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인물소개를 하는 일본의 최근 기록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孫基禎(そんㆍきてい, ソンㆍギジョン, 1912年 8月 29日 ~ 2002年 11月 15日)は, 日本統治時代の朝鮮出身の日本の男子マラソン選手。大韓民国建国後は同国籍になり, 同国の陸上チームのコーチや陸連会長を務めた。
[孫基禎(손 기테이, 손기정 : 1912년 8월 29일 ~ 2002년 11월 15일)은 일본 통치시대 때 조선 출신의 일본 남자 마라톤 선수.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동 국가의 국적이 되어 동 국가의 육상 팀의 코치와 육상연맹회장을 맡았다.](위키피디아 일본어 버전 인용).
최근에 출간되는 일본의 스포츠 관련 기록에도 손기정은 ‘孫基禎(そんㆍきてい), 당시 일본국적’이라고 하는 형태로 인물소개를 하면서 손기정을 자국인이라고 명시한다. 이것을 읽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쾌한 입장이 아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기록을 그대로 인용ㆍ번역하여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 손기정 선수를 소개하는 기록문에서도 ‘손기정(손 기테이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45725)’로 운운하고 있는 실정이다.
위키피디아 일본어 버전에 박정희 대통령를 소개하는 곳에서도 매우 특이한 요소로서 그 많은 사진 중에서 박정희가 중위 때 만주에서 군복무를 했을 때 찍은 전투복 사진을 게재하여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어색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이것 역시 한국어 버전에서도 그 사진을 그대로 게재하여 인물을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본적 평가방식 내지는 소개의 이면에는 인물평가와 함께 묘하게 일본의 지배논리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원래 한국과 일본은 오래 전부터 동일한 문화공동체를 형성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자문화권이 확산되면서 거의 동일요소를 추구하는 상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문화 내지는 유교문화는 한일 양국이 각각의 풍토적 특색과 함께 자국의 입장에 부합되게 변용되었으나 거의 유사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한국의 지역성과 중국의 정치변동에 의하여 맞물려지는 역사성이 있는 반면에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의 토착성과 섬나라라는 견지에서 일찍이 다문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는 다른 일면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방식이 한국과는 다른 면들이 많이 있다. 민족의 유래와 국가형성을 기반화하는 신화가 다르기 때문에 더욱 이질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서로 다른 견해차이라든가 기본적으로 풍토적인 고유성 내지는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시각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계로 한국인들은 일본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마찬가지로 일본인들도 한국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무엘 헌팅턴이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일본을 따로 분류해내어 독자적인 일본문명권으로 갈래매김을 지은 것은 충분히 일리 있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같은 점이 있다면 일본이 대륙의 제반 사항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동질적인 요소가 많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일간의 시각차이를 좁힐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은 없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시 ‘지피지기’론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논리구축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 쪽을 이기기 위해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합리적으로 상대 쪽을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의 틀 속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인정하게 되면 최소한 입장차이는 좁힐 수 없을 지라도 각각의 고유성과 거기에서 기인하는 제반의 요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타인의 입장에서 사물을 관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입장에서라면 ‘역지사지’적 발상은 가장 중립적이거나 합리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과 일본의 양국에 가로놓인 갈등구조와 시각차이 등을 구체적으로 포착해낼 수있는 투시안(透視眼)이 필요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두 개의 눈을 가질 수 있는 ‘two-eye’의 시각이 필요하다는 논리에서 ‘two-eyeism’이라는 watching-angle을 다기적인 방법으로 구축하여 두 개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했을 경우에 근본적으로 관찰되는 사항들에 대해서 면밀한 추론 내지는 배경지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 해안(解案)이 모색된다는 가능성이 궁극적으로 유발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국인이 일본을 그리고 일본인이 한국을 더욱 더 정확하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밀착관찰(密着觀察)을 하기 위해서는 장차 ‘two-eyeism’의 관찰방식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은 각각 자국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또 상대국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는 학습자세가 필요하다.
그러한 지식확보를 위해서 서로 ‘특별한 이웃나라 관계’인 한국 옆의 일본, 일본 옆의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호이해를 위한 ‘two-eyeism’이 필요불가결한 때이다. ‘two-eyeism’의 관찰방식으로 공동의 시각을 조명할 때 갈등의 원인을 규명하면서 양국간의 화해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만나서 토론하고 따지고 헤아리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기를 보고 자기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보고 의견차이를 보이며 상호반성의 기회를 늘려나아가는 것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에 좋은 기회임과 동시에 반성과 공과를 공감하는 가운데에 화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