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에서 이어짐) - 그러니까 요금소라는 곳에 돈을 지불했을 뿐이니까 실제로 위안부들한테 돈이 건네졌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런 말씀이네요.
"그렇죠. 다른 곳 이야기를 들어보면 육군위안소 중에는 위안부에게 직접 군표로 지불했다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지만 여기 위안소는 돈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군표는 말이 군표지 일반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니까 사실 의미가 없다고 봐야지요."
- 마쓰바라 씨가 이용했다는 그 '남국료 위안소'에는아까 60명 정도 위안부가 있었다고 했는데 전체 군인들 수에 비해서 어떤 정도였나요. 위안소는 항상 붐볐습니까?"네. 붐볐습니다. 항상 군인들로 바글바글거렸어요. 매번 줄을 서야 했으니까. (사이) 평면도로 그리면 이렇게 되는데..."
- 일반인은 사용하지 못하는 거죠?"(평면도를 그리면서) 그렇죠. 일반인들은 바깥사회에 유곽 같은 곳을 이용하거나 공창이 있었으니까... (사이) 여기가 이렇게 울타리가 쳐져 있고, 입구가 이렇게 있으면 왼쪽에 요금소가 있고. 요금소 앞에 사람들이 줄을 길다랗게 늘어섰죠. 요금소 오른편에 길다란 동(棟)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1층짜리 길다란 막사인데 들어가면 길다란 복도가 나오고 끝에 세면장, 화장실이 보입니다. 물론 공용입니다. 복도를 쳐다보고 오른쪽에 방이 죽 나열돼 있습니다. 번호표를 든 사람들은 자기 방 번호표를 찾아가는 그런 방식이었죠."
▲ 마쓰바라 씨는 직접 위안소 평면도를 그렸다. 오른쪽이 마쓰바라 씨의 손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
- 이런 막사가 위안소 내에 몇 개나 있었습니까?"대 여섯개 정도? 보통 한 막사에 방이 10개 정도였으니까요. 정문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한 동이 서 있고 뒷편으로 죽 나열돼 있었죠."
- 실제 방 구조는 어떻던가요?"방 크기는 4조(다다미 4장 크기, 약 2평) 정도였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구석에얇은 판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매트리스가 깔려져 있었어요. 오른쪽 구석에는 위안부들이 자기 물건을 놔 둘 수 있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고 문 바로 옆에 경대가 있었나... 아무튼 그랬어요.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 아까 위안소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종류의 울타리인가요? 철조망같은 겁니까?"아뇨. 그냥 외부와 구분하기 위해서 친 건데,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대충 만든 그런 형태였습니다."
- 바깥에서 들어올 수 있다면 안쪽에서 나가는 것도 가능했겠네요. 마음만 먹으면."하지만 남국료는 섬이니까 나가봤자 별 의미가 없지요. 그리고 경비원이 그 주변을 계속 돌았습니다. 위안부가 나가는 걸 막는다기 보다는 혹시라도 들어오는 사람을 제어하기 위한 건데...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들어온다고 해서 무작정 하는게 아니라 요금소에 돈을 내고 방 번호표를 받아야 위안부들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요. (들어와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 정리하자면 위안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요금소에 돈을 내고 방 번호표를 받아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거니까, 위안부들이 돈을 직접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는 것이죠?"네. 어떻게 배분했는지 그런 건 저희들은 모릅니다."
- 그런데 아까 마쓰바라 씨는 위안소를 시설부대가 관리했다고 했는데요."위안소 자체는 군부대가, 그러니까 나쓰시마 위안소는 우리 부대가 관리한 게 맞지만 시설운영 자체는 민간업체에 위탁해서 했으니까 요금이 어떻게 분배되고 그런 구체적인 부분까지는 모릅니다."
- 그 민간업체 이름이나 그런 건 기억나십니까?"음, 그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 시설부대에서 그 쪽 관련 계약이나 그런 건 어디가 담당했습니까?"위안소에 관련된 사항은 시설부대 서무과가 담당했습니다."
- 이 남국료출입증도 그럼 서무과가 발급했겠네요."네. 그렇습니다. (출입증 나이란을 가리키며) 사실 이 나이도 거짓말인데요. 여긴 22살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 때 제 나이는 19살이었어요. 왜 그랬냐면 20살이상이 아니면 위안소 이용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제가 서무과로 찾아가서, 선물 같은 걸 가지고 간 것 같은데... 아무튼 좀 잘 봐달라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이걸(출입증) 발급받았지요."
- 나이가 차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하면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런 건가요?"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저같은 경우는 부서는 달라도 같은 부대에서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얼굴을 다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발급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통 20살 이전 어린 병사들이 위안소를 이용하고 그러면 안된다 그런 분위기도 있었으니까... 거짓말로 발급받은 건 제가 알고 있는 범위내에선 저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마쓰바라 마사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
- 어떻게 보면 규칙을 어긴 셈인데, 왜 그러신 건가요?"그 땐 위안소 실태를 알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고, 그냥 그걸 해결하고 싶었지요."
- 요금 문제를 제외한 위안부들의 처우는 어땠습니까? 보통 직장이나 군대도 평시훈련중에는 1시간에 10분 휴식하고 그러는데요."그런 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영업이 시작되면 무조건 군인들을 받아야 했고 군인들이 없더라도 언제 올 지 모르니까 계속 대기해야 했으니까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휴식시간은 없다고 봐야 겠지요."
- 군인들은 어땠나요? 시간제약 그런 건 있었습니까?"네. 그런데 시간이 길고 그러지 않아요. 10분에서 20분 정도? 욕구만 해결하고 바로 나오는 그런 겁니다. 여운에 빠져 있거나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뒷 사람이 기다리는 것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군인들은 외출할 때 반드시 콘돔 2개를 지급받았습니다. 혹시라도 임신하거나 성병에 걸리면 큰일나니까 그걸 예방하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 콘돔은 외출할 때 무조건 지급받는 겁니까?"네. 무슨 신청서를 쓰거나 그러는게 아니라 무조건 다 주는 겁니다. 외출 나가면 위안소에 가라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전부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위안소에 안 가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 이들은 콘돔을 버리거나 그냥 놔두거나 그랬지요."
- 합해서 120명의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군인들 수는 몇 명 이었습니까?"그건 유동적이었습니다. 나쓰시마는 함대기지니까 바다에서 죽지 않는 이상 이쪽에 모이게 됩니다. 함대가 집결할 때는 군인 수가 늘어나고 다시 바다에 나가면 줄어들고 그랬으니까... 평균 잡아서 3, 4만명 정도였다고 봅니다."
- 3, 4만명을 위안부 120명이 상대했다는 거네요."그런 셈입니다. 제가 생각해 보면 위안부 여성 한 명당 하루 평균 14, 5명을 받았을 거라고 봅니다. 훈련이 없을 땐 위안소가 붐비지만 훈련시에는 또 비게 되니까. 그걸 다 평균내면 14, 5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 마쓰바라 씨는 1942년에 시설부대로 배치받았다고 했습니다만 이 때 이미 이런 위안소가 있었습니까? 왜 이런 걸 물어보냐면 보통 우익들 하는 말이 위안소가 있었다 하더라도 전쟁말기에 조금 있었거나 다들 공창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원해서 돈 벌러 온거다 라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성적학대를 받는 성노예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든요."그건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공창은 환락가에 따로 있었으니까요. 나쓰시마만 하더라도 그런 공창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위안소는 막사가 설치되고 무엇보다 시설부대 관리하에 있었습니다. 또 제가 배치받았던 42년에 이미 이런 위안소가 존재하고 있었어요. 이 출입증은 43년으로 돼 있습니다만, 42년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42년에도 있었지만 종군위안소 자체는 중일전쟁 때부터 있었지요. 이건 제가 경험해 보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씀드리지 못합니다만 태평양전쟁 전부터 있었던 건 사실인 듯 합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중일전쟁 당시 강간사건 같은게 많이 발생했지요. 그게 이제 문제가 되니까 그럼 아예 이런 시설을 만들자, 그런 발상에서 출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아까 44년에 대공습을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그 이후에 위안소는 어떻게 됐습니까?"위안소는 다행히도 공습을 피해 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들이 전부 폐허가 돼 버려서 위안부들은 전부 스스로 먹거리를 조달해야 했습니다. 고구마나 감자 같은 걸 재배하거나 근처 해안가에서 생선을 잡았죠. 위안부들의 자급자족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이 때 저는 공습직후인 4월에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 그렇게 들었습니다. 위안부 여성들은 그게... 그러니까 44년 7월 사이판이 완전히 함락된 이후에 돌려보냈다고 그러더군요."
- 돌려보냈다는 건 어디로 돌려보냈다는 겁니까?"본국이지요."
- 본국이라면 한국을 말하는 겁니까?"아뇨. 일본입니다."
- 어떤 루트를 통해 일본으로 돌아왔을까요?"그게 상당히 불분명한데 제 예상으로는 아마 병원선(病院船)을 탄 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병원선을 타고 귀국했으니까요. 나쓰시마는 비록 공습은 받았지만 전부가 몰살한 건 아니니까요. 병원선도 간혹 왔다갔다 하고 했습니다. 여성군속, 거류민들도 있었으니까요. 그들과 함께 귀국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 위안소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습니다. 특별히 생각나는 위안부 여성이 혹시 있습니까?"음... 네. 자주 만났던 위안부는 22살이었는데 이름이 '미도리'였습니다."
- 일본인 위안부인가요?"아뇨. 한국에서 온 위안부인데 본명은 모르고 위안소에서는 미도리로 불렸던 여성입니다. 솔직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저같은 경우엔 잡무가 많아서 보통 밤늦게 위안소를 갔습니다. 군무원은 숙박이 가능했기 때문에 위안소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 그 여성과 함께 있었지요. 꽤 여러 번 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같이 밤을 지새고 또 그게 여러 번이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습니다만."그렇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가족 이야기, 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또 그렇게 제가 숙박을 하게 되면 다른 방에서, 그러니까 영업시간은 끝났고 숙박 군인이 없는 위안부 여성들이 미도리 방으로 건너 왔어요. 꽤 여러 명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기본적으론 아까 말했던 그런 것들입니다. 다들 울면서 가족들과 헤어진 아픔, 슬픔을 이야기하는 건데 한국인들은 가족을 생각하는 그런 것이 상당히 있으니까요. 이제 못 간다, 영원히 못 만난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우는 겁니다. 아까 그 미도리라는 이름의 여성은 저에게 소포를 부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 때 그 여성의 주소와 본명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다른 종이에 그것들을 옮겨 적어 놓고 부쳤어야 했는데 그냥 우체통에 넣어버린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쉽고 그러네요. 만일을 생각해서 적어 놨어야 하는 건데 말이죠."
- 그 소포는 어떤 소포입니까?"안은 확인해보지 못해서 모릅니다. 두꺼운 봉투였습니다. 아마도 고향집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도리는 자기는 못 돌아가니까 저한테 일본으로 돌아가면 꼭 부쳐달라고 하더군요."
- 미도리라는 분의 본명이나 주소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까?"사실은 저도 군무원이니까. 원래 그런 부탁을 받으면 안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고 미안하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을 적어두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방 머릿속에서 지웠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도 주소도 들었습니다만,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 공습후 위안부 여성들은 자급자족을 했다고 하셨는데, 공습전에는 어떻게 식사같은 걸 해결했나요?"식사는 시설부대에서 했고, 잠은 그 위안소에서 자고 그랬습니다."
- 위안소나 시설부대에서 잡역을 하던 장정들 말고 다른 한국인들도 있었습니까?"거류민으로 와 있는 한국, 조선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위안부 여성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어땠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접점 자체가 없으니까 위안부라는 존재자체를 몰랐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군인과 군속들만 (위안부와) 접촉했으니까요. 또 일반인들은 위안소를 사용할 수 없었고 성욕을 해결하려면 환락가에서 따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 아까 말씀하신 공창 같은 곳을 의미하는 건가요?"그렇죠. 거기가 사실 중요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위안소는 공창하고 전혀 다릅니다. 위안소는 완전히 따로 격리된 곳입니다. 매일 일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만 외출이 가능합니다. 외출도 성병검진을 위한 거니까 그냥 병원과 위안소를 왕복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위안소로 다시 돌아오면 바로 일을 해야 하니까 쉰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봐야지요."
- 위안부가 120명 정도 된다고 했는데 그 숫자는 변함없었나요? 새로 사람이 오면 그만큼 준다거나 그런 건 있었나요?"제가 나쓰시마에 주둔하기 시작한 때가 정확하게 43년 11월인데 이 때는 60명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목표기준이란 것이 있었는데 그 목표기준이 5, 60명 이었으니까요. 그 전에는 남국료 위안소가 어땠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늘어나 70명 이상 됐던 것 같습니다."
- 늘어났다는 건 원래 있던 분들은 그대로 있고 더 추가됐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기존 멤버는 계속 있는 겁니다. 괌 자료를 보면 나중엔 300명까지 늘었다 그러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더 늘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습니다. 당시 군인이나 군무원들, 그러니까 위안소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위안소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나요. 위안부들이 불쌍하다는 인식같은 건 있었나요?"전혀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그랬던 것이 당시 일본에는 공창제도가 있었거든요. 때문에 군 위안소도 공창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어요. 그 땐 지금과 달라서 보통 직장에서도 회식하고 단체로 공창에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 문화가 사회적으로 인정됐던 것이죠. 쇼와 31년(1956년)에 공창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다들 그런 감각이었어요. 지방에 출장갔다 돌아오는 길에 역 주변에 있는 공창촌에 들러 여행의 때를 벗긴다는 게 당연한 시대였으니까요. 저는 위안소를 이용하면 숙박을 자주했기 때문에 아침에 귀대를 했습니다. 그러면 '야노'라는 해군 중좌(중령)가 저를 불러서 '너 말이지, 너무 그런 곳 가는 게 아니다'라고 꾸중하기도 했어요. 사고방식 자체가 그랬으니까 그 때는 위안소에 간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그랬던 건 없었습니다."
- 그 상사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아, 그건 단순히 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런 곳에 자주 가기 보다 군무에 힘을 써라, 그런 의미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 위안부 여성들과 연애감정을 느끼거나 그런 건 있었습니까?"그런 사례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한국출신 죄수와 위안부 여성이 같은 고향 출신이라서 같이 도망갔다는 사례보고가 올라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 마쓰바라 씨가 도망가게 해 줬다거나..."그건 없습니다. 그랬다간 큰일나지요. 또 섬이라는 것도 있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우편물을 우체통에 넣어주거나 그녀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 죽은 사람은 있습니까?"폭격을 받아 몇몇 위안부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위안부들의 귀환 역시 제가 본 것이 아니니까 무사히 돌아갔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습니다."
- 임신한 사례는 있습니까?"제가 들은 바로는 없습니다."
- 만약 임신하면 어떻게 처리하도록 돼 있습니까?"중절시키는 게 일반적입니다. 위안부가 임신한 케이스는 버마(현 미얀마)에서 있었는데 결국 사산했다고 하더군요."
- 마쓰바라 씨는 구 일본군 군속 출신으로 실제 위안소를 이용하기도 했고 또 그 위안소를 관리하는 부대에서 근무하셨는데요. 지금은 '아비코 평화네트' 등 시민단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계시고 오늘은 귀중한 증언까지 해 주셨습니다. 무엇이 계기로 작용했나요?"위안소 문제는, 오늘 제가 경험한 것을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간 노랫말을 짓거나 해서 위안부들의 심정을 노래로 표현해 왔습니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며) 이게 제가 지은 노랫말인데 제목이 '종군위안부'입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지은 노랫말. 제목은 '종군위안부' 노랫말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속았다고 눈물 흘리는 위안부를 때리는 저 차가운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아 / 탄식하는 모습 또렷히 남아있는 위안부는 어느새 백발이 되어 오늘도 괴로워한다 / 다테야마(館山)의 종군위안부 비석이 부르는, 적도에서 원한속에 죽어간 여성 / 보소(房總) 바다 저편 먼 언덕에서 들려오는 통곡의 비석 '의 종군위안부'" ©jpnews/박철현 | |
- 이건 언제 지으셨나요?"그 옆에 날짜가 나오는데, 2005년 1월에 만들었네요. 그때 nhk가 종군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뭐랄까, 위안부의 비참한 삶을 제대로 보도하기는커녕 방송내내 역사를 왜곡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화가 많이 났습니다. 보도기관이 역사를 왜곡한다면 그걸 까발리는 것을 제 나름대로 해야 겠다고 생각해서 이 노랫말을 지은 겁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제가 직접 경험했던 위안부들의 삶을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속았다고 눈물 흘리는 위안부들을 때리는 저 차가운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아...'라는 식으로 나갑니다."
-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러니까 nhk의 방송을 보며 화가 났다고 하셨는데 그 화가 왜 났을까라는 부분입니다.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가 궁금합니다."아, 그건 예전부터 반전운동도 줄곧 해 온 것도 있고 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참 죄송스럽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98년 당시 농수산 대신이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라고 발언한 것이 컸습니다. 제가 위안소를 이용했고 관리하는 입장이었는데 종군위안부가 없다니 그게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런 거짓말을 태연하게 하는데 그냥 있어선 안되겠습디다."
- 용기를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중요한 증언이라고 생각합니다."중요한 증언이라기 보다 그냥 당사자로서 이런 부분이 감추어져선 안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제 지인들에게는 조금씩 말했습니다만... 사실 그거 여성에게 있어 가장 억울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성을 무참하게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의 물리적 힘에 의해 빼앗겨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남편, 아이들이 있는 위안부도 있었으니까 언젠가는 말해야 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마침 오늘이었을 뿐입니다."
- 긴 시간 감사드립니다."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이 인터뷰는 2010년 4월 21일 지바 현 아비코 시내 모처에서 이루어졌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