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戸(미토)에서 실버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병원장<가훈>ㄱ. 조선사람의 얼을 잊지 말라
ㄴ. 부모 잘 모시고 형제간 의좋게 살아라
ㄷ. 남이 감사하는 일을 해라
ㄹ. 남이 못하는 일을 해라
이바라기현 미토시의 한 재일동포 2세의 부엌 한 벽면에 써 있는 가훈이다.
80년대 후반이었던가.
아사히신문 사회부기자가 내게, 재일동포중에 대단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얼마 후 이번에는 nhk기자가 똑같은 말을 했다.
사연은 이랬다. 한 재일동포 2세가 일본골프장 회원권을 재일동포도 살 수 있도록 차별대우를 없애달라고 사법당국에 소송을 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소송이 마침내 3년만에 승소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사자는 즉각 일본에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nhk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까지만 해도 재일동 포들은 민단이든 조총련이든 골프회원권 자격을 주지 않았다.
때문에 아무리 돈이 있어도 재일동포들은 일본에서 골프회원권을 살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차별인 셈이었다. 바로 이를 법적으로 시정해 달라고 한 재일동포 2세가 소송을 낸 것이다.
그 당시, 이 소송은 일본인들에게도 충격이 컸다. 왜냐하면 평소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것은, 일본인 누구나 체감온도로 느껴왔던 것이지만, 이렇게 법적으로까지 차별조항이 있을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소송은 일본인 자신에게도 큰 관심이었고, 마침내 3년 후 승소를 했을 때 모두가 진심으로 이를 축하해 주었다. 어떤 일본인은 자신의 어깨에 얹어 놓은 물건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한 이도 있었다.
덕분에 당시 소송을 냈던 이 당사자는, 재일동포 사회는 물론 일본인들에 게까지 ‘정의의 사자’로 유명하게 되었다.
김정출(62세) 미노리병원장.
당시에도
그는
의사였고
, 지금도
10개의
진료과목과
9명의
의사
, 그리고
50여
명의
간호사가
있는
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 뿐만
아니라
17개의
무료
, 반
유료
, 유료의
양로원까지
운영하고
있다
. 직원은
약
400여
명
. 그 당시, 위의 두 기자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나는 화제의 인물인 김정출 미노리병원장을 찾아갔다. 미노리병원은 이바라기현 미토시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역시 그 도시에서도 김원장은 유명인물이었다.
그 때 김원장은 말했다.
“조선사람이 민족심과 자긍심을 잃어버리면 그 모두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랬다. 당시 김원장은 한반도를 가리켜 굳이 ‘조선’ 이라고 호칭했다. 일 본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은 대개 조총련계 재일동포다. 역 시 김원장도 국적이 조선이었다. 한국에는 단 한번도 가 본적이 없다고 했다. 대신 재일동포 젊은이들의 모임인 ‘
유학동’ 활동을 한 적이 있다고 말 했다.
그 때의 김원장에 대한 인상은 민족심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재일동포 2세로서의 자기철학이 확고했다. 바로 이 같은 가치관이 김원장의 집에 걸려있는 <가훈>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또한 이 같은 김원장이었기에 골프회원권에 대한 소송도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가 하면 김원장 곁에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그림자 같은 두 여성이 있었다. 조선대학과 조선신보 기자출신인 부인 서신 씨와 어머니인
박옥희 할머니 (85세)였다.
서씨는 병원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었고, 박 할머니는 병원과 양로원의 정원 등 환경조성을 담당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간 그 날도, 박 할머니는 등에 알루미늄으로 된 농약통을 어깨에 매고 잡초에 약을 치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박 할머니가 병원에서 일하는 일용직 ‘일꾼’인 줄만 알았다. 게다가 얼굴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나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원장의 어머니였다. 종합병원의 원장 어머니가 병원에서 가장 허름한 잡일을 한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병원장과 박 할머니, 환갑을 넘어도 어머니 앞에선 천상 자식의 모습이다. ©jpnews | |
그 이후, 약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미노리병원은 미토시에서는 가장 큰 종합병원으로 성장했고, 여러 형태의 양로원은 20여개로 늘어났다. 미토시에서 미노리병원을 중심으로 실버타운을 형성될 만큼 양로원 중심의 커다란 단지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미토시 어디에서든 택시를 타고 ‘미노리병원으로 갑시다’ 그러면, 운전수는 두말 않고 그대로 달린다.
전국 각지에서 양로원에 있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 미토를 많이 찾기 때문에, 미토시 택시 운전수들은 눈을 감고도 미노리병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만큼 미토시에서는 절대적인 의료기관으로 인정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년 전에는 미토역 앞에 8층건물을 짓고 한국문화센터를 개소했다. 그곳에서 미토시민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것. 현재 70여 명의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또한 2년 전에는 도쿄 우에노 역 앞에도 가나다 한국어 학원을 개설했다. 내년에는 츠쿠바에 2개의 보육원을 오픈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원장의 교육에 대한 꿈은 곧 부인인 서신씨의 꿈이기도 한 것. 오래전부 터 김원장 부부는 교육의 도시 츠쿠바에 교육기관을 설립하려고 꾸준히 구상을 해왔었다. 그런데 이번에 츠쿠바시에서 마침내 허가가 난 것.
그래서 먼저 보육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나중에 학교를 세울 예정이라 고 한다.
“이바라기현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이 자식들의 교육문제입니다. 아이들이 크면 모두 좋은 대학에 진학시키고 싶어하는데, 재일동포들은 민족교육도 시키면서 진학교육도 시켜주는 학교가 없다보니 걱정이 많지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그런 교육기관을 만들고 싶었는데, 마땅 한 장소와 부지가 없었어요.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장소를 알아봐야지요.” 지난 4월 11일 미노리병원에서 다시 만난 김원장은 학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열변을 토해냈다. 김원장은 학교이야기가 나오면 금방 이야기의 톤이 올라간다. 그만큼 학교에 대한 열정이 뜨겁다는 증거.
그러다 보니 도쿄에 있는 모 기관으로부터는 도쿄에 한국학교를 세워달라고 요청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현재 아케보노바시에 있는 한국학교가 포화 상태에 이르다보니 제2의 한국학교가 절실한 상태. 바로 이를 위해 교육에 관심이 높은 김원장에게 이왕에 학교를 세우려면 도쿄에 세워달라고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요청은 비단 도쿄만이 아니다. 이바리기현에서 17개나 되는 양로원을 경영하다보니, 자연 노인복지나 사회복지 시스템에 대한 것은 타종을 불허할 정도로 전문가임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
바로 이 같은 노하우를 살려 한국에도 썩 괜찮은 양로원을 설립해달라는 요청이 밀려든다는 것이다. 이미 김원장은 경기도를 비롯해서 제주도까지 몇 번이나 실사를 다녀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결정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다만 영락원 같은 곳과 자매결연을 맺고 협력차원에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 는 연수는 계속되고 있다.
▲ 미노리병원의 한 시설, 일본어로 봉선화라고 명명된 건물 ©jpnews | |
작년 10월에는 오사카의 재일동포 학교인 건국고교에서 처음으로 학생이 도쿄대학에 들어갔다고 하자, 100만엔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민족학교에서 도쿄대학 합격자가 나왔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면서 직접 건국고등학교에까지 찾아가 장학금을 쾌척한 것이다.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재일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대로 배워야 성공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언젠 가는 우리 동포들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아주 괜찮은 학교를 세우려고 합니다. 가능성도 충분히 있구요.”
옆에서 가만히 김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할머니가 한 마디 했다.
“우리 아들은 일을 벌이는 것이 취미야. 취미. 어떻게 그 많은 일을 관리하려고 하는지 참.”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반대는 하시지 않는다. 한번 한다면 끝까지 하는 아들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이바라기현 미토시의 미노리병원을 찾은 그 날은 마침 토요일이어서, 박 할머니 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국수를 먹는 날이었다.
수십 년 전부터 매주 토요일 점심은 박할머니네 집에서, 네 명의 아들과 며느리들이 함께 식사를 한다. 이것은 박할머니가 정해 놓은 박할머니만의 전통.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네 아들 부부는 박할머니가 직접 삶은 막국수와 김치로 점심을 먹는데, 박할머니의 성격만큼이나 맛도 대단히 담백하다.
박할머니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다. 홋카이도 의대를 나와 미노리병원을 경영하는 둘째아들 김원장을 빼고는 모두 조총련계 대학인 조선대학을 나왔다. 며느리들도 모두 조선대학과 조선신보 기자출신이다.
큰아들 부부는 민족학교에서 은퇴를 할 때까지 교사를 했고, 셋째 아들은 러시아어 번역을, 막내아들은 김원장의 병원일을 돕고 있다. 현재는 병원과 양로원의 규모가 커져 형제들이 모두 이일에 종사하고 있다. 김원장의 슬하 2남 1녀 자식은 모두 의사다.
▲ 미노리병원의 한 시설, 미노리원 ©jpnews | |
▲ 미노리병원의 한 시설, 일본어로 푸른언덕이라 명명되어 있다. ©jpnews | |
이들 가족은 1년에 두세 차례씩 전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데, 그룹으로 나누어 골프를 치기도 하고(물론 할머니도 골프를 잘 치신다), 함께 온천을 즐기기도 한다. 그럴 때면 네 며느리들은 번갈아 가며 시어머니인 박할머니의 등을 밀어주기도 한다.
특히 병원 안 단지에 몇 발자국거리에 사는 김원장의 둘째 며느리는 아침 저녁 식사를 맡고, 한 집 건너에 살고 있는 막내며느리는 박할머니의 한국드라마 비디오 녹화담당이다.
일명 시누이로 불리우는 막내며느리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한국드라마를 전부 녹화해 함께 나란히 누워 드라마를 본다. 때문에 이 두 고부간은 방송평론가 못지 않게 한국드라마에 해박하다. 한국드라마에 대한 매서운 비판은 필수.
그렇다고 매일 한국 드라마만 보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날씨만 좋으면 농약통을 매고 병원이나 양로원 곳곳의 정원 나무에 농약을 친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정원의 풀이라도 뽑겠다는 것이 할머니의 생각.
그래서인지 11일 미노리병원을 찾은 날도, 병원과 근처 양로원의 정원은 잡초 하나 없이 깨끗히 정리되어 있었다. 모두 할머니가 틈날 때마다 조금씩 풀을 뽑아 깨끗하게 정원을 다듬어 놓은 것.
“앉아서 놀면 뭐해.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지. 내가 우리 병원 청소반장이야. 내가 청소반장인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걸!”우리나라 같으면 종합병원의 아들을 둔 어머니가, 띄약볕에 농약통을 매고 소독을 하거나 정원의 풀을 뽑는다고 하면 아마도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들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하지만 김원장은 그런 박할머니 옆에서 태연하게 껄걸 웃는다. 할머니의 성격은 그 누구도 꺽지 못한다면서, 할머니가 원하시는 일은 절대로 말리지 않는다는 김원장이다.
그래서인지 사상적, 정치적 성향도 두 모자가 꼭 빼어 닮았다.
박할머니는 11살에 일본에 건너와 70년이 넘게 일본에서 살았다. 그런 만큼 일제강점기시대, 일본전쟁시대, 전후복구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특히 1943-5년의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과 미국의 싸움이 가장 격렬했을 때, 그때 할머니는 전쟁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서 서 있었다.
일본과 전면전을 펼치던 미군이 할머니가 살고 있는 아오모리에까지 격렬한 폭격을 가한 것.
당시, 할머니가 키우던 돼지들이 폭격을 맞아, 털에 불이 붙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논밭을 뛰어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해방이후에는 조총련의 아오모리 여맹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당시에는 김일성을 절대적인 지도자라고 생각했지. 진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신인줄 알았지. 식민지 시대에 먹을 것이 없어 일본에 건너온 일자 무식장이들이 뭘 알겠어. 그래서 그가 제일인줄 알았지.
그런데 나중에 떡하니 아들놈한테 말도 안되는 대권세습을 시키고…”
박할머니의 말대로 지금은 철저한 반 북한파다. 그동안 친북한계로 여맹위원장 활동까지 한만큼, 북한에 대한 비판도 대단히 매섭다.
박할머니는 김일성 주석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권력세습을 발표했을 때, 총련일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국적도 전 가족이 차례로 조선에서 한국국적으로 바꾸었다. 지금은 가족여행이나 사원여행을 한국으로 갈 정도로 반북이 되어 버렸다.
최근 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김원장은 막내동생 가족과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5월 골든위크 기간 중에 한국의 고향(경상도)에 갔다왔다.
조금이라도 건강이 허락할 때, 할머니의 혈육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것. 한국에는 유일하게 할머니의 언니가 생존해 있다.
할머니는 이번 여행이 자신의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원장 내외도 그런 각오로 할머니를 모시고 간다고 했다. 하지만 몇 년 전에도 네 아들이 할머니를 모시고 갈 때도 마지막여행이 될 지 모른다고 말했었다.
이 같은 박할머니를 가리켜 한 재일동포 1세 할머니가, 일본에서 가장 행복한 할머니는 바로 박할머니라고 말했다. 이 말을 둘째 며느리와 막내 며느리가 웃음으로 되받았다.
이렇듯 일본 땅 이바라기현에서, 재일동포 2세로 거대한 종합병원과 양로원의 대단지를 이루고 있는 김 정출 미노리병원장.
하지만 김원장의 야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내년에 예정하고 있는 2개의 보육원, 그리고 중고등학교 설립, 한국과 일본에 또다른 양로원 개설 등, 그가 꼭 하고 싶은, 꼭 해야 할 일은 아직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채로 계속 되고 있다.
▲ 미노리병원 본관, 현관 앞으로 길게 뻗은 길 주변은 박 할머니가 직접 가꾸고 계신다고 한다. ©jp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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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리(美野里)병원 정보
1.주소 : 〒 319-0102
茨城県小美玉市西郷地1462
이바라기켄 오미타마시 사이고우찌 1462
2.전화번호 : 0299-48-2118
3.팩스번호 : 0299-48-2029
4.병실수 : 일반병동 27, 의료병동 84
5.진료과 : 내과, 소화기과, 외과, 정형외과, 뇌신경외과, 피부과, 비뇨기과 , 항문과등
6.진료시간 : 월요일 ~ 토요일 8:30~11:45
월요일 ~ 금요일 14:30~17:45
7.휴진일 : 일요일, 경축일
8.사업목적 : 과학적이면서 시기적절한 의료에 만전을 기하고,
병・부상등에 의한 반불구상태에 있는 노인을 대상으로,
간호・의학적관리하에, 개호와 필요한 의료등을 보급한다.
※업데이트등으로 인하여 틀린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양해와 더불어 연락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