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홋카이도 최북단 왓카나이 소야미사키의 모습. / 사진 제공 = 강명석 © JP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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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눈은 11월부터 시작해 늦으면 그 다음해 4월까지 멈추지 않고 내린다. 1년에 거의 절반 가까이 눈이 내리는 셈인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유명한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되는 니가타 현(新潟県)보다 오히려 홋카이도가 설국이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싶다.
내가 기숙하고 있는 기숙사에는 대만, 인도네시아와 같이 거의 눈을 볼 수 없는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다. 삿포로에 첫 함박눈이 내리던 날, 창 밖으로 펼쳐진 온통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아이처럼 기뻐하던 미아와 찬드라, 신디가 생각난다. 그 날밤. 우리들은 손발이 꽝꽝 얼어붙을 때까지 어린애처럼 눈밭에서 뒹굴며 뛰어놀다가, 기숙사로 돌아와 함께 따뜻한 코코아를 마신 적이 있다.
눈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귀찮은 것 정도로 인식될 수 있지만, 나에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쿵쿵 뛰게 하는 하늘로부터 보내온 선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여름, 겨울 어느 쪽이 좋아?’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늘 겨울이라고 대답한다. 살을 에이는 것 같은 겨울 바람은 싫지만, 그래도 겨울은 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지 않은가.
얼어붙은 빙판길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친구들과 팔짱을 끼고서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하며 걷는 것이 그 순간이 나는 좋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창 밖으로 켜켜이 쌓여가는 눈을 바라보는 광경도 좋다. 그래서인지 눈과 함께 보낸 나의 홋카이에서의 추억은 왠지 내 마음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따뜻하게 계속 흐르고 있는 것만 같다. 고작 반년 정도만 머물렀을 뿐이었는데도 눈으로 가득했던 홋카이도는 지금도 나의 마음 속 고향이다.
아무튼 학교의 모든 커리큘럼이 끝나고, 일상에는 여유가 생겼다. 대학 친구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버리고, 기숙사의 친구들도 하나 둘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갈 시기였다. 어느 순간, 그토록 붐비던 기숙사가 텅 빈 공간이 되어버렸다. 늘 누군가와 함께 있던 곳에서 갑자기 홀로 남겨지자 곧바로 외로움이 밀려왔다.
▲ 열차가 정차 중인 홋카이도 간의역의 모습. / 사진 제공 = 강명석 © JP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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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여행이 떠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여유를 즐길만큼 주머니 사정이 두둑하지 않았다. 고민끝에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할 수 있는 정보를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JR홋카이도(일본의 철도회사)는 매년 12월 무렵부터 정초까지 기간한정으로 청춘18티켓(青春18きっぷ)라는 상품을 판매한다. 홋카이도의 철도 전 구간을 5일간 마음껏 타고 내릴 수 있는 티켓으로, 우리나라의 코레일에서 2007년부터 발매하고 있는 내일로티켓의 일본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내일로티켓처럼 이 티켓의 최대 장점은 싼 가격이고 치명적인 단점은 느리다는 것이다.
큰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완행열차는 보통 하루 온종일이 달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종종 급행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1시간 이상 정차할 때도 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여러 번 환승도 해야 한다. 때문에 보통 4시간 걸릴 구간이 12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당연한 현상이지만 한없이 지루하고 답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머니 사정이 좋은 사람들이 불편할 이 여행은 반대로 나처럼 지갑이 가벼운 외국인에게는 더 없이 좋은 여행 프로그램이었다.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목적지로 향하는 한칸짜리 열차안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설산을 바라보며 한 페이지, 한페이지를 책장을 넘기는 것도 무엇보다 나에게는 하나나의 축복과도 같았다. 뿐만 아니라 차창 밖 풍경을 반찬 삼아 도시락을 까먹는 즐거움도 꽤 쏠쏠했고, 한 정거장 한 정거장 다가오는 낯선 마을에 대한 설레임 또한 이국인에게는 또 다른, 평소에 맛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느낌의 여정이었다.
그렇게 청춘18티켓으로 나는 겨울방학 동안 넓은 홋카이도의 땅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북쪽으로는 최북단 왓카나이(稚内)에서, 동쪽으로는 쿠시로(釧路), 남쪽으로는 하코다테(函館)까지 홋카이도 전체를 일주했다. 학교에서는 배울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홋카이도를 온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 하코다테의 야경. / 사진 제공 = 강명석 © JP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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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다테는 홋카이도 남서부에 위치한 일본의 3대 야경으로 유명하다. 홋카이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역사적으로는 메이지유신 이후 본토인이 침투한 첫 개항지로 북방의 넓은 땅을 개척해나가기 위한 첫 항구가 되었던 곳이다. 반대로 원주민인 아이누족에게는 침략자들이 침입을 시작한 한서린 땅이기도 하다.
이 항구 도시가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여행중에 우연히 들어간 바(bar)에서 만난 유쾌한 주인장 때문이다. 그곳은 척 보기에도 세월의 흔적이 담겨있는 오래된 재즈바였다. 선글라스에 말총머리, 조금 튀는 검정색의 양복을 입은 토시미(利美) 씨는 비토 타케시의 영화에 등장하는 건달 같은 생김새에 인상은 무섭게 생겼지만 정 많은 사람이었다.
▲ 하코다테에서 만난 토시미 씨(오른쪽) 고바야시 씨(왼쪽). / 사진 제공 = 강명석 © JP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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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정처없이 하코다테 시내를 누비고 다니다보니 어느덧 사방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숙소를 잡아야 했다. 전날에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난방이 잘 들지 않아 방에서 입김이 다 나올 지경이다. 때문에 아침에 게스트하우스를 나올 때 하룻밤 더 묵겠냐는 주인의 질문을 어물쩍 넘겨 버렸다. 숙박비를 내고서 푹 쉬지 못한다면 차라리 인터넷카페에서 하루를 보내는 편이 나을 것이리라.
그렇게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아 마을을 방황하고 있다가 발견한 곳이 이 재즈바였다. 가게 앞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3000엔 술 무제한 서비스’, ‘영업시간 밤 07:00~아침 04:00’ 문득 좋은 생각인지, 젊음의 혈기에서 나온 생각인지 모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의외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가게 입장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물어봐서 손해볼 일은 없지 않은가.
"새벽에 출발하는 첫 열차를 탈 때까지 이곳에 있고 싶다."
조금은 엉뚱하고도 무리일지도 모르는 내 청을 토시미 씨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전문적인 바(bar)답게 가게에는 굉장히 다양한 주종의 칵테일이 갖춰져 있었는데, 나는 한 가지씩 천천히 모든 종류의 술을 음미하며 시간을 보냈다. 음주를 꽤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토시미 씨는 가게로 홀로 들어와 새벽까지 있겠다고 말한 외지인의 당돌함에 꽤나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마침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도 없었다. 토시미 씨는 하나 둘 질문을 해오더니, 아예 내 앞자리에 걸터앉아 자기 잔을 꺼내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엔 일본의 미식, 홋카이도 해산물의 신선함, 하코다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지만 대게 홋카이도에서는 그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홋카이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도산코’(道産子: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아이)로 칭할 정도로 지역에 대한 애착심이 강했다.
얼마만큼 시간이 흐르자 토시미 씨도 조금 취기가 돌았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몇 해 전 딸이 손녀를 낳은 이야기(사진을 보여주며 딸이 보아를 닮았다고 자랑했다), 도쿄의 직장인이었던 종업원 고바야시 씨가 이곳 바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야기,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형편없는지에 대해서 등등……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국 아저씨들이 요즘 젊은이에게 하는 푸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돼서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밤이 깊도록 우리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몇몇 손님들이 왔다 갔으나 토시미 씨는 별 신경도 쓰지않고 계속 내 쪽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단골손님이 올 때마다 그들에게 ‘한국에서 온 요즘 일본에서는 흔치 않은 젊은이’ 쯤으로 나를 소개했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손님이 모두 빠져나가자 토시미 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양국이 사이가 좋지 못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과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게는 그 말이 무척이나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날 토시미 씨는 내게 ‘えこひいき(에코히이끼: 편애)’라는 일본어 표현을 알려주었다. 그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을 ‘편애’하는 성격인데, 내가 그 중에 속한다면서 말이다.
그날 토시미 씨는 서둘러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기왕 하코다테에 왔으니 하코다테 명물 라면은 꼭 먹고 가야한다며 나를 가게에서 가까운 근방에서 유명하다는 라면집에 데리고 갔다.
▲ 하코다테의 한 라면집에서. 필자의 왼쪽은 고바야시 씨. / 사진 제공 = 강명석 © JP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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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토시미 씨, 코바야시 씨, 가게의 단골손님 한 명과 함께 볶음밥에 라면, 만두, 맥주를 시켜서 나눠먹었다. 우리들은 더 이상 손님과 가게 주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경험에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헤어질 때는 토시미 씨가 택시를 잡더니 내 손에 2천엔을 쥐어 주었다. 나는 극구 사양했지만 그는 "나중에 너도 너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이런 식으로 베풀어주면 된다"며 막무가내로 손에 쥐어 주었다.
그날 나는 술을 무제한 마시는 서비스로 소비세 별도의 3천엔을 냈다. 그리고 라면 값과 택시비 2천엔, 단골손님에게서 토시미 씨가 강탈한(?) 500엔까지 받았다. 결국 나는 한 푼도 내지 않고 술을 마신 셈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고바야시 씨가 싸준 소금 주먹밥 두 알을 먹으며 그 날의 기분을 글로 남겨놓았다.
2014년의 홋카이도, 내가 마주한 것은 분명 일본 우경화의 엄혹한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단순히 일본이나 일본인이 싫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토시미 씨 같이 상대의 국적을 신경 쓰지 않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후 홋카이도에서 여러 번 헤이트스피치와 마주했다. 그들은 삿포로 눈꽃 축제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모멸에 가득찬 험한 말들을 일방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축제 현장에는 한국인과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삿포로역 지하통로에서는 위안부와 관련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우익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내가 겪은 홋카이도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홋카이도에서 수 없이 많은 ‘토시미 씨’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외지인인 나에게 조건 없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내가 만난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때때로 양국 미디어에 비친 한국과 일본은 민족주의에 물든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땅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말이다.
나는 한일의 국가간 민족주의와 자국 이기주의를 넘는 방법이 결국 양국 국민들이 교류를 통해 더 많은 ‘토시미 씨’를 만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언론이나 미디어를 통한 간접 경험으로 덮어 씌워진 타국에 대한 이미지를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벗어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좋은 추억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나면, 타국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과 비판을 삼가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우에무라 전 아사히 신문 기자의 우익들의 공격은 좀체로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