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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를 말한다(2) - 호쿠세이 대학에서 우에무라 기자와의 운명적인 만남
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를 말한다(3) - 위태로운 촛불 같은 그와의 '만남'
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를 말한다(4) - ‘목소리를 낸다는 것의 중요함’
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를 말한다(5) - 일본어 스피치 대회에서 우에무라 사건을 말하다
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를 말한다(6) - 예상치 못한 여학생과의 언쟁이 계기, 우에무라 기자 연구 시작
우에무라 전 아사히 기자를 말한다(7) - 홋카이도 일주 통해 체감으로 느낀 주민들의 친절함
폴폴 내리던 눈이 온 거리를 뒤덮어 어느새 꽝꽝 얼더니 해를 넘기면서 조금씩 풀리는 날씨 탓에 눅진눅진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계절의 변화는 나에게 돌아갈 시간이 임박했음을 고백했고, 하루하루 떠나가는 날들이 정말 아쉽게 느껴졌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멀어지는 하얀 홋카이도를 바라보면서 고향을 떠나 보내는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돌아온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은 홋카이도에서의 즐거웠던 추억과 대비되어 삭막하고 갑갑하게 느껴졌다. 학과 수업에서 마주치는 학우들과 형식적으로 끄덕 인사할 때에는 특히 공허함을 느꼈다. 비록 언어가 다를지라도 서로 연결되고 싶어 몸부림치던 지난 날의 인간관계를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그리운 감각을 잊지 못해 자연스럽게 나는 또 한번의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크게 발목 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학점이었다. 군 입대 이전까지 대학에서 펜을 쥔 시간 보다 기타 코드를 잡은 시간이 길었던지라 학점은 착륙 직전의 저공비행 상태였고 유학 신청 요건인 평균 점수대에서 한참 뒤처져 있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학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삿포로에서 돌아온 첫 학기 째에 나는 학과 톱이 되어있었다.
힘들게 대학 보내 놨더니 공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들이 걱정이었던 아버지는 이것으로 한 시름을 덜게 되었다. 그리고 기분이 좋으셨는지 학과 톱에게 수여되는 학비 면제 장학금의 절반의 금액을 용돈으로 주셨다. 뜻밖의 거액의 돈을 받고서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 돈을 어디에 써야할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 해 여름 자전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그리고 부산항의 뉴 카멜리아호에 자전거를 싣고 다음날 새벽 일본의 후쿠오카 하카타항에 도착했다. 2015년 7월 7일 그렇게 일본에서의 자전거 여행이 시작되었다.
▲ 스마트폰을 잃어버려 자전거여행 유일한 사진 ©강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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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일본의 여름은 아스팔트를 녹여낼 정도로 뜨거웠다. 매일 100km씩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고서 해가 저물 무렵이 되면 그 근처 마을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자전거에 오르는 연속이었다. 피부로 일본을 체험해보는 것이 바로 자전거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 만났다. 관대하게도 배낭 하나 짊어지고서 일본 자전거 여행을 다니는 한국인 청년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 삿포로에 도착, 팔을 보면 살갗이 까맣게 타버렸다 ©강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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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 하우스, 인터넷 카페, 캡슐 호텔 등 지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잤다. 아침이 밝아오면 창 너머로 쨍쨍 내리쬐는 여름 볕이 두려웠다. 그래도 페달을 밟았다. 여행중 만난 사람들이 목적지를 물으면 농담처럼 삿포로까지 간다고 이야기 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 나도 모르게 삿포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카타- 기타규슈- 히타- 오이타- 야와타하마- 시만토- 고치- 미요시- 도쿠시마- 와카야마- 오사카(2박)- 히코네- 나고야- 하마마츠- 시즈오카- 요코하마- 도쿄- 치바- 미토- 이와키- 후쿠시마- 오사키- 오슈- 모리오카- 하치노헤- 치토세- 삿포로
2015년 7월 7일에 시작해 8월 6일에 끝마친 총 이동거리 약 3000km의 긴 여행은 정말 많은 사람들과 얽힌 재미난 에피소드 들을 추억이라는 형태로 남겨주었다. 예를 들면 벳부에서 APU의 여학생과 만난 이야기, 고치현의 히로메시장에서 도쿠시마 부부와 점심부터 거하게 취한 이야기, 카메야마로 향하던 길에서 해가 저물어 조난 당할 뻔했던 걸 30대 중반 쯤의 여성분이 근처 마을까지 태워준 이야기, 와카야마의 이자카야에서 만난 호탕한 아줌마 이야기, 지금도 연락을 주고 받는 히코네 게스트하우스 주인 아저씨 이야기,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역시 후쿠시마를 지났을 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6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 였다. 현 입구에서 발견한 간판 ‘후쿠시마’는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불과 4년 전의 이 근방에서 3월 11일 쓰나미를 동반한 대지진으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으며 그 피해로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피부로 전해졌다. 한참을 달려도 사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로 위에 그 흔한 편의점 조차 드물었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 옆을 천천히 달리던 경찰차가 50m쯤 앞에서 멈춰 서더니 경찰 두 명이 내려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 앞으로는 자동차 이외에 지날 수 없습니다.” 오염에 노출되어 있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20km 이내의 6번 국도 구간은 자동차 이외의 도보 및 이륜차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연안 도로에서 후쿠시마 방향의 산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만난 마을의 충격적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모습이었다. 쩍쩍 금이 간 아스팔트 도로 위로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건물들과 깨진 유리조각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곳곳에 제염 완료를 나타내는 노란색 테이프가 붙어있었다.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흙이 담긴 검정색 제염 봉투 역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당연히 아무도 살지 않는 이 마을에서 오로지 살짝 기울어진 신호등만이 깜빡거렸다. 흡사 고스트 타운과 같았다. 마을 뒤로는 돌보는 사람이 없는 묘지들과 수 km의 밭이 있었는데, 그 모든 밭이 검은 봉투로 메워져 있었다.
자동차 하나 지나지 않는 공간에 홀로 남겨져, 순간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산을 넘었다. 그러자 아주 작은 마을이 나왔다. 다행이도 그곳에는 사람이 아직 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사람이 찾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 비즈니스 호텔이 하나 우두커니 서있었다. 알고 보니 제염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묵는 호텔이었다. 보통은 일반인 투숙객을 금하지만 홀로 자전거 여행을 하는 내가 딱해 보였는지 주인장은 하룻밤 묵고 가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흡연실에 들어서자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은 제각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부분 내 또래이거나 많아도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를 인식하고선 “수고 많으십니다.” 라며 인사를 해왔다. 아마도 나를 제염 작업을 하는 인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쉽게도 이 때 당시의 사진은 당시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분실하면서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때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마 살면서 가장 기묘하고 무서웠던 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이후 나는 다시 삿포로에서 우에무라 선생님과 만난다. 그리고 선생님이 또 다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