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난 지 59년째. 피를 나눈 같은 형제끼리도 서로를 죽이고 죽는 민족동란으로, 휴전선이 그어지고 지금까지 서로 화해를 하지 못한 채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
그 당시 16개국이 참전을 했고. 4개국이 비전투 부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 같은 참전국과 파견부대의 명단에는 일본이 빠져있다.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6.25 민족동란 당시 일본의 모습은, 남북전쟁의 비극을 통해 군수물자를 팔아 이를 발판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의 압력을 받아 대규모의 일본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jpnews에서는 10회에 걸쳐 당시 일본군이 언제, 어떤 형태, 얼마만큼의 규모로 6.25전쟁에 참전했는지 그 실상을 파헤치기로 한다.
■ 왜 우리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타국(6.25동란)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 새로운 헌법에 의하면 전쟁(태평양전쟁)은 이미 폐기되었는데, 왜 또다시 우리가 전장으로 나가야 되나? 또한 이제 우리들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닌, 일본의 제반 건설을 위해 일본해협에 깔려있는 지뢰들을 제거하는 시민일 뿐이다.우리는 타국을 위해 또다시 전쟁터로 떠밀릴 수는 없다.”이 말은 1950년 10월 초, 일본군이 6.25조선전쟁(당시일본표현)에 참전하면서 일부 일본군이 일본정부와 미군을 향해서 한 말이다.
1950년 10월 2일, 당시 일본의 초대 해상보안청(1948년 발족)장관이었던 오오쿠보 다케오(大久保武雄)는, 미국의 알레이 a 버크(arleigh a.burke) 해군소장과 조이 터너(joy turner)중장으로부터 소환을 당했다.
여기서 일본의 장관이 주둔 군 간부에게 소환을 당한 것은, 그 당시 일본이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사령군(ghq)에 의해 점령당했다. 말하자면 ghq에 의한 준식민지국이 된 것이다.
때문에 일본국민들이 ‘하늘의 신’이라고 떠받들며 자살특공대도 마다하지 않던 히로히토 일본국왕도, 맥아더 장군이 오라고 명령하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찾아가야 했다.
전쟁세대나 전후세대 중년층의 일본인들은 아직도 이 때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일본천황(일본인들의 표현)의 최대의 굴욕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히로히토 日국왕이 맥아더의 사무실로 찾아가 알현(?)하는 모습은 그 당시 일미언론의 톱뉴스로 장식, 이 사진을 본 많은 일본인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패전의 쓰라린 아픔을 되새겼다고 한다.
▲ 한국전쟁에 참가해 숨진 구일본군 ©jpnews | |
아무튼 오오쿠보장관은 두 미군 장교에게 불려가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듣게된다.
“가능한 일본의 모든 소해정을 모아 주시오. 그래서 우리 미군과 함께 조선반도의 동해 원산과, 서해의 인천 앞 바다 진입로, 그리고 항구에 있는 수뢰를 제거해 주시오. 이것은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할 극비사항입니다.”그 자리에서 오오쿠보장관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6.25조선전쟁에 참전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므로 절대로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엄청난 국사였다.
더구나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 패전하자마자 ghq에 의해 재벌해체는 물론 일본군대도 강제로 해체를 당했다. 물론 경찰예비대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내치안을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그런데 조선전쟁에 참전이라니.
오오쿠보장관은 그 즉시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 1878-1967) 수상을 만나러 갔다. 알레이 소장과 조이 소장이 한시가 급하다고 서두를 것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전후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정치인이다. 아소 타로 현 수상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오오쿠보 장관은 요시다 수상에게 조이 중장의 지령문을 전달했다.
< cnfe/s81 5451 1950 10월 4일 from: 극동해군사령관 to : 일본정부 운송기관표제: 일본군 소해정 사용일본정부는 조약에 의하여 20척의 소해정, 1척의 기니피크와 4척의 기타 일본해역 안전선(maritime safety vessel)을 최대한 신속하게 모지에 집합시킬 것을 요청한다. 이 배들의 사용은 이후에 지령을 내리겠다.> 요시다 수상은 오오쿠보장관의 이 같은 보고를 듣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일본정부의 정책은 유엔군의 군대에 협조를 하는 것이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것을 서둘러 준비하여 협조하라.”이것을 시작으로 일본은 마침내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이 같은 사실을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고 부인했다. 4년 후 일본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이 6.25조선전쟁의 일본군 참전여부를 따져 물었을 때, 요시다 수상은 ‘그런 기억이 없다’라는 말로 시치미를 뚝 뗐다.
그리고 7, 80년대에 공산당 의원이 다시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했을 때도 일본정부는 그런 문서가 없다는 말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그 당시 대규모의 일본군을 한반도에 파견, 사망자까지 발생하는 등, 실질적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납치당하듯 끌려가서 전쟁에 참전, 숨진 일본인 (유족으로부터 받은 사진) ©jpnews | |
그럼 그 참전 규모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구일본군 1,200명소해부대(掃海部隊) 종군간호부 63명 점령군노동자병원(占領軍勞動者兵員) 물자운송 3,936명재일한국인(재일동포)지원병 725명이 정도라면 결코 적지 않은 규모다. 게다가 442명의 일본군 사망자도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북한군에 의한 일본인 포로도 꽤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일본 국민들이 알 권리를 요구하며 진상을 밝힐 것을 수차례 요구했지만, 그 때마다 ‘기억없다’ ‘그런 문서 자료가 없다’라는 말로 회피를 해 왔다.
특히 종군간호부에 대한 피해상황은, 정확히 몇 명이 파견됐고 또 그 중 몇 명이 사망했는지 일본정부는 지금까지도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심각한 것은 많은 구일본군, 혹은 간호부들이 거의 반 강제로 납치되다시피 해서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다.
그럼 본인들의 입을 통해서 그 실상을 들어보자.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