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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호 연재]토착왜구
[신경호 연재 소설 - 기해년 경제왜란 4편]
 
신경호

[편집자주] 시각장애인으로 일본에서 살아가면서 느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신경호 동화작가가 새 소설 '기해년 경제왜란' 연재를 시작합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일간 무역 분쟁에 상상력을 덧칠해 그린 소설입니다. 거대 반도체 기업 세영이 위기에 빠진 오너를 구하고자 일본과 막후에서 협상을 벌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1편 - 밀약 - http://jpnews.kr/22529

2편 - 굴뚝새 - http://jpnews.kr/22543

3편 - 개와 늑대의 시간 - http://jpnews.kr/22566

 

오규석은 핸드폰 알람소리에 습관처럼 눈을 떴다. 침대에 누운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낯선 곳이었다. 자신의 바로 옆에 젊은 여자가 가볍게 새근대고 있었다. 머리가 무겁고 목이 말랐다. 침대 옆에 미니 냉장고가 보였다. 오규석은 몸만 돌려 미니바를 열고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조금 살 것 같았다. 지난 밤 기억이 언뜻 스치듯 떠올랐다.

 

어제 세영그룹 김재환 사장을 만나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일본 아베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에 대한 보복으로 반도체 부품 소재를 수출규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재환은 친절하게도 관련한 자료까지 챙겨주었다. 오규석은 순간적으로 대단한 특종거리임을 기자의 본능으로 느꼈다.

 

데드라인을 넘긴 시간이었지만 미리 배치한 기사들을 걷어내고 수출규제 기사로 대치하도록 경제부장에게 지시했다. 경제부 출신답게 자신도 김재환에게서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몇 개의 분석기사를 보냈다. 오규석은 조금씩 기억의 파편들을 맞추었다. 혹시 김사장한테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언뜻 스쳤다. 오규석은 머리를 흔들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여자가 몸을 자신쪽으로 돌렸다. 설핏 여자의 가슴이 보였다. 그제서야 어제 술자리에서 자신 옆에 앉았던 주연이라는 아가씨가 생각났다. 신인 배우라고 자신을 소개한 주연은 키가 늘씬했고 몸매가 글래머했다. 사소한 이야기에도 시원스레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규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이불을 조금 걷었다. 그러자 주연의 상체가 드러났다. 흰 살결에 가슴은 풍만했고 그 끝에 핑크빛 유두가 달려 있었다. 가슴 밑으로 날씬한 허리 곡선이 매혹적이었다. 오규석은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오규석의 손이 주연의 가슴을 더듬었다. 보드랍고 뭉클한 촉감이 손끝으로 전해왔다. 다른 손으로 배꼽을 지나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까칠한 음모의 촉감이 전해져 왔다. 오규석은 그대로 주연을 당겼다. 주연의 몸이 멈칫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오규석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오규석은 그대로 주연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주연의 눈에서 작은 눈물방울이 툭하고 떨어졌다.

 

오규석이 출근한 것은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편집국 사무실이 온통 흥분된 상태였다. 그도그럴것이 다른 매체에는 전혀 언급조차없는 특종을 대한일보만이 단독으로 보도했다. 그것도 사실을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기사뿐만 아니라 수출 규제에 따른 한국 경제의 영향, 세영의 향후 대응책 등 다양한 분석기사와 향후 전개될 사태에 대한 기획기사까지 싣고 있었다. 그야말로 수출 규제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해 특집으로 꾸몄던 것이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김재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 국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핸드폰 화면에 찍힌 메시지는 간결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무얼 말하고 있는지 오규석은 잘 알고 있었다. 김재환은 보통 언론인들에게 메시지나 연락을 먼저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런 김재환이 어제 자기와 밤새 같이 술을 마셨고, 이렇게 메시지까지 보냈다. 오규석은 자기도 소위 ‘김재환 사단’의 멤버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재환은 어젯밤 ‘”오 국장님도 여의도에 가셔야죠?”라며 넌지시 말했었다. 혹시 내년 총선에 공천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가? 아무리 세영이라도 국회의원을 그리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는가? 아니다. 세영이라면 국회의원이 아니라 대통령도 만들 수 있다. 오규석은 모처럼 찾아 온 동아줄을 단단히 욺켜지리라 마음먹었다.

 

그날 오전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 제조 과정에 필요한 재료와 부품 등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는 조치를 2019년 7월 4일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대한일보가 보도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후 각종매체에서 수출 규제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내용은 대략 대한일보 기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오규석이 주도한 특집 보도는 내용이 충실했고 분석이 뛰어났던 것이다.

 

수출 규제 발표 후 언론들의 논점은 크게 몇 가지로 추려볼 수 있었다. 먼저 반도체 산업이 경제를 이끌고 가는 한국 상황에서 반도체 부품 수입이 막힐 경우 대단한 피해가 예상되며 이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다음은 일제 시대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손해배상 판결이 대법원에서 결정된 것이 8개월 전에 있었고, 따라서 이런 판결에 대한 일본측의 공세가 예상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소흘했다는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또,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해 가장 피해가 예상되는 반도체를 이끌고 있는 세영그룹의 경우 오너가 지난 정권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판에 계류중인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격으로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었다. 언론들은 이철용의 위기가 세영의 위기이며, 결국 세영의 위기는 한국 경제 전체의 위기라는 논조로 기사를 쏟아냈다.

 

이 모든 논리의 출발은 역시 오규석의 대한일보였다. 신문과 방송을 망라하고 다른 기사는 사라지고 오로지 불화수소로 대표되는 수출 규제 관련 기사만이 넘쳐났다. 정치권도 비상이 걸렸다. 야당은 현 정부가 일본을 자극해서 이런일이 벌어졌다며 빨리 대통령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총리와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 총리에게 잘못했다고 빌란 말이었다. 종편에 나오는 패널들도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신문과 텔레비만 봐서는 금방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날 저녁 시사정론 이종배 기자는 면목동 어느 허름한 돼지껍데기집에서 정치부 기자인 원유석과 마주앉아 있었다. 둥그런 양철 테이블 가운데에는 연탄불에 올려진 돼지껍데기가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선배님. 오늘 물 먹었네요. 축하드립니다. 천하의 이종배 기자가 경제 관련 기사에서 물을 먹다니. 하하”

“야. 나만 물 먹었냐? 대한민국 경제부 기자들이 모두 물 먹은 날이다.”

”그러게요. 그런데 대한일보는 어떻게 그 소식을 알았을까요?”

 

“아마도 세영이 소스를 줬을 거야.”

 

“그건 말이 안돼요. 세영도 몰랐다고 하잖아요. 오늘 일본 정부 발표 후 세영 반응을 보면 말이죠.”

“원 기자는 개네들 말을 믿어? 세영이 준 정보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돼.”

 

“그렇다면 왜 세영이 하필이면 대한일보에게만 정보를 주었을까요? 세영이 뭔가 꾸미려면 대한일보 뿐만 아니라 동아나 중앙에도 소스를 흘리는게 일반적이잖아요?”

 

 “음. 아마도 이번엔 세영이 정치적 논리보다 경제적 논리가 필요했던 것같아. “

“경제적 논리요? 무슨 말씀인지 전혀 감이 안잡혀요. 선배님은 뭣 좀 아시는 게 있어요?”

 

“나도 전혀 아는 게 없어. 그런데 잘 생각해보라고. 이번 일본 정부 발표는 우리 정부도 파악하지 못했어. 그렇다면 국정원에서도 몰랐다는 이야기인데 그걸 어찌 대한일보가 알았을까? 물론 아까 말했듯이 세영이 정보 제공을 했겠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세영이 대한일보에만 정보를 흘렸는가 말야.”

 

“선배님. 벌써 취하셨어요? 그거 제가 선배님한테 물은거잖아요.”

 

원유석은 나무라듯 말하며 테이블에 있던 소주잔을 쭉 들이켰다.

 

“이사람 의리없이 혼자 마시기는”

 

이종배도 잔을 들어 목구멍으로 소주를 넘겼다.

 

”요즘 소주는 너무 순해서 탈이야. 소주 마시고 ‘캬아~’ 한번 해야 술 맛나는건데.”

 

이종배가 돼지껍데기를 한 점 입으로 우물거리며 아쉬운듯 말했다.

 

“선배님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그런말하면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아요. 다른 소리 마시고 어서 세영이 왜 경제적논리 때문에 대한일보에 소스를 주었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이나 해요.”

“그게 말이야. 아무래도 대한일보 오규석 편집국장 때문인 것 같아.”

“오규석 국장이요? 그 여자 무지 밝힌다는 인간?”

“음. 맞아. 회사내에서도 몇 번 문제가 됐었지. “

“그런 기레기한테 왜 세영이 정보를 흘렸다는 건가요?”

 

“오규석 국장이 좀 사람이 난잡하긴 하지만 경제적 안목이나 분석등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특히 보수 진영의 경제 논리는 모두 그가 만든 논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 아마도 이번에 세영에게 그런 오규석이 필요했겠지. 오늘 대한일보 보라고. 일본 수출 규제와 관련해 이 이상의 기사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은가?”

 

“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정치부와 사회부에서만 있어서리. 경제는 너무 어려워.”

 

원유석이 소주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이종배도 잔을 부딪혔다.

 

“그런데 오 국장이 그렇게 경제분야에 실력이 뛰어난가요?”

“오 국장. 그 사람 정말 실력은 인정해줘야 해. 나와도 같이 일한적이 있는데 경제를 논리적으로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지. 문제는 오규석 국장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문제야. ”

“무슨 가치관이요?”

“원 기자도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은 알고 있지?”

“당연하지요. 제가 아무리 경제 바보라고 해도 그걸 모를까봐요. 간단히 말하면 일제 식민지가 우리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뭐 이런거 아닙니까?”

 

”제대로 알고 있구만. 맞아.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일부 어용학자들만이 아니야. 사회 각 부문에 그런 사람들이 포진해있지. 오규석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야. 아니 오규석은 식민지근대화론 신봉자중에서도 골수이지. 어쩌면 그가 식민지근대화론을 전파하는 행동대장격이기도 해.”

 

“그것과 이번 세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놀리들이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맬서스의 인구론등 시대를 풍미했던 경제학 이론들은 단순한 경제를 보는 시각이 아니고 당시의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위한 도구로 쓰이곤 했지. 원 기자도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 잘 알고 있지?”

 

“물론 잘 알죠.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맬서스의 인구론은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거 아닙니까?”

“역시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나온 자네답게 잘 아는군. 그런데 왜 애덤 스미스나 맬서스가 그런 말을 했을까?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한 보이지 않은 손이란 결국 이익의 극대화가 나쁜 것이 아니다란 말이지. 다시 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주의적 존재이다. 그러니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겠지. 또 맬서스도 마찬가지야. 맬서스는 기본적으로 다윈의 이론을 차용했네. 즉, 강한 놈들이 살아남는다는 적자 생존이론을 사회학에 도입한 거지. 그래서 결국 맬서스의 이론을 간단히 정리하면 인간의 수에 비해 식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자연의 이치이므로 굶어죽는 인간이 나오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뭐 이런 개똥 같은 논리지. 경제학이 자본가들을 위해 부역하는 도구로 쓰이는 대표적 예라네.” 

 

“애덤 스미스나 맬서스의 경제학에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전 그냥 대학 준비하느라 달달 외우기만 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그런데 선배님.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이야기 돌리지 말고 세영이 오규석 국장을 통해 꾸미려는 것이 무엇인지 견해를 들려 줘요.”

 

“그건 나도 모르지.”

 

이종배는 다시 소주를 털어넣고 돼지껍데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모르긴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은 확실해. 아마도 이번 수출 규제건을 이용해 경제 위기를 퍼나르고 결국 위기를 해결할 주체는 세영 밖에 없다. 뭐 이런 식의 논리를 대한일보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

 

“그럼 일본이 저지른 경제 보복 위기를 해결할 주인공은 결국 이철용 밖에 없다 뭐 이런건가요?”

 

“그렇지. 이철용이 무너지는 한국 경제를 구제해줄 메시아나 바람앞에 등불 같은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 역할을 하고 싶은거겠지. 그걸 오규석이 현란한 말솜씨와 탄탄한 논리로 받쳐주고… 오규석이 논리정연하게 빨아주는 재주가 있거든.”

 

 “근데 선배님. 아까 말씀하신 식민지근대화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런 정신나간 주장들을 하고 있죠? 초등학교 애들도 웃을 주장들을 대학교수라는 자들이 부끄럽지도 않게 말이죠.”

 

“혹시 자네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을 읽어는 보았나?”

“아뇨. 그런 것에 시간 허비할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그네들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수긍할 수 있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 바로 그네들이 그런 것들을 비집고 들어서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말야.”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원 기자는 일본 사람들이 왜 영어를 잘 못하는지 아나?”

“뭐 그야. 우리나라와 같은 이유 아닐까요? 우리나라도 영어교육에 많은 힘을 쏟고 있지만 그닥 영어 잘 못하잖아요. 아무래도 언어의 뿌리가 같은 한국어와 일본어가 영어와 잘 맞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는 무조건 성문종합영어였네. 문법위주로 되어 있는 무지하게 골치아픈 영어 교재였지.”

“선배님 오늘 왜 이러세요. 세영 이야기하다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가시더니 왠 성문영어?”

 

“들어보라고. 일본이 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에 놀라서 개방을 한 것이 메이지유신이야. 그 덕분에 과거 봉건사회였던 일본 사회가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맞게 되지. 그리고 그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서구 사회를 흉내내며 발전을 꾀하게 되네. 그런데 그러면서 겁이 났던 거야.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세력이 오늘의 가고시마현의 사츠마번과 시모노세키가 있는 야마구치현인 조슈번이었거든. 이 두 세력이 손을 잡아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막부정권을 타도한 뒤 천황을 내세웠단 말이지. 그런데 천황보다 더 무서운게 서구 세력이었지. 그러다 보니 서구의 언어를 가르치되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기발한 방법을 착안한거야. 바로 문법 위주로만 영어를 가르치고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는 회화는 가르치지 않는 이상한 영어 교육법을 채택했다고 하네. 반드시 영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즉 외교관이나 주재원들, 유학해서 공부해야하는 사람들을 위해 문법 위주의 고급 영어를 가르치고, 일반 사람들은 영어를 배워도 알 수 없도록 했다는 거야.”

 

“ 놀랍군요. 그런데 왜 그런 이상한 영어 교육법을 사용했나요? 그냥 회화 위주로 처음부터 실생활에 사용하는 영어 가르치면 되잖아요?”

 

“말과 글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고 생각한거지. 그들은 자기네 국민들이 영어를 배우게 되면 정신적으로 지배당할까봐 겁이 난거야. 일제 말 극악스럽게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으려 난리친 것도 같은 이유라네. 그런데 당시 일본 지배세력은 단순히 이상한 영어 교습법만으로 영어를 통제한 것이 아니고 영어로 된 서구 문명을 모두 자기네 일본어로 바꾸는 것도 시행했지. 각종 법률과 제도, 다방면의 과학용어들이 모두 일본어로 바꾸었다고 해. 그리고 그런 일본식으로 바꾼 용어나 제도등을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에도 심어놓은 거지. 그 잔재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법률이나 의학용어, 건축용어등에 일본어가 많이 남아있는 증거라는거야.”

 

“대강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겠네요."

 

“식민지근대화론이란게 결과적으로 일제가 우리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것인데 난 그 근대화를 마치 절대적 선인양 말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들어.”

 

이종배는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소주잔은 비워 있었다. 그때 얼굴이 우락부락한 주인 남자가 소주 한 병을 들고 이종배 테이블로 왔다.

 

“이 기자. 이거 서비스야. 오늘은 뭔 개소리를 그렇게 끝도 없이 하고 있나?”

 

남자가 소주병을 테이블에 탁하고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이고 형님. 서비스까지.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이종배가 굽신 머리를 숙였다.

 

“선배님. 저 주인 아저씨 무슨 조폭 출신같아요.”

“아니. 저 양반 얼굴이나 하는 짓은 건달같아도 참 마음씨 좋은 사람이야. 사람사는 도리도 알고.”

 

이종배가 새로운 소주병을 따며 말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는 자들은 말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믿지 못하는 부류들이지. 그러니 일본이 없었으면 우리는 근대화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지.”

 

“일제 식민지 시대를 통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럼 선배님 말씀은 일제 식민지가 없었어도 우리가 근대화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해보게. 1910년 나라가 망하고 나서 10년도 안된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고 그 후 임시정부가 생기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임시정부를 과거의 왕정이 아니고 새로운 국가 형태인 공화정을 채택했네. 그만큼 깨어있는 민족이었지. 또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보게. 그때 그 무지랭이 같던 농민군이 정부에게 내세운 주장만 살펴보더라도 절대 세계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는 것일세. 식민지가 아니었으면 오히려 근대화는 더욱 빨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우리식의 근대화로 말이지.”

 

“네. 이종배  교수님의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반론 강의 잘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원유석이 너스레를 떨며 건배를 제의했다. 이종배도 또다시 잔을 부딪혔다. 

 

“그럼 선배님은 오규석 국장이 그런 식민지근대화론과 비슷한 논리로 앞으로 세영을 도울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네. 일본과 한국의 경제 관계를 오국장보다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 그 사람 일본 토요타재단에서 장학금으로 공부도 했고 지금까지 쓴 기사나 칼럼을 보면 실제로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옹호하면서도 겉으로는 교묘하게 숨기면서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거든. 세영이 괜시리 대한일보에만 정보를 주지는 않았을거야. 뭔가 오규석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있겠지.”

 

“오 국장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줄 몰랐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친일파를 자기 영달을 위해 친일을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말야. 어떤 사람들은 정말 일제를 자신과 한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과거 박정희가 마치 자기가 메이지유신의 지사라고 생각했듯이 말야. 오늘날 새로운 친일파가 있다면 바로 오규석이 그런 사람일거야.”

 

“새로운 친일파라.”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이 그런 사람을 가리켜 ‘토착왜구’라는 말을 썼어. 정말 딱 맞는 표현 아닌가?”

“토착왜구요? 그거 정말 절묘한 표현이로군요. 그나저나 일본의 경제 보복 때문에 걱정입니다. 가뜩이나 경제 안좋다고 난리들인데 오늘 대한일보 기사대로 반도체 생산마저 어려워지면 어찌합니까?”

“그것 봐. 원 기자도 오규석의 논리에 벌써 빠져들었단 말씀이야. 난 오히려 이번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럼 선배님은 이번 일본 발표가 전혀 우리 경제에 문제가 안된다는 말씀이세요?”

 

“그럴 리가 있나?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잘 대처하면 오히려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수 있는 계기가 될수 있다는 이야기야. 또 지금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도체 경기가 그리 좋지 않아. 이럴때 조금 시간도 벌 수 있고 말야.”

 

“이번 기회가 한국 경제가 도약할 수 있는 계기란 무슨 소리입니까?”

"원 기자는 가마우지낚시라고 들어봤어?”

“선배님. 인자요산이요. 지자요수라고 했던가요? 전 물보다 산을 좋아합니다. 낚시는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가마우지낚시는 일본과 중국에서 옛날에 했던 낚시법이었대. 가마우지라는 새를 이용해서 하는 낚시법인데, 이 새는 날지도 못하는 작고 보잘 것없는 날개를 가진 새인데 물고기 잡는 데는 선수라고 해. 길고 끝이 구부러진 주둥이와 긴 목으로 물고기를 재빠르게 낚아채고 큰 물고기도 쉽게 삼킬 수 있다고 해. 바로 이 새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것을 가르켜 가마우지낚시라고 한다는구만. 가마우지의 목 아래를 끈으로 묶어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게한다음 입 안에 걸린 물고기를 꺼낸다는거야.”

 

“ 참 기막힌 낚시로군요. 그런데 갑자기 가마우지 이야기는 왜 하시는건가요?”

 

“한국과 일본의 경제 관계를 흔히 가마우지낚시를 빗대어 가마우지경제라고 말하곤 해.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그 이득은 실제 일본에게 돌아가는 구조가 마치 가마우지낚시 같다는 거야. 우리는 가마우지이고 일본은 물고기를 빼앗아 가는 어부가 되는  셈이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 뭐 이런거네요.”

 

“그렇지. 한국과 일본의 관게가 가마우지 경제로 된 것이 한,일협정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경제학자들은 분석하고 있어. 1965년 한일협정으로 우리가 겨우3억달러를 보상받았는데 그 돈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가마우지 신세가  되었다는 거지.”

 

“그래요? 일본이 겨우 3억 불 주고 우리 경제 몸통에 빨대를 꽂아두고 줄곧 빨고 있다는거네요.”

 

“맞아.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우리나라 전자제품을 보라고. 겉은 세영에서 만든 제품이지만 알맹이는 모두 일본 부품이 대부분이던 시절도 있었지. 부품뿐이 아니고 생산 시설이나 정밀기계등 생산라인에 필요한 것들도 모두 일제가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야.”

 

“그 정도인가요?”

“그런데 이번 일본이 취한 경제 보복으로 인해 가마우지 경제 구도를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말씀이야.”

“어떻게요?”

 

“왜 우리가 일본 부품 소재를 사용했겠나? 크게 보면 두가지야. 일본 제품이 품질이 좋고 가격이 적당해서지. 우리나라 기업이 이런 부품을 개발해도 대기업들이 써주질 않아. 왜냐면 일부러 거래처를 바꿀 이유가 없는 거지. 그동안 별탈없이 잘 굴러갔으니 말야. 그런데 이번에 일본이 부품 소재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거래처를 다변화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된거지.”

 

“아. 그렇게도 볼수 있겠군요.역시 경제통 이종배 기자님 대단하십니다.”

“이번 일본 발표는 분명 위기이지만 말야.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던가? 정신 바짝 차리고 기회로 살리면 우리 경제가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선배님. 벌써 11시가 넘었습니다. 슬슬 일어나시죠.”

 

두 사람은 거나하게 취해 껍데기집을 나섰다. 더운 여름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었다.이종배의 눈에 ‘이자카야’라고 씌인 간판이 들어왔다. 

 

-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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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19 [20:26]  최종편집: 1999/11/30 [00:00] ⓒ jpnews_co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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