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교육은 '반일적이다'라고 하시는 일본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 국사가 한때 '일본사'였던것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일본사람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저는 궁금합니다.
한국・조선은 한때 '일본국'이었던것은 사실입니다. 사실로써 역사교육 현장에서 그것을 접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어 전황이 악화되면서 일본에서는 '일억 일심 불덩이'라는 슬로건이 내세워졌습니다. 일본국민 1억명이 한마음, 불덩어리가 되어 적에게 맞붙겠다는 용기를 고무시키겠다는 뜻입니다만, 나중에 이 '일억'이란 것이 한반도를 포함한 인구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일본이란 나라가 너무 멍청하고 경솔하다고 느낀 바 있습니다.
작년 봄의 일입니다만, 여수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삼천포로 향하는 길에 옆자리에 앉게 된 어떤 할머니가 제가 일본사람임을 알아 보고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상냥하고 웃는 모습이 아름다우신 80세를 넘으신 분이였습니다. 저도 조금은 한국어를 합니다만 제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추억하듯이 일제시대때 배웠던 일본노래나 생활속에 있었던 일본어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제가 놀란것은 그 분이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일본 군가를 부르셨던것입니다.
"서주, 서주로 인마는 전진한다…. 서주, 있기 좋을까, 살기 좋을 까…"
그것이 대륙으로 진군하는 일본군인의 걸음을 묘사해 일본에서도 대히트를 친 '보리와 군인'이라는 노래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미안해서 고개를 숙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여학생 시절 사용하셨던 일본어가 뛰어나왔습니다.
"요시코상 고쿠로우사마데스!" (요시코씨 수고하십니다.)
그 “고쿠로우사마데스”의 또렷또렷한 말솜씨에는 부녀자라도 전쟁중의 엄격한 계율하에 처해져 있었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한테는 동네 버스에 탄 제가 몇십년만에 본 일본사람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무심코 처녀시절의 나날을 떠올리며 생각나는대로 일본말을 말씀하셨던 것이겠지요.
그것은 이국의 외진 시골을 여행하는 일본사람인 저에 대한 성심껏 배려와 격려의 마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죄송합니다" 무심코 이렇게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빠져들 듯 그리운 추억 속을 여행하는 듯 한 할머니 눈에는 작게 어깨를 움츠리기만 하는 저의 모습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일본역사 교사셨던 k선생님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때 당시 k선생님은 아직 27살, 지금이 돼서 생각해보면 선생님이라고 해도 '젊은이'입니다. 교직에 종사한지 얼마 안 돼 이상에 불타 교단에 오르셨음이 틀림없습니다.
k선생님은 교과서만 하기엔 좀 허전하셨는지 매 수업마다 자기가 작성한 프린트나 자료를 준비해오셨습니다. 인원수 만큼 인쇄할 수 없는 분량의 자료 같은 것은 학생에게 돌려가면서 보여주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사회과 수업은 자칫 현대사가 소홀히 되기 쉽다는 말은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k선생님은 그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서 학생에게 가르치려고 애쓰셨던 것입니다.
특히 선생님이 힘을 주고 저희에게 가르쳐주셨던 것이 일본과 한반도와의 관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시대에 관한 것, 그리고 1923년에 일어났던 관동대지진에 관한 것….
일본 관동 지방을 미증유의 대지진이 덮친 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 일본인에게 복수한다”는 아무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습니다. 그때 이미 한국과 일본은 합병된 후였으므로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 국내에서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서 패닉이 된 일본인은 '자경단'을 결성하여 아무 죄도 없는 조선 시민 약 7천명을 학살하였습니다.
k선생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때의 현장사진이나 수많은 자료들은 어린 저희 마음속 깊이 '어쩌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이...', '어떻게 이토록 참혹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처음 보고 듣는 사실에 너무나 큰 충격에 다만 놀랄 뿐이었습니다만, 그때 제마음 한 구석에 분명 작은 씨앗이 뿌려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일은 몇십년이나 마음 속 깊이 잠자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발아하여 한국과 일본을잇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뜻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때 아직 청년이었던 k선생님도 이제는 정년을 맞이하실 무렵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제 활동을 꼭 지켜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설마 그 씨앗을 심은 것이 선생님 자신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부드러운 아이 마음에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가. 어른들은 마음을 담아 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미래의 한일을 바꿔갈 초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벌써 35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지만 당시의 일본에도 이런 독실한 마음을 품은 교사가 계셨던 것을 오늘은 전하고 싶었습니다.
구사카와 선생님, 건강히 지내고 계시는지요.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 일, 지금 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수 있으면 합니다.
젊은 날에 어떤 마음으로 교단에 서계셨던 것인지요.
그리고 지금의 한국과 일본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私が韓国に関わった底辺には
韓国の歴史教育は「反日的」だとおっしゃる日本の方もあるようです。
しかし韓国の国史が一時期「日本史」であったことに、どれだけの日本人が思いを致しているだろうかと思うのです。
韓国・朝鮮は一時期「日本国」であったわけです。事実として歴史教育のなかでそのことに触れるのは当然のことだと思います。
太平洋戦争が激化し、戦況が危うくなる中、日本では「一億一心火の玉」というスローガンが掲げられました。日本国民一億人が一心、火の玉になって敵にまみえるのだという勇ましさを鼓舞する意味のものですが、後になって「一億」とは朝鮮半島を含めた人口であったと知ったときは、迂闊であったと思ったものです。
昨年春のこと、麗水から市外バスにのって三千浦へ向かう道すがら、隣りの座席に乗り合わせたおばあさんが私を日本人と認めて声を掛けてくれました。
とてもにこやかな優しい方で齢80を越えていらっしゃいました。
こちらは少々韓国語も話すのですが、私が日本人と知って懐かしそうに日帝時代に習った日本の歌や生活の中にあった日本語をお話くださいました。
おどろいたのはその方が無邪気な様子で日本の軍歌を歌われたことです。
「徐州、徐州と人馬は進む・・、徐州、居よいか住み良いか・・」
それが大陸へと進軍する日本兵の歩みを描写し、日本でも大ヒットを遂げた「麦と兵隊」という歌だと分かったとき、私はあまりのことに、ただ俯く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
つづいて女学校時代に使っていた日本語が飛び出しました。
「よし子さん、ご苦労様です!」
その「ご苦労様です」のはきはきとした言い回しには、婦女子であっても戦時中の厳しい戒律にさらされていた様子がありありと感じられました。
おばあさんにしてみれば、ローカルなバスに乗り込んできた私は、何十年振りでみた日本人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つい乙女の日々を思い出して、思い出すままに日本の言葉を語ったまででしょう。
それは異国の片田舎を旅する日本人の私に対して、精一杯の優しさと、ねぎらいの気持ちであったと思います。
「申し訳ありません」ついそう、口をついて出ましたが、懐かしい想い出の中に夢中で旅しているかのようなおばあさんの目には、小さく肩をすぼめるばかりの私の姿など見えていないようでした。
私が韓国に関心をもつようになったのは、高校時代日本史の教師であったk先生の影響があったかもしれません。
当時k先生はまだ27才、いまから考えれば先生といっても「若者」です。教職について間もなく、理想に燃えて教壇に立っていたに違いありません。K先生は教科書だけでは物足りないのか、毎回の授業に自ら作製したプリントや資料などを用意していました。
人数分印刷できないようなものは、資料を回覧させて生徒達に見せてくれることもありました。
日本の社会科の授業はとかく現代史が疎かになっているとは良く言われることですが、K先生はその足りない分を補足して生徒達に教えようと懸命だったのです。
ことに先生が力を入れて私達に教えてくれたのが、日本と朝鮮半島との関係だったと思います。
日本が朝鮮を植民地にしていた時代のこと、そして大正十二年(1923年)に起こった関東大震災の折りのこと・・。
関東地方を未曽有の大地震が襲った後、「朝鮮人が井戸に毒を投じて日本人に報復する」という根拠のない流言飛語が流れたのです。当時はすでに日韓は併合された後でしたので、多くの朝鮮の人達が日本国内にも暮らしていたのです。
このような噂は瞬くまに広がり、パニックになった日本人は「自警団」を組織し、何の罪もない朝鮮人市民、約七千人を虐殺しました。
K先生によって私達に見せられた当時の現場写真や資料の数々は、幼い私達の心に「なんという理不尽」、「なんという痛ましさ」として胸に迫ったものです。
その時は初めて目にし、耳にする事実のあまりの衝撃に、ただおどろくばかりでしたが、その時に私の心のどこかにきっと小さな種が蒔かれたのかも知れません。
それは何十年も心の奥底で眠っていましたが、あるとき発芽して日韓を繋ぐことの一助になりたいと志を持つに至ったわけです。
あの時、まだ青年であったK先生も、もはや定年を迎えていらっしゃ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そして、どこかで私の活動をきっと見守ってくださっただろうとは思いますが、
まさかその種を植えたのが、ご自身であったとは夢にも思っていないことでしょう。
柔らかな子供の心にどのような種の蒔くのか。
大人達は心してかからねばなりません。
それが未来の日韓を変えてゆく礎になるのかもしれないからです。
もうはるか35年も昔のことですが、当時の日本にもこんなに篤い思いを抱いた教師があったことを、今日はお伝えしたかったのでした。
草川先生、お元気でしょうか?
機会があれば一度お目にかかりものです。
そして、あの時のこと、今のこと、ゆっくりと語り合えたらと思います。
お若い日々、どんな気持ちで教壇に立たれていたのでしょうか。
そして今の日韓をどう見ていらっしゃるのでしょう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