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news에 ‘일본 출산기’ 원고를 쓰고 싶다는 전화를 건지 한 달이 지났다. 쓰겠다 쓰겠다고 약속을 하고도 원고를 보내지 못한 건,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니,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4년 전 일을 다시 꺼내기가 내겐 너무나도 힘든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글은 진솔함에서 비롯하고, 진솔함이 없다면 그 어떤 사실을 끄적거린다 하더라도, 미비한 전달 밖에 낳지 않으리라. 모든 사실을 덮어두고 원고를 쓴다는 사실이 께름칙했기에, 첫 원고치곤 좀 안타깝지만, 유산 이야기부터 시작하려한다.
결혼 4년만에 아이가 생겼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책이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 시간엔 아무런 발언도 할 수 없었다. 미열은 계속되고 있었고, 속은 끊임없이 울렁거렸다. 수업이 끝난 후 교수는 날 불러, 발언을 좀 더 해줬음 좋겠다고 충고했다.
워낙 수업 중 질문과 발언이 잦은 내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몸이 평소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임신이 분명해.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첫번째 아이를 임신 21주만에 잃었던 트라우마가 분명했다.
‘유산’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티비 드라마에서나 보는 배가 아파 쓰러지는 여자의 모습일까. 현실은 그게 다가 아니었고, 겪으면 겪을 수록 힘든 일이란 사실을 체험을 통해 절실히 느꼈다.
임신 초기 유산과는 달리, 중기 유산은 이미 커버린 아이를 어떻게 자궁 밖으로 꺼내느냐에 달려있다. 초기처럼 아이가 떨어져 버리는 게 아니라, 아이를 떼내야 하는 경우다. 중절 수술처럼 잘라서 버릴 정도의 크기는 이미 지난 게 임신 중기다.
운전 교습소를 다녀온 저녁, 일 때문에 원고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2주전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아무 이상도 없다고 말했다. 살면서 특별히 건강이 나쁜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남들처럼, 남들과 똑같이 아이를 낳을 거라 굳게 믿고 있던 차였다.
갑자기 양수가 터지고 병원에 실려가자, 의사는 “양수가 없으면 아이를 기를 수 없다. 아이를 꺼내보겠지만, 22주가 지나지 않으면 신생아응급실(nicu)를 사용할 수 없고, 살아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살려낼 보장도 없다”고 의사다운 담담함으로 짧은 정보만을 제공했다.
이후, 모든 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고, 눈 깜빡 할 사이에 하나의 생명이 다하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봐야했다. 아니, 지켜보는 것뿐 아니라 내 몸으로 견뎌내야했다.
당시 다녔던 산부인과는 개인병원이었는데, 시부야구(渋谷区)에선 알아주는 병원이었다. 어느 연예인이 아이를 낳은 병원이라는 등, 어느 스포츠 선수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등 신뢰가는 병원이란 말에 귀가 솔깃해 선택한 곳이었다.
개인병원중엔 출산이 불가능한 병원이 많은 가운데, 그 병원은 출산도 가능했고, 출산시 산모들의 의향을 잘 들어줄 뿐더러 일본에선 흔치 않은 무통분만을 도입한 병원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치는 ‘건강한=아이를 낳은 산모’를 위한 것에 불과했다.
그곳에선 나처럼 아이를 잃은 산모를 위한 최저한의 카운셀링도 제공되지 않았다. 그 때 처음, ‘산부인과’란 그 이름이 말해주듯,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한 장소지, 유산된 산모를 위한 곳이 아니라 사실을 알았다.
유산은 전체 산모의 약 15%에서 일어날 수 있는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도대체 왜 유산이 되는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의 유산에 관련된 서적엔, 초기 유산은 아이가 약해서 유산되는 경우가 많다고 적혀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왜 유산이 되었는지는 의사도 엄마도 아이도 아무도 모른다. 책에 써있는 대로 아이가 약했을 수도 있고, 스트레스 때문일수도 있고, 습관성 유산이 몸에 밴 사람일 수도 있고, 여하튼 너무나도 다양한 원인이 존재할테지만, 정확하게 이것때문에 유산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엄마들은 모든 잘못을 자신 안에서 찾으려한다. 내가 그날 외출을 삼가했더라면, 내가 그날 회사를 하루 쉬었더라면, 내가 임신 초기에 술만 안 먹었더라면…….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산된 엄마를 위한 제도나 의료적 치료, 정신적 조언을 찾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일부러 카운셀러를 찾아가지 않는 이상, 카운셀러를 둔 산부인과는 가뭄에 콩나기다. 개인병원만이 아니라 대학병원에도 이같은 시스템을 갖춘 병원은 찾기 힘들다.
대신 병원엔 산모를 위해 조산사 자격증을 가진 간호사가 근무하고 있지만, 그녀들 역시, 아이를 낳은 여자를 위한 어드바이스의 프로지, 유산된 여자를 위해선 “그저 푹 쉬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작 더 화가 난 것은 병원에 내게 건네준 책자였다. 아이를 그렇게 잃은 나에게 병원이 건네 준 자료들은 모두가 아이를 일부러 뗀, 즉 중절수술을 한 여자들을 위한 것뿐이었다. 임신중절이 얼마나 여성의 몸에 독이 되는가를 해석한 글들을 읽으며 무작정 서러운 밤을 보냈다.
어떻게 아이를 유산한 여자에게 중절에 관한 책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줄 수 있을까? 중절한 여성과 임신 중기에 유산된 여성은 그 몸에 대한 부담감은 같을지 몰라도, 그 마음까지 똑같을까?
준비된 자료라고 건네준 것들이 겨우 그런 쓸모없는 것들 뿐이었다. 출판 왕국이라 불리는 일본이지만, 육아, 출산에 관한 책들도 적지만, 유산에 대한 책들은 더더욱 구하기가 힘들다. 아니, 책 자체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려운 의학연구서는 즐비하지만, 일반인이 쉽게 읽을만한 것들은 책으로도, 팸플렛으로도 정리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결국, 아무 위로도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속을 뒤집어 놓은 책자들을 쓰레기 통에 쳐넣었다.
일부러 카운셀러를 만나러 갈 정신적인 여유가 내겐 없었다. 언중유골이라지 않는가. 말에는 뼈가 있다. 말은 삼가할수록 좋은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괜히 입밖에 꺼내면 내 자신이 더욱 비참하고 힘들어질 것 같았다. 그냥 가슴에 담아두고, 가끔 꺼내보거나, 차라리 일기를 쓰는 게 도움이 될 거란 걸 잘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일기는 유치원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써오지 않았던가.
물론 가족의 힘도 대단했다. 그치만, 그렇지 않아도 내 걱정에 가슴 졸이는 식구들 앞에선 가능한 담담하고자 노력했다. 식구가 누구라도 있을 땐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인터넷 파워도 부정할 수 없다. 인터넷 속엔 같은 처지의 엄마들이 결성한 동호회가 꽤 되었고, 얼굴도 모르는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서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완전히 소외된 15%의 산모들. 그녀들이 인터넷 속에 살고 있단 사실은 내게 주어진 크나큰 축복에 가까웠다. 하느님이 내게 주신 어떤 선물 같은 것.
퇴원하고 열흘이 지나, 뱃속에 있던 아이는 하얀 유골함에 담겨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도 못 본 아이는 그렇게 남편 가족 묘지에 묻혔다.
일본에선 임신 4개월 이후 유산은 ‘태아 화매장 허가 신청서’교부를 받아 화장 후, 유골로 처리받도록 법으로 정해져있다. 개인이 지자체에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화장과 관련된 모든 처리는 병원이 도맡아주었다.
“어렵게 아기 가졌다구요? 축하해요.”
임신 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어렵다.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사람들은 그 어려움의 정체가 뭔지나 알고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아이가 안 생겨서 어려운 게 아니라, 아이를 갖을 마음의 준비가 가장 어려웠다. 같은 일이 또 한 번 일어난다면 난 과연 또 뛰어넘을 수 있을까? 내게 그럴 힘이 남아있을까?
그치만 내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자리를 튼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한다. 난 아이를 꼭 가져야한다는 욕심같은 건 없는 사람이다. 결혼도 아이도 인간의 의사보다 더 중요한 어떤 힘이 미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내게 주어졌다면 내가 지키고 내가 키워내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윤동주 식으로 말하자면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거다. 내게 주어진 길, 우선 열 달을 견뎌보기로 작정한 이후, 외부와는 가능한한 연락을 끊고 대학원엔 휴학계를 제출했다. 나서길 좋아하고, 책임감이 강한 성격상, 무슨 일을 하든 남들보다 잘하기 위해 발버둥칠게 분명했다.
때문에 내가 안고 있는 것들을 내 손에서 잠시 놓아두기로 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선택을 취했던 것이다.
* 편집자주> 앞으로 11회에 걸쳐 필자가 일본에서 아이 낳게 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김민정
게이오 대학 졸업 후, 기자, 방송 리서치로 일본티비 정보 프로그램을 담당.
현재 도쿄외국어대학대학원 석사과정, kbs라디오 통신원, 자막번역가로 활동중.
2009년 재외동포문학상 단편소설부문 우수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