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회사 동료들과 택시를 탔다.
 
그런데 이 택시, 보통 일본택시들과 달리 승차감이 꽤 좋다. 앞좌석도 널찍하고 시트도 가죽. 한국으로 치면 모범택시를 탄 듯한 느낌?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
 
뒷좌석에 앉은 동료들도 이구동성으로 "엄청나게 넓네", "깨끗하다"며 감탄한다.
 
고작 택시한번 타는 걸 가지고 뭘 그리 흥분하냐는 의견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생활을 해 본 독자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일본택시 참 좁다. 차종도 전화걸어서 따로 주문하지 않는 이상, 거의 도요타 자동차의 구형 크라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처럼 길거리에서 우연찮게 잡아탄 택시가 넓고 깨끗할 때는 흥분할 수도 있다. 이 흥분은 시작에 불과했다. 운전수에게 별 생각없이 어디 차냐고 물었는데, 이런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아! 네. 이건 현대자동차에서 나온 그랜저라는 차입니다"

▲  도쿄 한복판에서 발견한 그랜저 택시. 일본 산 지 8년만의 첫경험.    © 박철현 / jpnews

우리 일행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그 한국의 현대자동차?! 놀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랜저를 깔보거나 그런 게 아니라, 현대차 자체가 길거리에 안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찮게 잡아탄 택시가 그랜저였다는 건, 솔직히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저것 물어보니 택시기사의 답변이 더욱 구미를 당긴다.
 
"우리 택시회사는 차종이 전부 그랜저입니다. 다른 손님들도 90% 이상이 무슨 차종이냐고 물어 오는데, 현대차라 그러면 깜짝 놀라더군요. 개중에는 현대자동차가 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긴 있지만, 다들 엄청나게 편하다고 하면서 매우 만족하는 것 같아요. 물론 운전하는 우리들도 차가 넓고 편하니 피곤이 덜하죠. 그랜저, 정말 좋은 차입니다"
 
운전사가 영업용 토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며 그랜저 자랑을 늘어 놓는다. 자동차 왕국 일본에서 현대차를 택시로 쓴다는 것도 그렇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택시기사들이 1년에 500대도 채 안팔리는 현대차를 찬양하는 모습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래서 아예 직접 그랜저 전문 택시회사 "에어매직"을 방문하기로 했다.
 
늘어선 그랜저에 압도당하다!
 
"아! 그래요. 언제든지 놀러 오십시오. 사실은 나도 재일동포입니다. 하하하"
 
회사를 찾아가기 3일전쯤 전화로 취재약속을 잡는 도중 유창한 우리말이 수화기 저편에서 갑자기 들려왔다. 처음 그랜저 택시를 탔을때 운전수로부터 "우리 사장은 재일동포 2세"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정도로 유창한 우리말을 구사할 줄이야. 민족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발음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재일동포라고 한다면 총련계 조선학교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총련계 출신 기업가가 남한기업 현대자동차의 그랜저를 구입해 택시회사를 운영한다는 것도 드라마틱한 스토리다.
 
7월 21일 오후 5시 도쿄 이타바시의 '에어매직'을 찾았다. 허름한 사무실 옆 주차장에는 그랜저 택시 6대가 늠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 도쿄 이타바시구에 자리잡고 있는 그랜저 전문 택시회사 '에어매직'    © 박철현 / jpnews

▲ 차지붕에는 '타쿠시(タクシー)'가 아니라 "park limo"라고 적혀 있는 표지가... © 박철현 / jpnews

보통 택시들은 차지붕 한가운데 택시임을 알리는 표지로 'taxi' 혹은 택시의 일본식 발음 '타쿠시(タクシー)'를 적어놓는데, 그랜저 택시는 "park limo"라 적혀있다.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전화상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박일경(46) 사장이 사무실 창문에서 이쪽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그냥 택시라고 달아도 되지만, 우리는 리무진 택시라는 자부심이 있거든요. 그래서 리무진(limousine)의 약자를 따서 'limo'라고 한거야. 앞에 park는 내가 '박'씨라서 그렇게 넣은 겁니다. 하하하"
 
박일경 사장은 1998년에 '에어매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 에어매직은 빠찡코 가게의 전단지나 홍보용 간판, 현수막등을 만드는 광고인테리어가 주업종이었다. 그런데 박일경 사장이 빠찡코 관련 사업을 시작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가 조선학교만 다녔거든요.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조선초중고급학교는 중학교까지만 학력인정을 해주니까, 조선학교쪽만 계속 다니면 졸업하고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사업이나 조직(조총련계통) 일을 하던가, 아님 동포들이 많이 있는 빠찡코, 야끼니꾸 이쪽 밖에 할 일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 회사도 처음에는 동포들 빠찡코 가게 이벤트 광고 만들어 주고 그랬던 거죠"
 
광고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일본의 은행이 투자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때 박일경 사장의 머리속에 떠오른 것이 택시였다. 이유는 옛날 택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속에서 나왔다. 그때 택시운전을 하면서 택시운전수들이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걸 보고 이해가 안갔다고 한다.
 
"택시 아르바이트하면서 이거 택시운전사가 너무 피곤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했죠. 운전사가 일하는 도중만큼은 즐겁게 일을 해야 손님들과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대화도 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하게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에도 피곤해서 나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천지차이가 있죠"
 
박일경 사장은 종업원(택시운전사)이 신명나게 일을 해야 고객(승객)과 회사가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를 줄곧 생각해 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06년 은행투자금 4천만엔(한화 5억원)을 유치하자 본격적으로 신규 택시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택시차종을 그랜저로 정한 것에는 이런 '종업원 우선주의'가 가장 컸고, 그 다음이 이왕이면 같은 민족인 남측기업 도와주자는 마음의 발로였다고 한다. 
 
"차종을 고르다보니 그랜저가 차내도 상당히 넓고 천장도 높고 해서 참 좋다는 생각을 했죠. 이전에 나왔던 xg와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랜저로 하려고 했는데 좀 비싼거예요. 이미 차량은 17대로 정해져 있었고  나도 경영자니까 자금 사정에 맞게 해야 합니다. 처음에 은행에서 2300만엔 주겠다고 했는데 이 돈으로는 그랜저 17대는 무리지요. 에라이 모르겠다 하는 심정에 4000만엔 달라고 하니까 통과되더군요. 그때 4000만엔 안나왔으면 그랜저 못했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돈이 조금 모자라 17대중 그랜저가 15대고, 2대는 도요타 크라운으로 했다. 현재 택시부문의 종업원은 40명이다. 택시 17대라면 일본에서는 그야말로 소규모 택시회사다. 하지만, 박일경 사장의 경영철학대로 종업원의 하고자 하는 의욕은 대단했다.
 
종업원들 이구동성으로 "이 회사가 최고야!"
 

▲ 기사 대기실에서 만난 분들은 모두가 그랜저와 에어매직을 칭찬했다    ©jpnews

기사휴게실에서 만난, 26년간 택시운전 한길을 파온 오카다 데루요(55) 씨는 스스럼없이 '에어매직'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일본 최대의 택시회사중 하나인 히노마루에 9년이나 있었던 그는 "여기 들어와서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없을 뿐더러, 그전까지는 회사를 위해서 일한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회사를 같이 키워보자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충실하다"고 말한다. 그랜저에 대해서도 극찬을 한다.
 
"그랜저는 역시 다르다. 일단 파워가 있고, 안이 넓다. 시트가 전부 가죽이라 열 몇시간씩 운전해도 그렇게 피곤해지지 않는다. 손님들도 넓고 편안하다며 무슨 차종이냐고 물어올 정도로 극찬한다"
 
옆에 있던 요시가 시게루(59) 씨 역시 "아직 40명에 불과한 조그마한 택시회사지만 이렇게 종업원들이 손님들께 칭찬받아가며 운전할 수 있다는 건 쉬이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기존의 택시회사는 사납금 채우느라 녹초가 될때까지 일하고 또 '노르마(ノルマ, 할당량)'에 따라 종업원에게 돌아오는 임금이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한달에 40만엔대 매상을 기록했다면 40%, 50만엔대면 50%,  60만엔 이상을 하면 60%가 택시운전수에게 떨어지는 차등시스템으로 나간 횟수(일수)도 최하 10일이상 등의 기준이 있다.
 
하지만 에어매직은 운전수들이 올린 매상이 얼마가 되었던지 무조건 62%를 지급한다고 한다. 또 10일이상등의 기준도 없다. 한달에 하루만 나가더라도 62%를 준다는 것이다. 요시가 씨가 덧붙인다.
 
"우리로서는 힘이 날 수 밖에 없다. 차가 좋으니까 피곤하지도 않고, 손님도 기분좋게 말 걸어 오고. 게다가 매상까지 이렇게 대우해 주니까 죽을때까지 여기서 일하고 싶을 정도다.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창업멤버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절대 자신의 얼굴은 찍지 말라는 박일경 사장.    © 박철현 / jpnews

박일경 사장은 지금은 광고에서 벌어들이는 것을 택시쪽에 쏟아넣고 있지만, 차츰차츰 택시 대수도 50대, 100대로 늘려나갈 계획도 잡고 있다. 그러면서 그랜저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각을 교정해 나가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도 느낀다고 말한다.
 
"손님들은 거의 전부 현대 그랜저를 처음 타보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가 좋은 인상을 받습니다.
 
10명중 9명이 '이 차 무슨 차길래 이리 좋냐?'고 물어오는데 하루에 차 한대당 50명의 손님을 받는다고 계산하면 15대니까 하루에 750명이 그랜저를 체험해 본다는 말이 되지요. 한달이면 약 2만명, 1년이면 24만명.
 
이 24만명이 실제로 그랜저를 경험한 후에 남측 자동차도 좋구나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만으로도 같은 동포로서 뿌듯합니다"
 
현대자동차는 최근 유럽시장에서 인기를 끈 i20을 일본시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쪽의 반응은 싸늘하다.
 
과거 수차례에 걸쳐 과감한 홍보전략을 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자동차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지도는 제로에 가깝다. 1년에 500대 판매도 버거운 현실을, 동포기업이 비록 느리지만 착실하게 돌파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취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박일경 사장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자 곧 죽어도 자기 얼굴을 찍지 말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경영자일뿐 주인이 아닙니다. 저쪽 종업원들을 많이 실어주세요. 저들이 주인입니다."
 
작년부터 찾아온 경기불황때문에 일본에서도 비정규직, 파견직 노동자들이 갈곳이 없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에어매직이 실천하고 있는 '인간경영'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거둘지 지켜보고 싶다.  
 

▲ 현대자동차 그랜저의 위용   © 박철현 / j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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