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첫사랑, 우린 스물이었다
그해 봄은 유난히 따뜻했다.
따뜻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입시'라는 속박에서 벗어난 봄이었으니까.
대학에 못가면 뭘할까?
만화가 밑에 들어가 연수생하면서 만화를 배울까? 하지만 만화에 재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미술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릴 적부터 우리집에 만화책이 넘쳐났다.
만화를 사회악으로 몰던 80년대 초반 우리집에서 만화는 좋은 교육서였고, 한글을 깨치는 도구였다. 김동화, 이두호 화백은 특히나 좋아하는 만화가였다. 어디 그뿐인가. 황미나, 이은혜도 빠뜨릴 수 없었다. 그래, 대학에 못가면 꼭 만화가다!
두번째론 음악 전문학교를 생각했다. 고교시절 음악 실기 시험 후, 두어번쯤 음악교사가 날 따로 불러 성악전공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좋은 소프라노 가수가 될 거라고 교사가 말했다. 그치만 음악을 전공하기에 고2란 시기는 늦은감이 있었고, 배우자니 돈도 많이 들 것 같아, 부모님께 알리지조차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겐 만화가 연수생, 소프라노 가수 지망생의 기회 대신 대학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대학이란 곳에 대한 동경도 있었지만, 4년동안 학문을 닦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이상하게도 공부를 좋아했다. 집에서 공부하란 소릴 안해서였는지, 공부에 대한 반감같은 걸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공부가 취미였다. 그러니까 이 나이가 되도록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돌이켜봐도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가늠할 수 없다. 그저 내가 가는 곳에 길이 생길 뿐이라고 믿자.
일본어를 잘하려면 1 - 연극으로 일본어가 쑥쑥
게이오 대학 후지사와 캠퍼스는 콘크리트가 온전히 드러난 건물이 도회적인 느낌으로 충만했다. 일본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인 마키 후미히꼬(마쿠하리 메세, 아오야마 스파이럴 빌딩의 건축가)의 건축물이라 한다.
그 봄, 교내에선 동아리 선전활동이 활발히 진행중이었고, 내가 망설임 없이 찾아간 곳은 연극 동아리였다.
고교시절부터 연극을 했었기에 대학에서도 반드시 연극을 해보고 싶었다. 연극엔 초등학교 시절부터 관심이 있었다. 초등생 시절에도 연극부 문턱을 왔다갔다 했고, 고교시절엔 좀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각색하고, 연출을 담당했다.
사람들은 초면에서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얌전해보인다” 또는 “참하다”였는데, 사춘기 시절, 그런 단어들은 괜한 스트레스꺼리였다. 그런 이미지를 바꿔보고자 해서 연극에 매달렸던 건지도 모른다. 여하튼 내 안에선 무언가가 늘 꿈틀거렸고, 그들을 풀어줄 무대가 내겐 꼭 필요했다.
“외국인은 처음인 걸”
선배가 입을 열었다.
“일본어는 잘 하나?”
“아뇨, 그냥 듣기는 들어요”
당시 후지사와 캠퍼스는 유학생 자격 입시시험을 별도로 도입하지 않은 까닭에 외국인 유학생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약 800명의 신입생 중 재일동포를 제외하고, 한국출신의 학생은 나를 포함해 3명이 전부였다. 그 중 유일한 여자인 내가 연극 동아리를 찾자, 그들은 의외란 표정이었다.
연극 동아리 창단 이래 처음 찾아온 외국인을 위해, 선배들은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내 어정쩡한 발음을 일본인처럼, 그것도 도쿄출신 사람처럼 바꿔주기 위해 매일 트레이닝을 시켰다.
어쩌다 내가 배역이라도 맡으면, 내 대사를 테이프에 녹음해, 정확한 발음을 지도했다. 덕분에 연극 동아리 오디션에 무사히 합격해, 조연의 자리를 얻기도 했고, 1학년이 끝날 무렵 크리스마스 공연에선 무대감독을 맡을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어 실력은 상상도 못했을만큼 향상되었다. 꿀먹은 벙어리에서 일본인과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일본어 발음은 일본인과 다름없을 만큼 교정되었다. 대사를 외우면서 시험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일본인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단어들을 익혔고, 일본어의 남녀차를 배웠다.
일본어, 특히나 발음을 교정하고 싶다면, 연극을 추천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꼭 일본사람처럼 발음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언어란 통하면 그만이니까.)
말이 나왔으니 조금 더 말해보자면 두번째 좋은 방법은 키보드 치기다. 왠 키보드? 왠 블라인드 터치? 일본어의 특징은 장단음과 청탁음을 가진 언어다. 우리가 가장 구분하기 어려운 게 장단음, 그리고 청탁음인데, 이는 들어서 구분하기 어렵고, 듣지 못하면 바르게 말하기도 어렵다. 이럴 땐 키보드로 쳐서 한자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써보면 된다.
예를 들어, 우유란 뜻의 규우뉴우(ぎゅうにゅう). 규뉴(ぎゅにゅ), 규유뉴(ぎゅうにゅ), 규뉴우(ぎゅにゅう), 큐뉴(きゅにゅ), 큐뉴유(きゅにゅう)……, 이런 식으로는 백년을 두들겨도 절대 우유(牛乳)란 한자를 만날 수 없다.
제대로 변환시키기 위해선 제대로 쳐야한다. 히라가나 입력을 하면서, 입력하는대로 그대로 따라 읽으면 저절로 장음인지, 단음인지, 청음인지, 탁음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도대체 뭘 치면 좋을까? 일본어 소설, 가능하면 단편을 구입해서 써있는 그대로 입력해보는 거다. 3개월만 쳐보면 일본어 박사가 될 수 있다. 소설도 읽고, 블라인드 터치도 익히고, 일본어 발음까지 교정할 수 있는 1석 3조를 얻게 된다.
일본어를 잘하려면 2 - 사랑에 빠져라
공부하고 싶어서, 단지 그 이유로 찾은 대학에서 학구열보다 먼저 찾아온 것이 첫사랑이었다. 변명을 해두자. 언어를 공부하는데 사랑만큼 중요한 게 또 있으랴.
하루마(가명)는 같은 나이로 연극 동아리 최고의 꽃미남이었다. 루저왕국(?)이라는 일본에서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테니스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와 까무잡잡한 피부, 장동건을 닮은 서글서글한 눈매. 게다가 그는 위로 누나만 셋이었다. 즉 여자 다루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외모는 물론이요, 상냥하고, 매너좋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는 연극 동아리 뿐만 아니라, 그해 신입생 중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자들 수다에까지 동참해주는 그는 모든 여대생의 우상이었고, 나 역시도 그런 여대생 중 한 명이었다.
그와 같은 동아리에 속해 있다는 것만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아 참 하나 더 있다. 그건 내가 한국인, 외국인이란 사실이다. 워낙 외국인이 없는 캠퍼스였기에, 외국인인 나에 대해 친구들은 더 신경을 써주고, 더 챙겨주는 편이었다. 그도 역시 늘 자기 옆자리에 나를 앉히고, 불편한 게 없는지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는지 확인해주고, 챙겨주었다.
하루마는 대여섯 명의 여학생들에 언제나 둘러싸여 있었다. 그 여학생들 사이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나왔다. 그녀들은 하루마에게 데이트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면 서로가 친구다 보니, 눈치가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특별한 여자친구 그룹에 속해있지 않던 나는 좀 달랐다.
“다음 시간 수업이야? 뭔데? 어, 나도 그건데……”라고 자연스럽게 말했고, 그러면 그는 “그럼 같이 가자”고 대답했다.
그 당시엔 일본어가 서툴러서, 돌려서 말하기보다 직설적인 표현을 썼다. 내일 시간이 비니까 같이 놀자, 연극연습 끝나면 같이 밥먹자, 주말에 테니스 가르쳐 줘 등등. 그런데 어느 심리학 책에 따르면, 남자는 직설적인 화법에 더 반응한다고 한다.
“당신이 쓰레기를 안 버린 게 벌써 석달이야. 당신은 왜 이렇게 비협조적이지?”라고 말하기 보다“내일 아침 쓰레기를 버려줘”가 훨씬 현명한 명령 또는 권유가 된다.
그와 난 어느새 거의 대부분의 수업을 같이 듣는 사이가 되었고, 그는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고전문학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대신 한국에서는 중・고등생 추천도서로 고전문학이 빠지지 않는다.
고교시절 내내 도서관 사서를 담당했던 나는 괴테, 카프카, 까뮈, 게오르규 등과 친하게 지냈고, 이런 요소들은 그와의 연애에서 아주 유용하게 작용했다. 고전문학을 좋아한다는 한마디에 “그럼 도서관에서 같이 읽자”고 먼저 얘기해준 건 하루마였다. 그때쯤 난 너무 기뻐서 입이 찢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매주 도서관에서 괴테나 나츠메 소세키를 들추고, 일주일에 한 번쯤은 고다르나 펠리니의 영화를 보기도 했다. 퇴폐된 부유층 사회에서 취재거리를 찾는 한 기사의 역시나 퇴폐한 인생을 담은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이 왜 ‘씁쓸한 인생’이 아니라 ‘달콤한 인생’인 건지 그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치만, 그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단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하늘이 두 배로 파래보였고, 비가 와도 괜히 웃음만 나던 시절이었다.
이쯤에서 난 공부보다 그를 만나기 위해 학교에 다녔던 것 같다. 수업을 빠뜨리는 일도 없었고, 장학금도 챙겼지만, 염불보단 잿밥에 관심이 있었다. 아니 잿밥이 더 필요한 시기였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변함없이 친절했고, 내 일본어가 좀 허술해도 참고 들어주었다. 이메일은 매일 주고 받았다. 20살이었으니, 대학을 졸업하면 어떻게 살지, 꿈이 무언지, 그런 희망찬 얘기들로 가득했다.
한국에서 온 일본어가 서툰 여학생. 그건 마이너스가 아니라 연애에 있어선 플러스였다. 일본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웃음을 짓는 것뿐이었다. 이것 또한 그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연인이 생기면 어학이 느는 이유는 언어를 편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하늘이 참 파랗다”
“어머나, 달이 참 둥그네”
그런 아무 의미가 없는, 거의 쓰잘데기 없는 말들은 친구를 앞에 두고 하기보다 연인을 앞에 두고 했을 때, 의미가 발생하고, 사랑이 파생된다. 이런 아무 의미가 없는 말들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바로 연인이다.
3분만의 고백
그와 보내는 시간은 점점 늘어갔지만 연인이기엔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를 놓치기 싫었다.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은 우연히 찾아왔다.
칠월칠석. 교내에선 여름축제가 열렸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불꽃놀이.
연극 동아리 선후배가 언덕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그와 난 동아리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틀었다. 이윽고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우린 맥주 캔을 하나씩 땄다. 두세모금 먹었을까. 무슨 용기였을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있잖아, 하루마”
“……”
그는 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펑. 불꽃은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있잖아, 나 너 좋아해. 나래도 괜찮아?”
“너야말로, 나같은 남자라도 괜찮아?”
그와 눈을 마주하고 답했다.
“응”
생전 처음 고백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3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나도 너 좋아해” 그렇게 말이다. 사랑이란 단어가 오고 가지도 않았고, 뜨거운 눈맞춤이나 입맞춤 따위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활짝 핀 불꽃처럼 환하고 따스하고 화려하고 충만했다.
그는 한 손엔 맥주를,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부드럽게 쥐어 왔다. 하루마는 불꽃놀이가 끝날 때까지 내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사귐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불꽃놀이로부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6부로 이어짐)
*몇회에 걸쳐 <일본인 남편과 결혼하기>를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