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일본이 북유럽의 강호 덴마크에게 완승을 거뒀다. 도무지 질 수 없는 경기운영을, 일본은 선보였다.
덴마크의 '공격'패턴은 완전히 읽혔지만 일본의 '역습' 패턴을 덴마크는 파악하지 못했다. 전반초반 마쓰이와 하세베가 보여준 페널티 에어리어 돌파는 덴마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피니쉬를 담당하는 선수가 미리 연구했던 혼다나 오쿠보가 아닌 순간 헷갈리기 마련이다.
그도 그렇다. 일본은 형식상 4-5-1이지만 사실상 4-6-0이다. 혼다, 오쿠보, 마쓰이, 하세베, 엔도는 미드필더인 동시에 포워드다. 누차 말하지만 혼다는 원톱이 아니다.
반면 롬메달, 토마손, 밴트너는 각각 나가토모, 하세베 혹은 고마노, 그리고 나카자와와 투리오가 완벽히 마크했다. 덴마크는 이 세 선수가 안 풀리면 골을 넣을 수 없다.
수비조직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이미 본지가 말했듯이 일본은 이번 월드컵 출전국 중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나카자와와 투리오는 이미 5년간이나 호흡을 맞춰온 아시아 톱클래스의 센터백 콤비다. 여기에 풍부한 활동량을 자랑하는 나가토모와 고마노가 좌우에 포진한다.
하지만 일본 수비진의 완성도는 이 최종수비라인과 그 앞에 선 미드필더들, 즉 아베, 하세베, 엔도와의 조화에서 온다. 공수전환을 조율하는 엔도도 훌륭하지만 아베와 하세베의 연동은 단언컨대 최강의 더블보란치라 할 수 있다.
아베가 철저한 앵커맨으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는 하세베가 상대팀 플레이메이커에 달라붙어 주기 때문이다. 오늘 덴마크 전에서도 하세베의 뒤에는 반드시 아베가 있었다.
분데스리가에서 단련된 홀딩형 미드필더 하세베가 달라붙으면 상대팀 선수는 당황하기 마련이다. 오늘도 폴슨은 몇 번이고 패스할 곳을 못 찾아 당황했다. 여기서 흘러나온 볼을 아베가 가로채 엔도에게 연결하고 엔도는 좌우 사이드로 전개한다. 물론 이 공격패턴은 오쿠보와 마쓰이가 양측면에서 활발히 움직여줬기 때문에 가능하다.
대회 초반만 하더라도 수비의 팀으로 알려진 일본이 마지막 경기에서 보여준 조직적인 공격력은, 역설적으로 조직적 수비에서 나온 역습이 얼마나 단단한 힘을 발휘하는지 증명했다.
사실 일본으로선 잃을 것이 없었다. 아무도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약으로 작용했다. 일본선수들과 감독은 '히라키나오리(開き直り)'를 해 버렸다. 이 말은 "그래, 마음껏 비난하고 또 비난해라. 우린 우리 길을 간다"는 의미다.
세르비아, 한국, 잉글랜드, 코트디부아르와의 평가전에서 스코어 상으로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 일본이었지만 실제로는 풍부한 실험을 했고 또 그 실험을 실전에 적용시켰다. 잉글랜드 전에서 처음 선보인 아베, 엔도, 하세베 라인이나 짐바브웨와의 평가전에서 나온 혼다의 원톱, 마쓰이의 선발기용 등도 본선대회에 그대로 적용됐다.
마지막까지 수많은 가능성을 실험하면서 단단한 조직력으로 뭉쳐진 일본은 16강에 올라갈 충분한 자격이 있다.
또 일본은 아주 전술적으로 싸웠다. 덴마크 전에서 가장 소름이 돋았던 장면은 엔도의 두번째 프리킥 골이다. 아마 덴마크 선수들은 이 골로 패닉상태에 빠졌을 테다.
왜냐면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엔도는 소속팀인 감바 오사카에서는 전문 프리킥커로 활약한다. 아베도 마찬가지다. 아베와 엔도의 프리킥 능력은 j리그에서도 톱 클래스 수준이다. 하지만 모르텐 올센이 j리그까지 파악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엔도는 올 3월 해외파가 합류한 이후 열린 일본국가대표 경기에서 단 한번도 직접프리킥을 차지 않았다. 나카무라 순스케와 나카무라 겐고, 그리고 혼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블라니 공인구는 무회전 슛을 자랑하는 혼다에게 적합했다. 엔도의 프리킥은 감아차기라 회전력 측정이 불가능하다. 또 혼다가 이미 첫 골을 기록했다. 누가 보더라도 두번째 프리킥도 혼다가 차겠지 라고 생각했을 테다.
그런데 혼다의 무회전 프리킥 슛은 왼쪽으로 흐르는 특징이 있다. 처음엔 오른쪽으로 가는 것 같지만 결국 왼쪽으로 흐른다. 첫 골도 그랬지만 지금까지 혼다가 기록한 무회전 프리킥 골의 통계를 보면 왼쪽으로 뚝 떨어지는 경우가 70%에 달한다.
그래서 첫 골이 나온 프리킥 위치를 혼다의 위치라 부른다. 골 마우스의 왼쪽 공간이 가장 넓게 보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 혼다는 소속팀 체스크 모스코바에서도 이 위치에서 몇 번이고 골을 기록했다.
당연히 두번째 직접 프리킥 장면에서도 골키퍼는 왼쪽을 경계했다. 벽을 만든 덴마크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왼쪽은 점프했지만 오른쪽은 가만히 있었다. 아니 전 세계 축구팬들 역시 혼다가 찰 것이라 예상했을 테다.
이 고정관념을 깨버린 엔도의, 너무나 '전술적'인 두번째 골은 일본이 16강에 걸맞는 팀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한 사례라 볼 수 있다.
최대의 수훈갑을 꼽으라면 나카자와 유지다. 이 과묵한,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정신적 지주는 경기내내 벤트너보다 한발 앞서 공중볼을 따냈다. 신장차이를 생각한다면 위치선정이 그만큼 좋았다는 뜻이다. 골 에어리어의 지배자라 불리는 벤트너가 골 에어리어 바깥으로 빠진 이유 역시 나카자와 때문이다.
나카자와의 표정은 일본이 3-1로 이기고 있던 후반 42분이후에도 변함없었다. 그는 전반 초반과 마찬가지로 긴장어린 얼굴로 수비진을 지휘했고 사력을 다해 점프했다. 일본의 코너킥 찬스에서도 적극적으로 공격에 참여한 후 누구보다 빨리 수비진으로 복귀했다.
또 나카자와는 원래 일본의 주장이었다. 나카다 히데토시가 06년 은퇴한 이후 줄곧 그가 맡아왔다. 하지만 오카다 감독은 하세베에 주장완장을 건넸다. 오카다 감독이기에 가능했다. 나카자와는 오카다 감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오카다 역시 "나카자와 없는 일본팀을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오카다 감독은 나카자와를 앞세워 03년, 04년 요코하마 f. 마리노스를 2년 연속 j리그 우승팀으로 만든 전력이 있다. 즉 오카다였기에 주장교대가 가능했다. 그리고 이 주장교대는 팀에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오카다식 축구는 수비를 먼저 정돈시키고 중원을 만들고 여기에서 공격패턴을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클럽팀(요코하마 마리노스) 시절에도 그랬다. 이건 오카다의 흔들림없는 철학이다. 그는 이기기 위해선 점수를 내야 하지만, 한 점도 안 내주면 적어도 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축구는 점수를 내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누군가가 팀 전체를 지휘해야 한다. 어차피 부부젤라 때문에 뒤에서 게임 전체를 읽고 지시를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또 나카자와의 과묵한 성격도 주장엔 썩 어울리지 않는다. 하세베 '주장'카드는 중원과 수비의 연계를 절묘하게 이끌었다.
또 보통 수비적 축구라면 거칠고 더러운 반칙이 많이 나오기 마련인데 일본은 그렇지도 않다. 비단 일본 뿐만 아니다. 한국과 일본, 북한 등 아시아 축구에 세계 축구팬들이 격려와 성원을 보내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동아시아 3개국이 매우 깨끗하고 공정한 플레이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해야 겠다. 골을 넣은 선수들이 후보선수들과 한데 어울리는 세레모니 장면이다. 기자는 결정적으로 이 장면을 보고 일본은 16강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 골을 넣고 벤치로 달려가 벤치멤버들과 기쁨을 나누는 혼다 선수 (마이데일리 제공) ©jpnews | |
카메룬 전에서 혼다도 그랬지만 오늘 골을 넣은 엔도, 오카자키는 득점을 기록하자마자 벤치로 달려와 후보선수들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06년 독일월드컵과는 180도 다른 장면이다. 당시 사상 최강의 선수들로 모였다는 일본은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줬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주전선수 파벌과 후보선수 파벌로 나눠졌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11명만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이번엔 프랑스가 그렇다. 이런 팀은 16강 자격이 없다.
하지만 남아공의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연습시합의 연이은 패배가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해 줬다. 혼다는 카메룬 전이 끝난 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골을 넣고 막 달려가는데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 했다. 중간에 '아!'라고 번쩍 정신이 들어서 벤치로 방향을 틀었다(웃음)." 팀 전원이 하나로 뭉친, 수비적으로 완성된 일본은 쉽게 지지 않는다. 그런데 경기를 거듭할수록 다양한 공격패턴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물론 다음 상대인 파라과이도 강팀이지만, 지금 일본의 조직된 수비를 깰 수 있는 나라가 과연 얼마나 있을지 쉽사리 감이 오지 않는다.
아무튼 대회전의 혹평과 악평을 거침없이 헤쳐나와 부활한 오카다 재팬은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다. 관전자를 매료시키는, 일본의 플레이를 결승 토너먼트에서도 오랫동안 보고 싶다.
일본의 16강 진출을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