤다. 아내의 메시지는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오빠! 26번째 생일 축하해! 근데 오빠네 게임회사는 완전 블랙컴퍼니다. 알바생을 며칠이고 밤샘시키는 회사, 들어본 적이 없거든. 오늘은 돌아올거라고 믿고 싶은데, 그게 또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만약 오늘도 집에 안 보내주면 낚시꾼 정도는 내가 도와주지(웃음).
 
아무튼 오늘 집에 들어오면, 핸드폰을 회사에 놔두고 왔으니까,  이 번호를 누르거나 m역 바로 옆의 t/h라는 '이자카야(일본식 호프집)'로 와. 올 때까지 있을꺼야. 아참, 케익은 오빠 올 때까지 안 먹을께. 빨랑 와. 2월 21일 18시 30분"
 
실없는 웃음이 삐져 나왔다. 지난 몇시간동안의 맨발의 청춘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엄동설한에 츄리닝 바지에, 오리털 파카하나 걸쳐입고 m시 일대를 다 돌아다녔다. 게다가 t/h라는 이자카야는, 몇시간전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마일드세븐을 펴댔던 m/k이라는 파친코 가게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뻘짓도 이런 뻘짓이 없다.
 
그런데, 사람마음이 또 간사하다. 처음엔 내가 바보같다고 생각하다가, 점점 아내탓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내가 전화만 잊어버리지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라는 생각. 왜 하필이면 오늘같은 날 전화를 회사에 놔두고 오냐는 것.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때 t/h에 도착했다. 점원에게 아내 일행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자리로 안내해 준다.
 
조금 걸어가자 아내의 술취한, 한옥타브 높은 깔깔거림이 들려온다. 만 3일만의 해후다. 친구가 있다고 하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야 할까를 고민하며 코너를 트는 순간 아내의 얼굴이 보인다. 아내도 내 얼굴을 발견하고선 "여기야, 여기!"라며 손을 흔든다. 그리고 아내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이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돌린다. 아내의 옛남자친구, 뉘른베르크에서 아마 최근에 돌아왔을 m/a였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새벽 3시 30분에 아내와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시고 있고, 또 언제 날 봤다고 미소를 머금고 있냐는 거다. 아내에게도 화가 났다. 아내는 친구전화라 했지, m/a의 전화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 전화를 회사에 놔두고 온 이유는 잊어먹은 게 아니라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닐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지만, 의심과 자기비하는 멋대로 확장된다.
 
뉘른베르크 소인이 찍힌 편지의 글씨가 지저분했던 건 의도적이었을 거라고. 편지 첫머리를 "高橋美和子さんへ"라고 쓴 건 속임수였을 거라고.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는 1년짜리 도피성 유학생이 블랙컴퍼니에 다니고 있던 걸 독일의 유명보험회사에 다니던 m/a는 얼마나 비웃었을까라고.
 
손을 들어 웃고 있던 아내에게 무심히 다가가 손을 꽉 쥐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나) 가자. 집에.
아내) 아파. 왜 그래 오빠. 좀 앉아봐.
나) 싫어. 빨리 가자.
아내) 아프다니까. 놓고 말해.
나) 너! 진짜 왜 그래!!!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순간 옆테이블의 커플은 대화를 멈추었고, 뒷테이블의 웃음소리는 멎었다. 대각선 테이블은 잘 기억은 안나지만 무언가 금속성 물체를 떨어트린 것 같았다. 쨍그렁 소리가 들렸으니까.
 
m/a는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고, 아내는 내가 정말로 화를 내고 있다는 걸 느꼈던 모양이다.
 
아내) 알았어. 갈께. 일단 손은 좀 놔 봐. 주위사람들한테 미안하잖아.
 
사실은 나도 순간적으로 정적이 감돌자 이건 좀 아닌데라는 생각은 들었다. 화는 물론 났지만, 드라마 찍는 듯한 유치한 분위기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손의 힘을 풀었는데, 그 순간 아내의 물리적 반격이 전광석화처럼 터졌다.
 
지금에서야 고백하는데, 아내는 합기도 2단이다. 그것도 합기도부가 아주 유명한 k대학 재학시에 공인 2단을 획득했다. 재학당시 낙법의 천재로 불렸다고, 나중에 결혼한 같은 대학 합기도부 커플 부부가 피로연에서 가르쳐 주었다. 이런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부부싸움하지 마세요. 당신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랬다. 나는 그날 t/h에서 아내의 손을 잡았다가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한 후 아내의 조용한 말에 손의 힘을 뺐다가 손목후리기를 당했다. 아내말로는 "뒷기술 전환에서 나오는 기본후리기"라고 하는데 손목인대가 살짝 늘어날 정도로 강렬한 충격과 전율을 선사했다. 5초전의 위세좋던 내 신세는 급추락하고 말았고, 아내의 옛남자친구도 몸둘 바를 몰라했다.
 
무슨 대화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감조차 안잡히던 그때, 내 뒷편에서 발랄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왔네! 블랙컴퍼니의 마수에서 벗어난 거야? 깔깔깔"
 
적당히 술취한 목소리의, 발랄함이 돋보이던 그녀(s)는 우리쪽으로 성큼 다가오더니만 m/a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털썩 앉는다. 그제서야 테이블을 봤다. 접시도 3개, 포크도 3개, 젓가락도 3개. 처음부터 3명이 있었던 거다. 처/음/부/터.
 
나) 아!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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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8/09 [06:30]  최종편집: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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